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ita

2011.07.29 04:08

김영교 조회 수:144 추천:53

에비타, 그리고 포퓰리즘 / 김영환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오. 진정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니….”(에비타) 1952년 7월 26일, 꼭 59년 전에 남미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 페론 에비타가 자궁암으로 33세의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삶은 미국의 가수 마돈나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 ‘에비타(Evita’)에서 보여주듯이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팜파스의 농장주였던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에 무작정 가출하여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뒤에 닥치는 대로 직업을 전전하면서 선전 포스터의 싸구려 모델, 가수,연극배우, 라디오 진행자 등을 거쳐 당대의 권력자로 부상하는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 남미판 신데렐라의 꿈을 이뤄갑니다. 에비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한 가지 커다란 야심이 있음을 고백한다. 내 조국의 역사 어딘가에 내 이름 에비타가 기록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가 죽어 시신을 방부 처리할 때에 몸무게는 33킬로그램이었습니다. 질병 속에서도 독재자인 남편의 보호와 서민을 위한 격무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남편 페론은 정치학에서 페로니즘으로 잘 알려진 포퓰리즘의 전형이었고 에비타는 그 조역을 잘 수행했죠. 페론은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해 바닥 민심을 얻어 정권을 유지했지만 정교한 정책의 부재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선심으로 국고를 탕진했고 부정부패로 오염되었기에 학자에 따라서는 그를 ‘남미병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확고한 철학 없이 재정이 감당 못할 정도의 사회복지, 성장보다는 분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맹목적 신드롬이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것이죠. 193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세계 7대 부국이었으며 남미 최초로 1913년에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정도로 선진국이었습니다. 밀과 고기가 주된 수출품으로 2차 대전 때에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외교로 양쪽에 식량을 공급하여 20억 달러의 외화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흉작의 후유증으로 소작하던 농민들이 농촌을 등지고 대거 수도로 떠났습니다. 마침 수입대체 산업을 통한 공업화와 3차 산업의 발전으로 일손이 필요했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1947년 470만 명에서 1960년에는 750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수많은 비숙련 노동자들은 조직화되지 못해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페론은 노동장관을 거치면서 임금 인상과 권리보호 등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그들을 추종세력으로 키웠고 1946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축적된 외화로 외국인의 소유였던 철도도 국유화했습니다. 그러나 수출은 반감했고 수입은 폭증하여 국내총생산(GDP)이 격감했습니다. 그가 내건 사회정의, 경제적 독립, 정치적 주권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페론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지기반을 노동계급에서 찾다보니 군부나 사회 엘리트,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이 유발되었고 이는 두고두고 사회를 균열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55년 페론이 처음 물러난 이후 23년간 14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는데 이는 거의 폭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에비타는 죽을 때까지 기존의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데스카미사도스(셔츠 없는 사람들)’ 라고 불리운 노동계급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어 자선병원이나 고아원 등의 단체를 지원했으며 그를 만나려고 줄지어 선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돈, 잠잘 곳이나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에비타는 “나 자신이 마치 모든 비천한 사람들의 어머니인 것처럼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자신의 역할을 술회했습니다. 1955년 쿠데타로 페론이 물러나자 군부는 페론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에비타의 시신을 외면했고 그의 시신은 해외를 돌고 돌다가 1974년에야 조국으로 귀환했습니다. 페론이 망명지에서 돌아와 1973년 78세의 고령으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전처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1974년 페론이 죽자 부통령에서 서방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페론의 마지막 부인 이사벨이 난국을 타개할 마지막 수단으로 수소문 끝에 에비타를 데려왔지만 그의 귀환을 성대한 규모로 띄우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보석과 고급의상을 즐기는 사치한 독재자의 들러리, 정권을 유지하려는 장식물 정도로 에비타를 비하하는 평가도 있지만 에비타가 ‘빈자의 벗’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페론이 실각한 뒤 군부는 에비타의 초상은 물론 공식적인 추모를 금지했지만 수많은 판잣집에선 그의 천연색 사진을 숨겨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데서 그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페론여성당을 만들었고 여성 참정권을 실현했습니다. 우리도 노무현 정권 때에 공기업 지방분산, 행정수도 이전 등 균형발전이란 이름의 포퓰리즘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추모는 그런 포퓰리즘의 수혜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어느 사회에나 부자보다 빈자가 많으면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이 정치변동의 원인이 되는 것을…. 페론도 권좌에서 물러난 지 18년 뒤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으니 포퓰리즘의 위력은 알만한 것이죠. 요즘엔 우리나라에서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무료시리즈가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초등학교 무료 점심은 ‘전부냐’, ‘하위계층 50% 먼저냐’를 놓고 8월 말의 주민투표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년 총선대선이 두려운 정당들도 요즘 무원칙한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여 표를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능력을 초월하는 분배가 어떤 결과를 빚는지는 아르헨티나의 옛 사례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눈앞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현재의 짐을 후손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죠. 물론 민주사회의 정치인들이 바닥 민심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빈부격차를 축소한다는 행위가 부자들까지 퍼줘서 미래의 성장을 좀 먹고 거꾸로 양극화를 확대하는 모순은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 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 현 자유기고가. 출처: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201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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