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5)

2011.07.28 10:33

김영교 조회 수:417 추천:52

약혼까지 했던 여교사 Madeleine Pages

루와 1915년 새해를 함께 하고 니스에서 부대가 있는 님으로 가면서 시인의 기찻간 옆자리를 함께 했던 여인이 마들렌 파제스다. 알제리 오랑(Oran)에서 여자고등학교 문학교사로 근무하는 스물세 살의 처녀. 그녀와 시인은 니스서 마르세이유까지 가는 동안 주로 문학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스에서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 오빠집에서 년말을 보내고 마르세이유까지 가서 배로 갈아타고 알제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과 두시간, 서로의 문학적 감성을 읽었다. 중간에 타라스콩역에서 님행 기차를 갈아타는 말미를 이용, 루에게 엽서를 보냈는데 기찻간에서 만난 오랑의 똘똘한 문학교사에 대한 이야기도 썼다.  헤어질 때 주소는 교환했지만 아폴리네르는 그후 이 젊은 여교사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1915년 4월 10일 마른지역 45포병중대 연락병으로 명받아 복무를 시작한 아폴리네르는 엿새뒤 하사로 승진했다. 친지들에게 이소식을 전하면서 기찻간에서 담소를 나누었던 마들렌 양에게도 엽서를 띠웠다. 시인이 엽서를 보낸 날자는 4월 16일, 그녀의 답신은 시가 한 박스와 함께 5월 4일에사 아폴리네르 손에 닿았다.

시인은 루와는 뭔가 잘 풀리지 않고, 병영 생활의 답답함을 마들렌에게 편지로 풀기 시작한다. 루에게 편지를 열심히 보내봐야 대답이 없고 마들렌과는 우선 편지를 주고 받을 문학이란 공통분모가 있어서
좋았다.

6월 중순부터 루에게 보내는 편지는 현저히 줄어들고 이제는 루를 신으로 예찬 하는 글귀도 자취를 감추고 내용도 극히 짧아진다. 대신 마들렌에게 보내는 편지는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사랑을 표현하는 단계로 발전 했다.  마들렌에게 자신의 사랑 편력과 그에 따른 수많은 시들에 대한 회고를 ‘고백’이란 표현을 써가며 소상히 적어 보냈다. 심지어 상테에서의 감옥살이까지 미주알 고주알 다 썼다.

아폴리네르의 전기 작가들한테는 황금 같은 기록들 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마들렌에게 보낸 편지들은 1차대전 참전병들의 생활에 대한 아주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 되고있다. 이때 쓴 사랑과 병영생활에 관한 시들이 1918년 간행된 ‘칼리그람’이란 시집 3부를 고스란히 차지한다.

한편 아폴리네르가 소속된 부대는 치열한 전투 한복판인 샹파뉴 지방으로 전진 배치되고 보직도 중대 연락병에서 보급계 하사로 바뀐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에 쫓겼는지 아폴리네르의 마음은 점점 바빠지고 8월 9일자 편지에서는 '사랑하는 약혼자(fiancee cherie)'라는 호칭과 함께 결혼 해달라며 청혼을 한다. 마들렌의 어머니에게도 딸을 주십사라는 정중한 청혼의 편지를 보내고 수락하는 답신까지 받아 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납득하기 힘드는 시인의 처신을 바라본다. 기찻간에서 단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눈, 자기 보다 12살이나 어린 처녀에게 편지로 사랑하고 청혼까지 하는 성급함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써 전투 한복판에선 35살 청년의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편지의 내용은 별별 게 다 등장한다. 마들렌에게 “상냥하고 말 잘 듣는 노예(ma petite esclave docile)"가 되어주길 요구 하는가 하면, 프랑스 문단의 거장들에 대한 가차없는 평을 늘어놓고, 독일문학에 대한 혹평도 서슴치 않는다. 마들렌에게 21편의 시도 적어 보냈다. 심지어 마들렌의 육체를 찬미하는 ‘그대 몸의 9개의 문(Les Neuf Portes de ton corps)'이란 시로 멀리 알제리에 떨어져 있는 약혼자와 농도 짙은 관능의 세계까지 상상한다.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포탄은 그대의 젖가슴”이란 시구절도 눈이 띄인다.

아폴리네르는 섹스를 시로 대신한 소위 말하는 ’비밀시‘를 12편이나 썼다. 그중 4편이 2005년에 출간 되었는데 대부분 마들렌와 에로틱한 육체적 결합을 묘사한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9월 1일 중사로 진급, 포병 관측요원이 되더니 11월 중순에는 보병으로 병과를 옮겨 소위로 진급했다. 마침내 오매불망 기다리던 휴가 차례가 왔다. 12월 22일 샹파뉴 부대를 떠나 1주뒤 알제리 오랑에 도착 하였다. 휴가기간중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연 알려진 게 없다. 그저 연구자들 레이더에는 철학교사였던 마들렌의 아버지는 작고하고 없다는 사실과 6남매중, 딸로는 맏인 마들렌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집 가장이란 정도가 걸려든다.

아폴리네르 소위는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 귀대길에 오른다. 벌써 해가 바뀌어 1916년 1월 7일 오랑을 출발, 11일 파리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 계획을 말하고 12일 부대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편지에 나타나는 중대한 변화는 에로틱한 표현은 사라지고 마들렌의 몸을 더듬는 글도 자취를 감춘다. 대신 문학과 주변 이야기가 편지의 주내용으로 등장하고 점점 편지를 보내는 회수도 줄어든다. 3월 14일 휴가뒤 첫전투 투입과 함께 프랑스 국적을 부여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 시인은 프랑스인이 된 것이다.

이날 서둘러 마들렌에게 보낸 편지를 여기 소개한다.

나의 사랑 그대여.
나는 그대의 편지 두 통을 받았소. 곧 전선으로 떠나오. 서둘러 편지를 쓰는 중이오. 철모를 쓰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소. 어쩠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에게 물려주겠오. 경우에 따라서 이것을 유언으로 생각해주오. 현재로서는 아무 일 없기를 바랄뿐이오. 당신을 사랑하오. 날씨가 매우 좋소. 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고 언제나 굳세기를 바라오.

                                그대의 기(Gui)

3월 17일, 전투에 투입된지 3일 지나서, 오후 4시경 참호속에서 자신의 칼럼이 실린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포탄 파편이 날아와 철모 오른쪽을 뚫고 관자놀이에 박혔다. 18일, 19일 두 차례나 자신의 부상 사실을 간단하게 적어 마들렌에게 보냈다.

3월 28일 파리의 발 드 그라스(Val de Grace) 병원으로 후송 되고 수술을 받았지만 현기증과 부분마비에 시달린다. 5월 9일 몰리에르 분원으로 옮겨 두개골 절개수술을 받았다. 11일 두 줄 짜리 전보를 마들렌에게 친다. 수술 잘 받았다고.

마들렌이 파리로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8월 26일자 답신에서 마들렌이 오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9월 16일자 편지에서 아폴리네르는 오랑의 마들렌 집에 두고 온 몇몇 책과 노트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10월 9일자 소인이 찍힌 엽서에서 소포를 잘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시인이 마들렌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고 약혼은 여기서 끝난다.

마들렌은 파리 인근 생 클루(St-Cloud) 여자고등학교 문학교사로 일하다가 1949년부터 아폴리네르가 입대하기전 머물렀던 니스의 고등학교로 옮겨 근무했다. 마들렌은 1952년 아폴리네르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묶어 ‘추억은 감미로워(Tendre comme le souvenir)'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제목은 1915년 8월 11일자로 시인이 자신에게 보내준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 ‘추억은 감미로워’는 자료로는 굉장히 부실 하다고 아폴리네르 연구자들은 불평을 하고있다. 마들렌은 자기가 감추고 싶은 부분은 전부 삭제 하고 출판 한 것이다. 원래 마들렌은 이 편지들을 간행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 요구로 그녀가 받은 시들을 몽땅 베껴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유출되었다.

1918년부터 2차대전 발발하던 1939년 사이 비밀출판 되어 암거래 되는 것에 분노, 분노. 자신이 직접 출판 하기로 결심 한 것이다. 이 책 서문에서 마들렌은 1915년 1월 2일 니스발 기차에서 처음 만나 둘이 나눈 대화내용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마들렌은 죽기전 아폴리네르로부터 받은 편지와 시들을 몽땅 기증을 했다. 현재 이 문건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고스란히 보관 되어있다. 이면지, 포장지, 전단, 심지어 상자 조각에까지 적어 띠운 편지와 시들은 전선의 절박한 처지에서 사랑만이 삶의 동아줄이란 걸 웅변으로 증언 하고있다.

독신으로 산 마들렌은 73세 나이로 1965년 3월 니스 인근 앙티브(Antibes)에서 시인을 찾아 먼 길에 올랐다. (계속)

                                       July 22, 2011
                                       씨야


  
15 김호중  많은 시를 쓰고 많은 사랑을 한 시인 아폴리네르(1880-1918)도 요절(夭折) 했고,
우리 한국의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34),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43),
나도향(羅稻香, 1902-26)... 아까운 수재들이었는데 모두 다 요절했군요.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1
전체:
647,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