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6)

2011.07.28 10:27

김영교 조회 수:410 추천:54

아내 Jacqueline Kolb 아폴리네르는 1918년5월2일 자클린 콜브와 결혼 했다. 독일군의 장거리 포가 파리를 향해 불을 뿜는 가운데 거행된 결혼식 이었다. 파리7구청에서 결혼서약과 신고를 하고 생 또마 다깽(St-Thomas d'Aquin)성당에서 친구 피카소를 결혼증인 겸 들러리로 세우고 식을 올렸다. 신부는 시인보다 11살 연하의 화가. 시인이 11월9일 서른 여덟으로 삶을 마감하니 꼭 6개월 7일을 아내로 지냈고 실지로 한이불 덮고 산 세월은 넉달 정도였다. 신부 자클린과 시인이 처음 만난것은 1914년 시인인 피에르 조르다앙 집에서 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1916년 가을 우연히 또 한번 마주친적이 있고 전쟁부에 근무하던 아폴리네르가 휴가차 1917년 8월 브르타뉴지방 베노데 (Benodet)에 가서 다시 재회했다. 뤼비(Ruby)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던 이 갈색머리 아가씨는 1917년12월31일, 아폴리네르의 친구들이 주선한 소설 ‘살해당한 시인’ 출판 기념회에도 같이 참석 했다. 신접 살림은 파리시내 생 제르맹가(街) 202번지 옥탑방에 차렸다. 이집은 로랑생과 뜻이 맞지않아 오퇴유에서 이사 나오면서 구한 아파트다. 이미 5년동안 살고 있는셈 이지만 그사이 군 입영기간에는 비어 있기도 했고 백작 루가 혼자 파리에 들렸을때 쓰라고 빌려주기도 했다. 년전 내가 파리에 들려 이주소를 들고 찿아갔으나 건물은 흔적이 없었고 그 자리는 조그마한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시인의 아내에 대한 기록은 이 이상 별로 전하는게 없다. 다만 그의 시집 ‘칼리그람’ 맨 끝장에 ‘아름다운 갈색머리(La Jolie Rousse)'란 시한편이 우리에게 전한다. 이 시는 자클린으로부터 착상되어 쓴것이지만 ’아름다운 갈색머리‘ 자클린을 암시한 부분은 시의 마지막 직전 한부분이다. 이제 맹렬한 계절 여름이 왔다 봄처럼 내 청춘은 사라졌다 오 태양이여 이제는 열렬한 이성의 계절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그녀가 취하는 고귀하고 다정스러운 형상을 그녀를 따르기 위해 내가 그녀만을 사랑 하도록 그녀는 다가와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 나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아름다운 갈색머리 매혹적인 모습이다. 그녀의 머리칼은 금빛이다 마치 오래 지속되는 아름다운 섬광 같고 시드는 차(茶) 빛깔의 장미가 으스대는 불꽃 같다 이시는 유언시라고 평가 받고 있는데 결혼직전 1918년 3월 한잡지에 먼저 발표 했던것을 시집 ‘칼리그람’에 수록 한것이다. 시인은 열렬한 이성의 시절을 함께할 그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아폴리네르는 긴 방황의 항해 끝에 자클린 이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것이다. 자 이제 시인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찿아 왔는지 알아보고 이글을 끝맺자. 아폴리네르는 애신느 전선(戰線), 뷔트 숲에서 입은 관자놀이 파편상으로 1916년 5월 두개골 절개 수술울 받고 갑자기 사람이 많이 달라진다. 철모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뇌부상이후 전연 다른 성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알제리를 다녀와 뭔가 전 같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약혼자를 파편상 이후 단칼에 매몰차게 차버린것은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 변연계(邊緣系Limbic system)가 있는 오른쪽 측두엽(側頭葉Temporal) 손상 때문이라고 해석 되었다. 원래는 아폴리네르는 온화한 성격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5월 ‘뇌과학 여행자’란 책을 쓴 아산병원 신경과 김종성 교수는 전연 다른 해석을 내린다. 이제까지 자기의 임상 경험으로는 측두엽손상으로는 사람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사람이 매몰차 지는것은 사회적 사랑을 담당하는 전두엽(前頭葉Frontal Lobe) 손상일때 오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아폴리네르는 전두엽에 파편을 맞은게 틀림없다는게 김교수의 진단이다. 아마 앞으로 아폴리네르 연구학자들은 김교수의 주장을 받아드려 시인이 파편상을 입은 부위가 전두엽이었다고 수정 해야 할것 같다. 수술 받은뒤 6월부터 친구들과 문인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다다이즘(Dadaisme)을 주도하던 브르똥(Andre Breton)도 이때 처음 찿아왔다. 6월17일에는 십자무공훈장도 받았다. 병원 입원중 머리에 붕대를 감고 8월 부터는 몽파르나스 카페에 얼굴도 내밀었다. 글을 쓰는것은 역시 힘들었다. 부상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시인 비로(Birot)가 창간한 ‘식(Sic)'지에 싣기도 하고 병실 에서 문학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인터뷰도 가졌다. 전에 써두었던 소설 ’살해당한 시인‘도 그해 10월에 브리포(Briffaut)출판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슬슬 문단활동을 재개 했다. 군당국은 현역 근무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보직을 전쟁부 언론과로 바꾸어 주었다. 11월에는 아주 큰 논란을 불러온 극본 ’티레지아의 유방(Mamelles de Tiresia)'을 발표하고 다음 해에는 소시집 ‘사랑으로 알그러진 삶(Vitam impendere amori)' 시집 ’칼리그람‘등도 출간 했다. 이렇게 활발하게 문단 활동을 하던 시인의 건강이 악화된것은 그해 년말께 였다. 폐충혈로 고열이 나서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1918년을 맞았다. 샹파뉴 전선에서 독일군이 쏘아댄 가스탄을 흡입한 후유증 이었다. 아름다운 갈색머리의 화가, 자클린이 줄곧 병상을 지켰다. 3월초에야 몰리에르 병원에서 퇴원 했다. 5월 2일 결혼식을 치르고 나흘뒤 다시 일주일간 병원 신세를 졌다. 5월21일 시인은 전쟁부에서 식민부 언론과로 보직이 변경 되었다. 5월말 부인 자클린이 브르타뉴 지방 케르부아얄(Kervoyal)로 내려가고 재회한것은 8월1일 이었다. 그사이 막역한 친구였던 피카소가 7월12일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 올가와 결혼을 해 증인을 섰다. 9월 프랑스를 휩쓴 스페인 감기가 그를 덮쳤다. 닷새를 앓다가 9월9일 오후 5시 숨을 거둔다. 임종은 부인 자클린과 친구들인 피카소, 막스 자콥, 장 꼭또가 지켜 보았다. 그가 숨을 거둔 이틀뒤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났다. 지금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시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시 한구절이 새겨져 있다. “무게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던가” 시인을 거쳐간 여인들은 내가 손꼽아 보니 모두 8명, 서른 여덟해를 살면서 참 복도 많았다. July 29 2011 씨야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7
어제:
14
전체:
648,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