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4)

2011.07.28 10:44

김영교 조회 수:560 추천:52

백작 Lou 아폴리네르는 백작 루(Lou)와 남모르게 몇몇이 모여 아편을 피웠다. 1914년 9월 27일 저녁, 장소는 니스, 친구인 작가 보리 드 라 메를린(Borie de La Merline) 집에서였다. 루와는 그날 점심모임에서도 이미 만난 사이. 아편향에 취해서인지 급하기도 하셔라. 그 이튿날 시인은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1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지 꼭 두달 뒤였다. 그의 시구절 처럼 ‘한 시대에 작별을 고하는’ 대격변이 시작 되고 결국 시인도 관자놀이에 포탄 파편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전쟁이었다. 두달전, 아폴리네르는 해변 휴양도시 도빌(Deauville)에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일정을 단축, 파리로 돌아왔다. 일간지 코뫼디아(Comoedia)의 여름 특집을 의뢰 받고 도빌에서 소설가 루베이르(Rouveyre)와 함께 보름 정도 머물 예정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아폴리네르는 8월 5일 징병소를 찾아가 입대원서와 프랑스 귀화 신청서를 제출 한다. 외국인이니까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다. 스위스 쯤으로 피신해서.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자기가 살아온 프랑스에 대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외국인 부대에 입대 할 수도 있었지만 전쟁이 터지니 파리 공기가 너무 험악하게 돌아갔다. 일단 외국인은 첩자로 의심부터 받았고 당국에 통행증을 신청, 꼭 소지해야만 했고 정기적으로 갱신 절차도 밟아야 했다. 아폴리네르는 막상 파리에서 할 일이 없었다. 입대원서와 귀화신청은 8월 24일 무한 연기 결정을 통보 받았다.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업무가 폭주한 탓이었다. 그때 친구 앙리 시글레 파스칼이 니스로 가자고 권했다. 그래서 루를 만나게 되고 시인은 수많은 편지와 시를 남기게 된다. 아마 전쟁과 또 로랑생과 헤어진 공허가 컸기에 임자 있다고 밝힌 루와 관능적 사랑도 격렬했고 이별도 빨랐던 것 같다. 루의 본명은 루이즈 드 꼴리니 샤띠용(Louise De Coliny Chatillon), 종교 전쟁때 프랑스 위그노를 대표했던 가스빠르 드 꼴리니 장군의 6대 무남독녀 직계후손이며 백작(La Comtesse) 이었다. 우리는 꼴리니 장군의 동상을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만나고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볼 수 있는 유럽의 명문 가족 집안의 하나다. 루(Lou)는 아폴리네르가 루이즈를 줄여 부르는 애칭이었다. 루는 그때 33살, 조깅도 즐기고 경비행기 조종간도 잡는, 당시로는 한 시대를 앞서가는 여인이었다. 더구나 루는 한번 이혼했고 또 애인 샤를 꾸쟁(Charles Cousin)은 포병으로 근무중이라고 밝혔지만 아폴리네르는 전연 개의치 않았다. 10월 8일 세번째 편지에서 무화과와 아편파이프가 그려진 칼리그람을 보낸다. 이 경우 칼리그람이란 글자를 나열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에서 무화과는 여성의 그 곳, 바로 성을 상징한다. 이 칼리그람이 뒷날 엮어내는 ‘루에게 보낸 시(Poemes a Lou)'의 첫 편을 장식하는 시다. 두 사람은 10월, 11월 니스 인근으로 데이트도 나갔다. 그러나 루는 사랑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시인의 편지와 시가 자신에게 주는 기쁨만 즐겼다. 단호하게 밀쳐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 들이지도 않는 자세에 시인은 안달이 났다. 두 사람의 감성적 괴리는 아폴리네르의 감정에 혼란만 초래했다. 이 사랑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한 아폴리네르는 니스 지역 유지인 보리 드 라 메를린을 찾아가 가능하면 빨리 입대를 하도록 손써 달라고 청을 넣었다. 결국 아폴리네르는 12월 6일 니스인근, 로마가 건설하고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님(Nimes)에 주둔한 제38야전 포병연대에 입영을 했다. 이게 웬일인가? 이튼날 아침 병영 문앞에서 기다린 건 루. 잡으려고 고심해도 잡히지 않던 여인은 제발로 찾아와 미디 호텔에 9일을 머물며 시인과 관능의 정념을 불태웠다. 다시 만난 것은 그해 마지막 날, 니스에서였다. 하사관 후보생이었던 아폴리네르는 첫 휴가를 얻어 니스로 달려가 1915년 새해 첫 날을 같이 했다. 두 번째 휴가는 1월 23일부터 3일간, 아폴리네르는 루에게 님으로 와서 동거 할 것을 요청 했지만 한 마디로 거절 당했다. 아폴리네르는 실망하고 분노했다. 드디어 운명의 마지막 만남이 다가왔다. 3월 27일, 시인은 외출 허가를 받아 마르세이유에서 루를 만났고 서로 이별을 고했다. 루와는 변함없이 친구로 지내자는 약속만 남기고. 루를 잃은 좌절감이 시인으로 하여금 님을 하루 빨리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때 장교후보생으로 교육을 받던 중이었는데 다 팽개치고 전방으로 전출을 자원했다. 관능적 희열을 넘어 시인은 마음속으로 진정 루를 사랑하고 있었다. 4월 4일 최전방이 코앞인 마른(Marne)에 도착했다. 총소리, 포탄 날아가는 소리, 이제 시인은 진짜 전쟁과 마주했고 죽음과 대면했다. 기댈 것은 편지뿐, 쓰고 또 썼다. 내 사랑 루에게. 1914년 9월 28일자 첫 편지부터 1916년 1월 18일까지 루에게 띠운 사연은 총 220 통. 2005년 봄에서야 이게 정리되어 ‘루에게 보낸 편지(Lettres a Lou)'로 출판되었다. 이 편지들은 수많은 연구서를 쏟아내게 했다. 이 책 속 많은 편지가 루와 1915년 3월 28일 결별한 이후 보낸것이고 시 76편중 40편도 이별의 아픔을 절절히 담고있다. 문학이란 항상 애를 끊는 이별을 먹고 사는 생물인 것이다. 루에게 보낸 시와 편지가 전문가들 손에 모아진 것은 1969년, 36년에 걸친 정리, 연구 끝에 아폴리네르의 <루 篇>이 완결 되었다. 기껏 다섯 달 지속되었던 아폴리네르의 사랑이 처절, 그 자체였던 것은 전쟁을 배경으로한 절박함 때문이었다. 어느 사랑 보다 편지와 시를 더 많이 남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편지와 시 속에서 루는 별에서 신으로 까지 점점 에스까라드 되었고 병영에서 혼자 애인의 여체를 그려보는 상상은 관능의 숨결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로 변용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폴리네르는 에로소설의 작가였기도 하다. 노골적 성묘사 때문에 천대 받고 외면 받던 사드(Sade) 백작의 작품들을 재평가하여 햇빛을 보게 만든 사람도 아폴리네르 아니었던가! 젊은 날 먹고 살기 위해 쓴 에로 소설, ‘곤장 일만일천대(Les Onze Mille Verges)' '젊은 동 쥐앙의 모험(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등은 엄연히 권위있는 플레이아드 총서에 올라있는 그의 소설들이다. 프랑스에서 에로소설은 1970년까지 금서였다. 그의 에로소설들은 지하유통이었기에 아폴리네르에게 쏠쏠한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플레이아드 총서에서 아폴리네르의 에로소설을 출판한 것은 1975년이었다. 루는 1926년 까지 애인 샤를과 관계를 지속했고 1963년 숨을 거두었다. 시인보다 무려 45년을 더 산 셈. (계속) July 14, 2011 씨야 15 김호중 아폴리네르(1880-1919) 시인은 39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면서도 그의 연애행적은 오래 산 사람 몇 사람 몫을 능가하는군요. 시인이라는 '다정다감한 성품' 또는 프랑스 사회의 '연애분위기' 때문인가요? 제가 듣기로는 지금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칼라 부루니도 '남자 사냥꾼(croqueuse d'hommes)'이란 비난을 들을 정도로 남성편력이 요란했다고 합니다만. 9 김창현 아폴리네르가 숨을 거둔것은 1918년11월9일 오후 5시 입니다. 제가 본 어느 기록도 그는 서른 여덟 해 살았습니다. 프랑스란 나라 배꼽 밑은 잘 따지지 않는 나라 입니다. 왕비도 애인 따로 두는 나라지요. 15 김호중 위키백과에서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년 8월 26일 ~ 1919년 11월 9일)는 프랑스의 시인"이라고 해서 그렇게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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