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시여...통증님이시여...

2012.08.12 16:01

김영교 조회 수:366 추천:15

통증이시여...통증님이시여...
김창현   | 2012·08·06
    

내나이에 통증은 친구여야지만 지난 1년반 씨름을 하면서도 아직 내게낯선 얼굴로 닥아온 남일 뿐이다. 체중을 근 13Kg이나 빼가며 맞섰지만 아직 완전히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없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크론병과 투쟁하며 ‘그대를 만난뒤 삶에 눈떴네’란 명저를 남긴 여의사 레이첼 나오미 레멘은 그 책에서 “질병은 축복일수 있다”며 통증과 웃으며 더불어 살라고 권한다. 그대란 여기서 통증이다.  
내통증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제 뻔히 알고 있다. 5년전 받은 암수술의 후유증 이니까. 내가 받은 전립선암의 근치적 수술(Radical Prostatectomy)은 이름만 根治的이었지 실은 수술 받은 직후부터 긴 꼬리를 감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병원을 찿으면 ‘출혈이 있습니다‘라던가 아니면 ’염증이 심하군요‘ 하면서 처방을 해 주었는데 약을 먹으면 증상이 없어 졌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이약 저약 듣지않고 통증이 밤마다 나를 어김없이 찿아온것은 1년반전 부터다. 수술해준 분당 서울대병원을 찿아가 씨름 하다가 안돼 생질이 일하는 삼성병원 비뇨기과의 학구적 의사도 소개받아 다니기도 했다. 결국은 내아들이 근무하는 미 USC병원 비뇨기과과장 Dr. Boyd 까지 찿아가 진찰을 받았다. USC는 세계서 유일하게 비뇨기암 병동을 따로 갖고 있을 정도로 전립선암을 치료하는 선도 병원이다.

통증이란 몸을 보호하려는 반응이다. 조직이 손상되거나 병에 걸렸을때 몸에 경고를 보내는 정교한 시그널이다. 휴식을 취하라는 명령일수도 있고 약을 먹으라는 지시일수도 있다. 젊은날이거나 급성일경우 대게 지시를 따르면 잘 물러선다. 그러나 그 시그널이 제몫을 다하고도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나처럼 암을 앓은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고질인데 이때부터는 만성이란 이름을 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하는 속성을 지닌다.

의사는 암의 전이나 재발도 없고 다 나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니다. 이때부터 길고 긴 씨름에 들어 갔다. 꼭 밤에 찿아드니 방문시간을 바꿔 주십사고 간청을 들여봐야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메이데이財團보고서에 따르면 나처럼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만 미국서 2009년에 7천만, 한해 치료비가 $1천억 이상 사라진단다. 대부분 암, 당뇨, 다발성경화증 환자등이다.

통증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정의는 1979년 국제통증학회가 제시한 “실재적 또는 잠재적 조직손상에서 연상되거나 이러한 손상으로 묘사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다. 그러고 보니 암수술을 받은 내 하복부 X-Ray 사진은 섬뜩하다. 실재적 조직 손상이 역역하다. 내 뱃속을 스테플러로 막찍어 놓았다. 전립선암 수술을 수백건한 경험이 있는 아들에게 물었더니 미국서도 그렇게 한단다. 아들 말이 더 분노를 자아낸다. 레지덴트시절 카운티에서 넘어온 극빈환자들을 수도없이 수술을 했는데 MRI는 커녕 그냥 CT만 찍고 칼을 들어야 한단다. 더구나 섬뜩한 말은 극빈환자들이 대게 소수민족이기에 마취과의사들이 마취약을 제대로 주지않고도 넘겨 환자가 아주 고통을 겪는 일도 벌어진단다. 아들말은 “그게 의사야”  

통증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다. 첫째 근대이전의 통증관이 있다. 통증은 결코 단순한 몸의 문제가 아니고 의미와 은유로 가득한 영적 영역을 반영 하고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부터 통증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구약 창세기 3장18절을 보면 유대교의 하나님은 아담을 책망하며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 저주가 구속(救贖)의 수단으로 바뀐다. 그외의 여러종교에서도 보면 신에게 가까이 가기위한 한 과정으로 여겨 통증을 긍정적인 영적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간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순교자는 어마 어마한 통증이 수반되는 고통스러운 죽음도 달게 받아들였다.

또 통증의 영적 속성을 믿었기에 사법제도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신성재판(Trial by ordeal)에서 통증을 죄인을 처벌하는 방법으로 쓰면서 동시에 유죄를 판가름하는 수단으로 쓰지 않았던가? 벌건 숯 불위를 걷게 하거나 끓는 물속에 손을 넣으라고 기독교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적 속성을 믿는 이 종교적 관행은 19세기까지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1872년 미국치과의사협회장이란 작자가 갖 어느 치과의사가 발명한 에테르 마취방법을 “통증을 방해하는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활동”이라며 기를 쓰고 반대했다. 무통분만의 실행도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라(창세기 3장16절)”는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라며 종교계가 말도 안되는 주접을 떤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통증을 단순한 기계적 감각으로보는 생물학적 해석이 등장한것은 19세기다. 통증은 신호를 뇌에 전달하는 신경종말(Nerve Ending)의 작용이며 뇌가 통증의 양에 비례해 수동적으로 반응한다고 본것이다. 이 생물학적 통증관이 마취제 개발에 결정적 이바지를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급성통증에 한한것이고 만성통증에 관해서는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왜 어떤 통증은 저절로 악화되는지 설명을 못하고 있는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통증을 이해해온 방식과 경험해온 방식과도 어긋난다. 생물학적 통증관은 근대이전의통증관과 달리 통증의 의미가 천차만별인것도, 통증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가에 따라 통증 자체가 달라지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순결을 잃을때의 통증과 간강 당할때의 통증이 근본적으로 다른것을 해석하지 못한다는 의미고 변태적 성행위의 통증이 성적 학대의 통증과 다른점도 구별 못한다는 뜻이다. 또 힌두교 축제에서 순례자들이 낚시 바늘을 등에 꽂고 고챙이로 입을 꿰었는데도 아프기는 커녕 환희를 느낀다고 말하는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최근에 정립된 새로운 통증관은 근대이전과 생물학적 통증관의 양대 특성을 합친것에 가깝다. 뇌의 여러부분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여 통증이 생긴다고 보고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하면서 근대이전의 비과학적 모델에 담긴 진실도 외면하지 않는다. 통증을  단순한 신경작용이란 인식을 뛰어넘어 뇌의 의미생성부위에서 만들어낸 경험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은 보스턴의 마사추세츠 종합병원이다. 그 병원의 부설 ‘신경 가소성연구소’ 소장을 지낸 크리퍼드 울프 박사가 찿아낸 인체의 통증유관 유전자만 1,500개가 넘는다.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게 통증을 일으키고 우리를 아픔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거기에 당하고 살아야만 하는 환자는 가련할수밖에 없는것이다. 더구나 울프박사가 주장하는 ‘30법칙’이란것은 나를 참 맥빠지게 하는 학설이다. 진통제는 환자의 30%에게만 듣고 통증의 30%만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 희망적인것은 울프박사의 연구가 멈춰 선게 아니고 진행형이란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나 파키스탄 家系의 유전자속에 선천성 무통각증 변이형 유전자를 찿아내어 이것을 환자들에게 접목하는 방법에 매달려있다.  

통증은 지시 대상이 없다는게 특징이다. 사랑은 X에 대한 사랑이고 두려움은 Y에 대한 두려움등 상대가 있지만 통증는 상대가 없다. 그래서 19세기 엠허스트에서 태어난 미국의 여류시인 Emily Dickinson은 통증은 ‘비어 있다’고 노래한다.

                                                  Pain Has An Element of Blank

                                                  Pain has an element of blank;
                                                  It cannot recollet
                                                  When it began, or if there were
                                                  A day when it was not

                                                  It has no future but itself,
                                                  its infinite realm contain
                                                  Its past, enlightened to perceive.

통증을 앓고 있는 나로서는 이시 처럼 가슴에와 닿는 노래가 없다.
통증은 비어 있어서 회상할수 없고, 언제 시작되었는지, 통증이 없었던 날이  하루라도  있었다면 말이지, 미래는없어 모든 것이 통증이니까, 통증의 무한한 영토에서 모든 통증은 과거에 이미 경험한것.

통증은 무한한 영토가 아니라 ‘신경계의 질환이야’라고 외치고 싶지만
몸은 벌써 통증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가 옛날이다. 통증이란 어원 자체가 ‘처벌’을 뜻하는 라틴어의 Poena고 그리스어로는 ‘갚다’를 뜯하는 Poine며 프랑스어로는 무시 무시하게도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겪어야 하는 처벌과 고통’을 의미하는 Peine이다. 그래서 아마 통증은 사람의 본질을 ‘어지럽히고 파괴한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 했는지도 모른다.

통증의 메카니즘은 우리같은 환자가 파악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조직손상을 느낀 통각수용기는 척수를 따라 난 두 개의 경로로 통해 신호를 뇌로 올려보낸다. 하나는 둔통dull pain을 느리게 전달하고 하나는 예리한 통증sharp pain을 빠르게 전달한다. 이 시그널은 뇌간(腦幹)으로 들어가 부신수질(副腎髓質norepinephrine)호르몬을 활성화 하여 각성과 경계감정을 일으킨다. 그 다음에 시각이나 청각같은 기타감각으로 통하는 환승역,시상(視床)에 전달된다. 시상은 이 시그럴을 변연계, 체성감각피질, 전전두엽피질등 여러영역으로 중계한다. 변연계는 슬픔과 불쾌감을 만들어내며 뇌간과 변연계가 공유하는 회로가 활성화 되면 불안감이 생긴다. 체성감각 피질은 통증의 위치를 파악한다. 예를들면 발에서 생긴 통증은 뇌에 들어있는 인체지도(homunculus)의 발부위에 등록 된다. 마지막으로 전전두엽 피질은 통증의 원인을 파악하고 멈출 전략을 짠다.

뇌에는 통증자각 시스템과 조절 시스템, 서로 다른 두기능이 들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데카르트처럼 통증이 몸에서 생겨 뇌로 전달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통증은 엄연히 양방향이란 채널을 열어 놓고 영업을 한다. 둘을 관장하는 뇌 구조는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겹친다.
그래서 통증조절 시스템이 지각 시스템을 방해 할수도 있다. 만성통증이란게 지각회로의 활동이 항진되거나 조절회로의 기능이 저하 되었을때 오는 현상이다. 즉 뇌는 척수의 신경자극을 증폭하는 on신호를 보내므로 더 많은 신호가 뇌에 전달되어 통증을 심화 시킬수도 있고 또 반대로 신경자극을 억제하는 off신호를 보낼수도 있다. 예를 들면 급성 손상을 입었을때 통증신호가 뇌간과 뇌에 전달되면 유입신호를 방해하는 역신호(counter-signal)가 발생 할수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면 뇌에서 유입신호를 증폭하여 통증을 악화 시키는 신경전달물질을 척수에 분비한다. 급성손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프게 느껴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하므로 생존율을 높이는 역할을 하는것이다. 위급시에 도망을 쳤다가 위험이 사라지면 통증이 더 심해져 치료에 더 박차를 가할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전투에 임한 병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빨리 된다.

뇌 자체의 통증조절 시스템이 시판되고 있는 어느 진통제보다 월등 하다는것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다. 운동선수나 순교자나 또 중세 신성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을 견디어 낸 비결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노르망디의 엠마왕비가 시뻘겋게 달군 쟁기 위를 자기도 모르게 어떻게 걸어 갈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알수있는 사실은 통증완화를 예상하면 실제로 통증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Placebo효과라고 말하는데 뇌는 神이나 약물이 통증을 없애줄거라고 예상하면 한발 물러서서 구태여 통증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중세 신성재판에도 플라시보효과가 작용했다. 누명을 썼으니 신은 자신을 보호할거라는 확신에 차 있으면 플라시보 효과가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기 때문이다.

Placebo는 라틴어의 ‘기쁘게 하리라’란 뜻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속임수라던가 가짜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쓰고 있는데 이것은 14세기말 Geoffrey Chaucer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의 내용 때문이다. 영문학의 고전중의 고전인 이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서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 첫줄 “ 산 자의 땅에서 주를 기쁘게 하리라”를 외치며 장례식장에 나타나 거짓애도를 표하고 실은 장례식이 끝나고 열리는 만찬에만 관심있는 아첨꾼 탓이다.  

통증의 기전이 이렇게 복잡하니 내가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아프다고 호소한들 의사가 꼭 집어내서 치료해주기를 기대한다는것은 무리중에 상무리다. 한국적 현실에 종합병원의사가 환자 하나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몇분인가?. 미국의료비가 비싸다고 비난하지만 이번 USC 비뇨기과장 Dr. Stuart Boyd가 나를 진료한 시간은 내 아들을 옆에 세워놓고 상의해가며 한시간 넘게 걸렸다. 그러고 charge한 돈은 천불이 조금 넘는데 내가낸 돈은 $480이었다. 남어지는 보험회사가 물고.

나는 암수술 후유증인줄 처음엔 생각도 안하고  신경외과를 찿아가 허리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맡기도 했고 그래도 계속 아파 통증 크리닉을 찿아가 Valium을 처방받아 먹어도 별무효과 였다. 그때 어느 지인이 침술원을 추천했다. 아하! 뉴욕 타임즈의 명 논객 Harrison Salisbury가 얼핏 떠올랐다. 이십 몇 년전에 읽은 그의 중국에서의 맹장수술 이야기가 생각났다. ‘New Emperors'란 책이었던가? 마취제없이 침 몇 대 꽂고 맹장수술 받은 이야기가.

묻고 물어 어렵사리 찿아간 침술원은 환자로 철철 넘쳐 났는데 내설명을 몇마디 듣지도 않고 알겠다는듯 침 두 대를 손등 한곳에 찔러 손바닥까지 관통 시켰다. 그리고 통증은 씻은듯 사라졌다. 미국가기 며칠전이었다. 미국가서 아들이 병원 예약을 해놓았다기에 침맞고 다 나았다고 거질했다. 두달반 정도 뒤 다시 통증은 다시 찿아 왔다. 그래서 USC의 Boyd박사를 찿아간 것이다.

돌아와 다시 그 침술원 일주일에 한번씩 다니고 있다. 매번 갈때마다 피범벅을 한다. 아마 사혈치료법인것 같은데 처음엔 시커먼 피가 콧속과 종아리, 발가락 끝등에서 나오더니 이제는 선혈이 쏟아진다. 얼핏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주치의의 사혈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생각나 겁은 나지만 할수없다.

침술사의 설명이 자기는 氣만 뚫어주니 장단지에 근육을 키우란다. 결국 통증을 흡수하는곳은 근육 이란 설명이다. 그가 요구 하는것은 내가사는 아파트 23층을 쉬지말고 하루 세 번씩 올라가란 주문이었다.
아침에 한시간씩 걷던 오래된 산책습관을 아침 저녁 두시간으로 늘리고 계단을 지하주차장서 오르니 25층 높이인데 지금은  하루 두번 오른다. 처음엔 8층서 쉬고 16층서 쉬고 했는데 오늘아침은 18층서 한번 쉬고 바로 올라왔다.할수록 폐활량이 늘어나니 아마 어느날엔가 하루 세번 쉬지않고 25층을 거뜬히 오르는 날이 오리라.

체중은 한달 사이 13Kg이 빠졌다. 오늘도 침맞으러 가는 화요일 이다.
이제 둔통은 사라졌지만 오늘도 새벽 3시 15분에 잠이 깼고 소변뒤 방광이  쓰리다고 이야기 하면 침을 두 대 꽂을 것이다. 다음주에 가서 한주 내내 무사했노라고 말하면 한 대 꼽고. 그걸 되폴이 하고 있으니까.  

아마 언젠가는 결핵을 앓던 키179Cm에 60Kg의 젊은 날의 삐적 마른 내모습으로 돌아가 있을런지 모른다.

Aug  7  2012
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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