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야기 / 민정이

2010.07.04 07:29

김영교 조회 수:113 추천:31

인사동 오후







인사동 입구는 무더운 여름날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거리는 젊음으로 넘쳐났고 나는 어느새 그들과 어깨를 마주치면서 다시 20대의 어린 여자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와 깊이도 잊은 채 푸른 모래가 가득한 해변을, 푸른 청춘의 한때를 그리고 고개를 내밀고 찾았다. 그리운 사람들을----- 그랬다. 그는 안개너머에서 장막을 걷고 내게로 왔다. 오십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패기만만한 청년의 모습으로 내 가슴 구석진 자리에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현실과 환상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도 차마 떨쳐 내지 못했던 그 흐릿한 그림자에 매달려.
지금의 나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20대의 꽃같은 처녀는 아니다. 염색을 하고 틀니를 낀 채 희미한 불빛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인사동 오후 역광의 빛 속에 서 있으면 나는 푸르디 푸른 스무 살로 돌아간다.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수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삶의 경계 안에서 나를 더듬고 있다. 아, 보인다. 그가 희끗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견고한 삶의 틀을 깨고서 저녁노을을 함께 맞으러 아니 나를 보러. 그는 복잡한 거리 시간의 저편에서 힘겨운 날들을 뒤로 하고 가녀린 다리를 회색의 바지에 숨긴 채 느릿느릿 오고 있다.



늦은 저녁상을 마주 한 채 그는 내게 물었다.
“라여사 이젠 라여사라고 하겠습니다. 당신과 내가 젊은 날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다면 나는 당신의 활기찬 성격으로 이상적인 가정과 당신의 끝없는 내조로 세계에 힘찬 깃발을 꽂았겠지요. 젊은 어느 날 당신을 놓친 나에게 참 많이 화를 내기도 했지요. 당신을 너무 그리워 한 나머지 당신과 함께 이름 모를 항구에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다 깨어나기도 여러 번 이지요. 당신의 얼굴을 보면 설렘과 떨림으로 가슴이 벅차군요.”



나는 이젠 마른꽃이다. 마른 검불에 불을 당기려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집착과 버림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에게서 잠깐 동안 나는 젊은 날 치기어린 그의 모습을 보았다. 밥상 가득 차려진 음식도 요즘 유행한다는 막걸리도 편히 목 아래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 불편한 시간들이 어서 가기를 하고 나는 기도 했다. 어쩌란 말인가 그저 죽음을 마주해야하는 시간만이 서로를 관류하고 있을 뿐 세월의 덧없음만 삭혀야 한다.



혼자 늙어가는 것은 슬픈이다. 그러나 살아야하고 삶이 살 만한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그 누구의 몫도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자이고 성숙과 지혜란 삶보다는 죽음과 가까이에 있음이지 않던가. 마주 보는 시선과 시선 속에서 삶의 피상성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다. 얕아진 잠속과 뒤죽박죽 엉킨 꿈들이 이제 세상의 질서에서 나를 밀어내려 하고 있다. 탄생의 첫날이 죽음의 첫 날 인 것처럼 결국 시름 끝에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처를 따라갈 뿐. 그도 나도 이 저녁 무력감에서 헤어 날 수 없다.  

세월 속에 깊이 잠겨있는 젊음의 세계. 나는 다시 막걸리 잔에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가득 따랐다. 그의 잔도 나의 잔도 가득 채웠다.



자, 이 저녁 나는 석 잔의 술을 비워야 한다.
한 잔은 우리의 근심을 위해, 또 한 잔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사랑을 위해. 사랑은 그와 나의 마지막 희망이며 인사동의 저녁불빛을 밝히는 힘이기에.
사랑의 영원한 주인공들이여 가득 잔을 채워 사랑을 마셔 볼 일이지 않던가.
잘 가거라 닿지 않던 거리에서 홀로 서성대다 돌아와 이제는 서러움이 된 사랑아

2010년 7월 2일
(민정/혜민 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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