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 (1)

2011.07.28 11:16

김영교 조회 수:239 추천:52

- 짝사랑 마리아 (Maria Dubois) 열아홉 숫총각 아폴리네르를 설레게 한 마리아(Maria Dubois)는 마클로트(Maclotte)란 민속춤을 껑충껑충 추며 마치 감기처럼 그를 찿아왔다. 카지노가 있는 프랑스 북부 아르덴 (Ardennes) 옆의 소도시 스타블로(Stavelot)에서다. 아폴리네르는 이곳에 어머니의 11살 연하 애인 베유(Weil)과 함께 머물렀다. 휴가중인 장교행세를 한 베유는 곧 조카들이 올 것이라며 집주인에게 말했고 곧 뒤이어 아폴리네르 형제를 데리고 어머니 올가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애인과 아이들을 여기 남겨두고 10Km 떨어진 아르덴을 찿아가 카지노 출입을 시도했으나 성공 하지 못했다. 나쁜 행실 때문. 어머니는 약 보름 머물다가 아폴리네르 형제를 남겨두고 젊은 애인과 날아버렸다.아폴리네르 형제가 스타블로에 머문 기간은 1899년 7월중순부터 10월 말까지. 그 석달여동안 아폴리네르는 짝사랑을 경험한다. 스타블로는 왈롱어(Wallon語)를 쓰는 지방이다. 마리아(Maria)를 왈롱어로 표기하면 ‘Marei’가 된다. Marei 내 사랑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인지 말해다오 별 하나가 그런데 우리들 이마를 향해 어느 날 저녁 빛났지 아 내 소망의 행복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면 나는 온몸으로 금욕의 모든 고통을 참아 견디리라 내 사랑아 그대가 원한다면 우리는 오솔길로 가리라 새들이 우리들 옆에서 기쁘게 날 것이오 (위의 시에는 구두점이 없다. 우리는 1913년을 현대시의 분기점 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아폴리네르의 시집<알코올> 때문이다. <알코올>에 구두점을 삭제 한 것은 당시 시단 사정으로 볼때 획기적 시도였다. 이 시도는 이탈리아의 마리네티(Marinetti)가 기계문명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미래주의 제2선언인 ‘미래파 문학의 기법 선언’을 따랐다는 게 정설이다. 원래 시란 번역불가지만 아폴리네르의 시를 번역한다는것은 큰 모험인 이유는 구두점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많이 알려진 시 ‘미라보 다리’ 경우 한국내에서 가장 오역이 많은 시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가 구두점이 없어서다.) 스타블로는 심산유곡이다. 성자들의 뼈다귀를 간직한 수도원이 있고 왈롱 들판을 굽어보는 언덕에 세워진 고성(古城), 마치 원탁의 기사들이 놀던 현장 같다. 그리고 전나무 우거진 숲속에는 공기의 요정 엘프(Elfe)가 나무들과 속삭이는 곳이다. 외지에서 온 낯선 젊은이에게 서툰 시 몇편 받았다고 이 외진 곳, 왈롱 처녀가 마음의 문을 선듯 열리가 없었다. 아폴리네르는 “나의 입에서 나는 연인의 입을 느낀다”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사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며<사랑받지 못한 사내 Mal-aime>란 열등감이 마리아를 사랑하는것에서 부터 시작, 평생 그를 괴롭힌다. 훗날 발표한 그의 시집 ‘칼리그람(Calligrammes)'에서도 마리아란 이름은 계속 등장한다. 어느 짝사랑도 다 서툴다. 그리고 꼭 깨어져야 그게 첫사랑 이다. 아폴리네르의 소유하고 제압해 버릴려는 서툼에 채 마음의 문을 열기도전에 사랑은 멀리 멀리 가버렸다. 아버지없이 자란 사생아의 심리적 불안정이 그로 하여금 확실한 사랑의 증표를 크고 작은 상호관계에서 항상 확인 하도록 원했다. 본인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바람도 상대방에게는 권위적인 강박으로 또는 질투심으로 비추어지지 않았나 추측 할 뿐이다. 마리아를 향했던 아폴리네르의 사랑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라는 이유라던가 결정적 계기를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그가 남긴 시 구절에서 느낄뿐 이다. 마리아가 평생 결혼을 안하고 20여년을 혼자 살다가 죽기전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시들을 곱게 곱게 불사르고 떠난 걸 보면 마리아도 아폴리네르를 사랑했던 것은 틀림없다. 시인의 짧았던 짝사랑의 흔적을 남긴 스타블로는 훗날 아폴리네르 문학의 성지가 된다. 스타블로시에서 2년마다 국제 아폴리네르 학술대회가 열린다. 방값과 식비 한푼 안 내고 석달 묵다가 달아나버렸던 집은 박물관이 되어 아폴리네르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 보관 하고 있다. 이집에 묵었던 아폴리네르 형제는 어머니로부터 편지로 약간의 돈과 도망치란 지시를 받고 이른 새벽 숲을 가로질러 역에 도착, 기차를 타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훗날 아폴리네르는 이때의 경험을 ‘야반도주(A La cloche de bois)'란 단막극 극본을 남겼다. 방값, 밥값을 떼어먹고 달아난 사건으로 마을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훗날 그가 세계적 대시인이 되어 마을을 먹여 살리리라는 것은 모두 꿈에도 몰랐고. 왈롱어로 ‘끄 블로 브 Que vlo-ve?'는 아폴리네르 연구학술지의 제목이 되었다. 뜻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스타블로란 소도시에서 시작 된 아폴리네르 의 짝사랑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이제 수많은 연구논문들을 토해내고 있다. 서른 여덟해, 아폴리네르의 짧았던 생애. 마리아를 향했던 짝사랑 이후, 참 많은 여인들이 기욤 아폴리네르 울리고 갔다. 그때마다 주옥 같은 詩가 남아 또 우리를 울린다. 샹송으로 더 유명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도 그래서 우리곁에 남았다. 모진 인생. 귀족의 핏줄이지만 현실적 삶은 맨 밑바닥. 심지어 생모는 카지노부근을 헤매며 웃음까지. 1880년 8월26일 시인의 출생신고서에는 아버지 신원미상. 어머니는 익명을 원함. 11월 2일 이 시인을 법적공증 할때서야 모친의 정체가 드러난다. 22세의 Angelica de Kostrowitzky. 이름 가운데 de가 들어 앉은것 보니 분명 핏줄은 귀족. 그렇다. 아폴리네르의 외조부 코스트로비츠키는 폴랜드의 명문 귀족가문 출신. 1815년 제국이 망하자 러시아에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강제이주 된다. 우리는 이때 폴랜드를 떠난 후예중 여러 별들을 기억한다. 소팽, 하이네, 니체, 조셉 콘라드....다들 폴랜드 유맹(流氓)의 후손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외조부 아폴리네르는 1857년 세바스토폴(Sebastopol) 전투에서 부상, 2년뒤 부터 유럽을 떠돈다. 그러다가 1868년부터 78년까지 교황 비오 9세의 시종으로 근무했다. 비오 9세가 죽을 때까지 10년간. 그 이후 행적은 알길이 없다. 시인의 외조모는 이탈리아 여자 줄리아 플로리아니(Julia Floriani). 그러나 남편을 버리고 영국거쳐 미국으로 가버렸다. 수도원 학교의 기숙생 이었던 시인의 어머니는 16살 되던해 수도원을 나와야만 했다. 기숙사비를 내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때부터 시인을 낳은 1880년까지 6년간 화류계 인생 아니였나 추측뿐. 그러면 아버지는 누구냐? 그저 떠도는 소문에 23살 연상의 스위스 귀족 후손으로 이탈리아 장교였던 프랑세스코 플뤼지 다스페르몽(Francesco Flugi d'Aspermont)이라고. 그냥 아폴리네르 연구자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시인이 7살 때 어머니를 따라 모나코로 거처를 옮긴다.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두 살 터울로 동생 알베르(Albert)가 태어난다. 역시 사생아. 두아이는 동생 알베르가 여섯살, 시인이 여덜살 되던 해 생 샤를르(St-Charles)란 학교에 맡겨진다. 7년뒤 이학교가 문닫을때 까지 시인은 1등만 차지하는 모범생으로 자란다. 학교가 폐교가 되니 몇 달을 쉬다가 칸의 스타니슬라스(Stanislas)교로 편입 했지만 퇴교를 당한다. 금서를 학교에 들고 왔다는 죄목으로. 1897년 니스 고등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고 시인의 가방끈은 여기서 끊어진다. 이때부터 도서관을 드나들며 닥치는대로 읽는다. 그 많은 독서량이 결국은 대시인을 잉태한 것이다. 시인 아폴리네르네 세 식구가 파리를 찿아든것은 1899년 4월. 모진 가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시간당 4상팀(Centime)을 받고 광고 전단지 수취인 주소를 쓰는 일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궁여지책으로 가난 타개책으로 카지노 도시 아르덴을 찿아갔고 덕분에 시인은 짝사랑 열병을 치루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폴리네르는 책을 손에서 놓치 않았고 특히 도서관 마자린의 사서 레옹 까앵(Leon Cahun)은 아폴리네르가 시인으로 대성하게끔 적극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1900년 10월11일, 파리 시청에 가서 외국인 등록을 마쳤는데 그때 남겨진 기록을 보면 키는 165cm, 금발에 수염은 없다고 전한다. 역시 사생아로 태어나 역경속에 살아온 환경이 체구를 왜소하게 하지 않았나 우리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계속) July 4 2011 씨야 15 김호중 :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9)는 로마에서 비에름 아폴리나리 드 코스트로비츠키(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y)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가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썼으며, 프랑스로 이민을 가면서 이름을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로 바꾸었다. 어머니 안젤리카 쿠스트로비츠카(폴란드어: Angelica Kustrowicka)는 지금은 벨라루스 땅인 노보그로덱 근교에서 태어난 폴란드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39세에 요절(夭折) 아폴리네르는 분명 1918년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2차대전이 끝나기 이틀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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