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아우라(Aura) / 안진의

2011.01.15 13:24

김영교 조회 수:265 추천:34


미국에서 온 조카의 여행가방 안에 상큼한 연두빛 가죽케이스가 눈에 띕니다. 아마존 킨들(Kindle)입니다. 온라인서적 유통회사인 아마존사가 개발한 킨들은 휴대가 편리한 전자책 단말기입니다. 여행갈 때마다 챙기는 책이 무거워 가끔은 책을 덜어내야 하나 망설일 때가 있었는데 호기심이 생깁니다.

요즘은 아마존 킨들뿐 아니라 아이패드나 스마트 폰 등을 이용해서 전자책을 볼 수도 있고, 국내에도 다양한 전자책 단말기들이 나오는 그야말로 전자책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참에 전자책 단말기를 하나 구입할까 생각하다가, 단말기 하나에 방대한 책이 들어 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굳이 종이책을 사게 될까? 책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책은 선비문화를 중시해온 우리에게 소중한 벗입니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김정국(1485~1541)은 선비살이에 필요한 10가지(十要)를 책 한 시렁·거문고 한 벌·친구 한 사람·신 한 켤레·베개 하나·창 하나·화로 하나·쪽마루 하나·지팡이 하나·나귀 한 마리라고 하였습니다. 책 한 시렁은 선비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살림이었습니다.

책을 귀한 가치로 삼는 선비문화는 책가도(冊架圖)와 같은 그림의 유행을 만들기도 합니다. 책가도는 높이 쌓인 서책들의 서가 모양에 선비의 여가를 살필 수 있는 각종 장식품들과 함께 그려집니다. 문방도(文房圖)라 불리기도 하는 이 그림은 아이들의 방이나 서재를 장식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책장에 책이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그만큼 지식의 양이 쌓여갈 거라는 최면에 걸리기도 합니다. 읽은 책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심지어 앞에 읽었던 내용이 연결이 되지 않아 다시 앞장을 뒤적거려 찾아봐야 하는 기억력 감퇴에도 책을 잡고 있는 느낌이 좋습니다.

사악사악 책장 넘기는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오래된 책은 묵은 종이의 냄새라 좋고, 침 묻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면 책 냄새는 더욱 진동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해 가을에 꽂아놓은 은행잎을 만나기도 하고, 어느 해 여름날의 모기 시체가 발견되어 웃기도 합니다.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 볼 때는 언제 구입한 책인지, 누가 선물한 책인지, 책의 앞장을 열며 미소를 짓습니다. 저자의 사인이라도 있으면 그 인연을 떠올립니다.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가지만, 책의 제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지금 읽지 않아도 결국 나의 지식이 될 것이기에 뿌듯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각해보니 책읽기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이 아니라 공감각적 경험입니다. 책마다 느껴지는 향도 달랐고 책장을 넘기는 제 손길도 달랐습니다. 책은 분명 인쇄술에 의한 복제품인데 책 하나하나는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특별한 기운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책도 아우라(Aura)를 갖는 것일까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진품 작품이 갖는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기운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술이 기계에 의해 복제됨으로써 아우라는 상실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일무이하다는 아우라가 예술품도 아닌 복제품인 책에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아우라는 사람과 사물에서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기나 고유의 분위기를 의미합니다. 복제의 기술로 탄생한 빠닥빠닥한 신간에서는 이러한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접히거나 찢어진 흔적, 독특한 향기, 밑줄 긋고 메모한 필적 등, 책이 읽혀지고 헌 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감정이 이입되며 특별한 아우라를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킨들과 같은 전자잉크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책 단말기에도 아우라가 있을까요? 아직까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전자책에서는 구구절절 감동해서 읽었던 눈물자국도 찾을 수 없고, 손때 묻은 지문이나 책을 선물한 이의 필적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한여름의 모기를 쫓던 흔적도 꽃잎을 말렸던 자국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눈길을 끌던 조카의 전자책 단말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서재의 책장에 눈길을 보냅니다. 저는 다소 무겁고 휴대가 불편할지라도 나만의 아우라가 있는 종이책이 좋습니다. 책의 부피감이 주는 넉넉함을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즐기게 될 것 같습니다.


■ 필자소개 / 안진의

한국화가.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색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에서 채색화와 색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화폭에 향수 사랑 희망의 빛깔로 채색된 우리 마음의 우주를 담고 있다.

[출처: www.freecolumn.co.kr 자유칼럼그룹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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