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 (3)

2011.07.28 11:02

김영교 조회 수:621 추천:54

- 마리지빌과 로랑생 (의문의 창녀 Marizibill) 아폴리네르의 시에 등장하는 이색적 여인이 창녀 마리지빌이다. 평자에 따라 어디까지나 가공의 인물이란 주장도 있지만 아폴리네르가 상상의 인물을 시로 남긴 경우가 드물어 일단 그가 남긴 시를 통해 이여인을 한번 따라가 보자. <마리지빌> 쾰른의 호에 슈트라세에서 저녁 때 그녀는 왔다 갔다 하다가 누구에게나 온갖 교태를 부렸지(....) 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알고 있어 낙엽처럼 불안정한 그들의 운명을 그들은 이겨내지 못해 그들의 눈은 꺼지다만 등불이고 그들의 마음은 문짝처럼 덜그럭거리네 이 시는 ‘마리 시빌(Marie-Sybille)'이란 제목으로 한번 발표했던 것인데 그의 시집 <알코올>에 ’마리지빌‘로 제목이 바뀌어 재수록 된 시다. Sybille은 프랑스어로 고대 그리스 아폴론 신전의 무녀 시빌과 동음어. 그래서 마리 시빌은 결국 무녀 마리와 같은 말이 된다. 무녀와 창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속박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고 평론가들의 해석이다. 무녀와 창녀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야 예언을 하는 일이나 몸을 파는 일을 수행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 따르면 창녀 마리지빌을 아폴리네르는 쾰른의 대성당 옆, 호에 슈트라세(Hohe-Strasse)에서 만난다. 쾰른 대성당은 동방박사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쾰른을 여행 할때 애니도 함께였다. 영국처녀와 한창 사랑을 속삭이며 창녀를 운위 하는것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 무릇 사내의 속셈을 누가 알겠는가? 아폴리네르의 연보를 들여다보면 애니를 찿아 첫 번째 런던을 다녀와서 두 번째 런던을 찾기 전 그 새참을 못 참아 이웃 여인 이본느와 썸씽이 있지 않는가! 마리지빌이란 이름은 그의 단편집 속 ‘가짜 구세주 앙피옹(L'Amphion faux messie)'에도 등장 하는데 여기서는 성공적이고 매력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20대 청년 아폴리네르의 뇌리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이름 마리지빌은 뭔가? 오직 누항(陋巷)의 사내들만 희죽 웃음 지으며 뭔소린지 알겠다는 시늉을 보여 주어야 하는 이름인가? 첩의 딸,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자란 첩의 딸 로랑생, 목메도록 부르고 싶어도 부를 아버지가 없었던 아폴리네르. 두 상처 받은 청춘은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유명한 畵商 ‘클로비스 사고(Clovis Sagot)’의 화랑에서 운명적 첫 조우를 한다. ‘사고’는 피카소의 그림 한점을 150프랑 받고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에게 팔았다. 피카소 그림으로서는 파리에서 첫 거래였다. 스타인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피카소를 알아보고 수많은 그림을 묵묵히 사준 후원자고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엇등을 도와준 센느강 좌안(左岸 Rive gauche)을 좌지우지했던 여류 문인이었다. 그러니까 스타인은 아무도 안 찾는 피카소 그림을 혼자 1909년까지 열심히 사 모았고 그뿐만 아니라 로랑생의 그림 <예술가들>도 샀다. <예술가들> 속에는 중앙에 아폴리네르가 앉아 있고 피카소의 얼굴도 보인다. 물론 화가 자신의 얼굴도 어엿이 오른쪽을 차지 했고. 피카소는 스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 로랑생은 욍베르 회화연구소에서 소묘를 공부한 뒤 그 유명한 ‘세탁선(Bateau-Lavoir)’을 기웃거렸고 아폴리네르는 절친한 두 친구, 피카소와 막스 자콥이 살고 있는 이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세탁선‘이란 몽마르트르 부근에 있던 가난한 화가, 시인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던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로랑생의 어머니 멜라니-폴린은 노르망디 작은 어촌 출신으로 스무 살에 파리로 와서 가정부, 식당종업원을 전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한 부유한 남자의 첩이 되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다. 로랑생은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던 시절, 열대 식민지의 혈통이 약간 섞여있는 형용하기 어려운 매력을 지닌 미인이었다. 불우했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인지 둘은 깊숙한 사랑에 빠져 들었다. 큐비스트의 뮤즈로 불린 로랑생과 미술의 큐비즘을 자기 시에 체화시킨 아폴리네르는 서로의 예술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신적 반려가 된것이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 애니를 잃은 깊은 시름에서 탈출을 한다. 로랑생을 만난 이듬해인 1908년에 생업을 위해 다니던 은행도 그만 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는데 온 정력을 기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랑생도 아폴리네르를 만나던 그해에 생애 첫 개인전시회를 갖는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던 5년간 각자 분야에서 재능이 활짝 꽃피기 시작한 황금기였다. 몽마르트르 기슭 레오니 가(街)에 살던 아폴리네는 두 번이나 이사 끝에 로랑생이 어머니와 살고 있던 오퇴유(Auteuil)지역 라 퐁텐(La Fontaine)가로 거처를 옮긴다. 로랑생은 35번지에 살고 시인은 10번지에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오퇴유 지역이란 센느강 건너 파리 서쪽인데 몽마르트르나 몽파르나스 처럼 예술가들이 사는곳이 아니고 장인(匠人)들의 공방(工房)이 밀집한 지역 이었다. 오퇴유 지역에서 파리 중심가로 나갈려면 꼭 미라보 다리를 건너야 했다. 로랑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도 수없이 건넜던 다리, 미라보. 여기서 훗날 아폴리네르의 대표 명시 ‘미라보 다리’가 탄생 하는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오퇴유로 이사온 1909년부터 잦은 오해와 언쟁이 두사람 사이에 일기 시작한다. 개성이 강했던 두 사람의 애정이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 한 것이다. 아마 서로 자기분야에서 완벽하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간이 였으니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게 쌓였으리라. 결국 3년뒤인 1912년 6월 로랑생이 결별을 선언 했다. 친구들이 나서서 화해를 주선 했으나 로랑생의 마음은 단호했다. 결국 아폴리네르는 오퇴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파리 중심에 있는 생 제르맹(St-Germain)가 202번지의 한 아파트를 빌린다. 입주계약을 10월15일에 하고 이사는 이듬해인 1913년 1월에 간 것을 보면 시인의 마음고생이 말도 못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할 수가 있다. 불화가 길어지자 친구들은 두 사람을 위해 여행을 주선했다. 8월11일 노르망디 지방 빌르키에 (Villequier)로 간 화해를 위한 여행에서도 로랑생은 마음을 돌이킬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화가 치민 아폴리네르는 8일간 머물다가 혼자 파리로 돌아와 버렸다. 두 사람이 갈라선 결정적 이유에 대해서는 대개 2가지 이유가 나돈다. 파경 3년뒤 아폴리네르가 약혼자 마들렌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로랑생의 결혼요구를 시인이 차일피일 미루었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 주장으로는 그때 자신은 미술평론집 ‘미학적 성찰-입체파화가들’을 집필 하느라 로랑생의 요청을 도저히 받아드릴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파경설은 1911년 8월25일 루브르박물관 소장 <모나리자>도난 사건에 여파로 아폴리네르가 상테 감옥에 잡혀가 구속되었던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시인은 증권가 금융지에서 일할 때 사귄 벨기에인 제리 피에레(Gery Pieret)와 룸메이트를 했다. 이 친구가 아폴리네르와 같이 살기전인 1907년3월 흉상 2개를 루브르박물관에서 훔쳐다가 피카소에게 팔았다. 그리고 1911년 5월 다시 하나 더 훔쳐와 시인과 같이 사는 아파트에 감추어 두었다. 이 사실을 안 아폴리네르는 제리를 다그쳐 자신의 집에 숨겨 두었던 흉상을 ‘파리 주르날(Paris-Journal)'로 보내 루브르 박물관으로 반환되도록 조치 하였다. 또 친구 피카소를 설득하여 4년전 그가 구입한 흉상 2개를 비밀리에 루브르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제리가 흉상 훔치는 것은 식은 주먹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통에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수사하던 당국에 걸려들었다. 흉상절도 공범으로 몰린 아폴리네르는 9월7일 잡혀가 상테 감옥에 수감 되었다. 결국 많은 문인들이 탄원서를 내는등 곡절 끝에 닷새만에 풀려 났다. 그러나 일부 선동적 언론은 아폴리네르를 박물관을 터는 외국인 국제조직의 일원 이라며 시인에게는 아주 치명적 보도를 서슴치 않았다. 또 짧은 닷새간의 수감생활 이었지만 상테 감옥에서는 외국인이라고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강제로 발가벗고 알몸이 되어야 했고 쇠사슬에 묶인 의자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지난 세월과 갑자기 단절되어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가 곰곰이 되돌아 보는 뼈아픈 경험을 한것이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로랑생은 독일 귀족출신 화가, 오토 폰 배트겐(Otto von Watgen)과 1914년 6월에 결혼을 했다. 두 달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남편이 독일인 이니까 파리에 머물수가 없어 스페인 말라가로 피난을 떠났다. 말라가에 머문 로랑생은 시인과 편지는 계속 주고 받았다. 남편과의 참담한 결혼생활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고 또 아폴리네르의 詩 ‘변두리’의 독일어 번역판을 출간할 때 표지에 시인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변두리(Zone)'는 아폴리네르 시 가운데 속칭 <로랑생 篇>에 속하는 시다. <로랑생 篇>의 시들은 <애니 篇>의 시들 보다 실연에 따른 절망감의 정도가 한수 아래다. <애니 篇>에서는 죽음까지 고려할 정도로 절박함을 노래했는데 <로랑생 篇>의 시들은 멀어져가는 사랑의 슬픔을 노래할 뿐이다. 그러나 ‘변두리,’ ‘사냥의 뿔나팔,’ ‘미라보 다리’ 등 소위 <로랑생 篇> 시들은 동시화법(同時話法 Simultaneisme)과 입체파 미학 등을 보여주고 있어 작품으로서는 한층 더 성숙된 형식이다. 남편과 결혼생활을 불행으로 마무리한 로랑생은 다시 프랑스 국적을 회복하고 말라가에서 파리로 돌아왔다. 말라가 체류시기 고독과 절망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한때 친구 니꼴 구르와 동성애에 빠진 세월도 있었다. 돌아는 왔지만 아폴리네르가 죽고 없는 파리는 로랑생에게 이미 옛날의 파리가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의 작품에 눈길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죽은 아폴리네르의 옛 애인으로만 파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열렬한 편지도 주고 받았지만 작가로서의 제작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탈출구가 삽화와 판화. 앙드레 지드의 ‘사랑의 시도’ 라크르테르의 ‘스페인에서 온 편지’ 또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등의 삽화를 로랑생이 그렸다. 판화는 300여점 남겼고. 로랑생은 플레뤼 가(街)에 있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과 야콥 가(街)의 60여년 세월을 자랑했던 나탈리 바니의 살롱을 드나들었다. 두 여걸들의 공통점은 미국에서 왔고 유명한 레스비언 이었고 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수많은 예술인들을 거두어 먹여 살린 대모들이란 점이다. 스타인은 헤밍웨이에게 ‘비정체’ 문체를 권한 여인이다. 문장은 짧게, 검약하게, 그리고 형용사 사용을 줄여 보라고 코치 한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헤밍웨이의 특유 문체가 바로 비정체다. 당시 파리에는 예술가들이 즐겨 찿던 아지트가 하나 더 있었는데 오데옹 가(街)에 마주보고 있던 실비아 비치가 운영한 셰익스피어 서점과 아드리엔느 모니에의 서점, 라 메종 자미 데 리브르다. 이 두 서점을 경영한 여인들은 부자는 아니어서 브라이어 같은 영국 억만장자의 상속녀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실비아 비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처음 출간해 문학사적 기념비를 세웠다. 그 여파로 경제적 고초는 엄청 겪었지만. 로랑생은 스타인으로부터 홀로 선 비범한 예술가로 존경을 받았다. 로랑생의 그림도 여러점 사주었다. 스타인이 ‘길 잃은 세대를 위하여’를 출간 한 뒤, 한 때 서로 소원 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스타인이 죽을 때까지 친구로 잘 지냈다. 그러나 이런 살롱 출입도 그녀의 고독에는 전연 도움이 안 되었는지 로랑생은 일흔세 살로 혼자 쓸쓸히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벨기에가 낳은 천재 역사소설가이자, 프랑스 한림원의 첫 여성회원이었던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弔詩만 우리 곁에 남아있다. 죽음의 천사가 당신에게 인사하네 마리, 우아함 넘치는 넋이여 아폴로가 하늘에서 당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네 여름이 가고 그리고 겨울이 가고 숲속의 암사슴이 모습을 감췄네 흰 옷, 장밋빛 옷, 푸른 옷 천 명의 천사가 하늘나라로 당신을 맞으로 와 있어요. (계속) July 10, 2011 씨야 1,2,3을 한편으로 묶어 놓으시면 안될까요?. 흘러 흘러 뒷면으로 사라진 글, 앞으로 다시 빼놓는것도 남에게 폐가 되는 일 아닐까요?. 칸수는 한정 되어 있고 남들도 다 신경써서 올려 놓은 글들인데 거기다가 제글이 뭐 잘쓴 글이라고 새치기 하는것은 무척 미안하고 민망한 일에 속합니다. 부고USA 저 혼자 전세낸것도 아니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 하는지 몰라도 저는 좀더 다른 동문과 함께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가끔 글을 올려 주시는 동문들은 속으로 무척 섭섭한 마음도 들지 않겠습니까? 자기 글이 밀려 후닥 자취를 감춰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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