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이 남편 박용무선배님

2011.02.05 15:19

김영교 조회 수:461 추천:32

<弔辭, 弔詩> 잘 가게, 玄岡 9 김창현 | 2011·02·05 11:59 | HIT : 59 | VOTE : 1 | <잘 가게, 玄岡> 씨야 김창현. Jan. 26, 2010 죽음이란 그 절대적인 휴식을 준비하느라 일년여 병마와 사투하는 자네의 앙상한 몰골 앞에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잊었네.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兩班. Baudelaire 다음으로 내 곁을 찿아왔던 Dandy. 무슨 말들이 자네를, 또 우리 사이의 반세기를 서술 할 건가. 어사 朴文秀의 혈손으로, 친일 중추원참의의 둘째 손자로, 서울법대 나와 이쁜 후배에게 장가 잘 가 아나운서와 박사 아들, 의사 사위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던 한 白手乾月. 미국서 20년만에 온 내게 내민 자네의 명함은 White hands and dried luna club Senior member 였으니. 벌써 재작년 초봄 이었나 교가 구절 ‘흘러서 그침없는 한강’의 그 연원을 찿아떠났던 太白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이별여행이었네 그려. 먼동이 터오도록 연거푼 술잔에 조근 조근 이어 나간 자네의 고담준론에, 인물평에 역시 明齋學派 후손답게 피는 못 속이는구나 나는 전율했지. 전생이 큰 高僧이었음을 항상 내게 자랑했던 자네는 배내 쫌씨야. 온 산천이 자네 땅이고 이녁 마지기라고 자랑하면서 큰 술 한번, 큰 밥 한번 나는 얻어먹어본 기억이 없네. 어느 핸가 자네 땅 수만평이 누워있는 安城 금강저수지에 데려가 정자 하나 지어놓고 老來 세월이나 낚자던 자네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나. 아마 자네를 제일 약올리는 말은 독재자 박정희의 先代가 내 祖母 외가 산지기였다는 내 주장이었지. 어사 박문수의 一門 박정희는 내 할머니 외사촌 張澤相씨네 산지기 후손이 맞네. 원래 박정희네 집이 칠곡인데 張씨네 先山이 있던 龜尾로 파견 보낸 집이지. 무수리 崔씨의 소생 英祖와 어사 朴文秀가 몇촌간 이냐고 내가 족벌정치를 꼬집으면 자네는 하늘을 보고 허허 웃고 같은 少論 李麟佐의 난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는데 그 무슨 배신 이냐고 내가 어깃장을 놓으면 자네 얼굴은 일그래 졌었지. 여보게 玄岡 ! 내가 이만큼 자네 약을 올렸으면 벌떡 일어나 ‘예끼 이 사람!’ 한 마디 하고 갈 길 가시게. 우리 누구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야할 길인데 자네는 조금 일찍 나섰을 뿐. 자네 언젠가 우리가 나누었던 말 기억하나. 일흔다섯 지나면 가야 한다고. 지구도 만원이고 혹시 후손들이나 후배 붙잡고 횡설수설 치매들린 소리 지껄이고 글 갈겼싸면 그것보다 민망한 몰골이 없다고. 이제 누가있어 구식 카메라로 꼭꼭박은 흑백사진 참참이 보내줄지..... "미국 가네" 전화 하면 누가 또 "가회동이나 한 바퀴 산책하고 떠나시게" 옷깃을 잡을지.... 그 독학으로 익힌 유창한 러시아어, 중국어, 불어, 일어는 누구에게 들어볼지. 옛말에 會者定離라 했던가? 먼길 떠나시겠다니 편케 가시게. 우리 함께했던 50수년 세월은 한바탕의 꿈. 소중했던 우리들의 인연도 무슨 소용. 그냥 그렇게 우리 헤어지세. 석양은 붉은 빛을 토하며 푸른산에 걸려있고 갈가마귀들 떼지어 흰구름 헤쳐가네 落照吐紅掛碧山 寒鴉尺盡白雲間 어사 朴文秀가 남긴 싯구절 처럼 자네나 나나 이세상을 스처가는 외롭고 찬 한 마리의 갈가마귀였을뿐. 2009.5.27~28 한강의 발원지 황지 검룡소를 찾아서 사진 왼쪽 끝 현강 박용무, 오른쪽 끝 씨야 김창현 <나는 울지는 않네> 씨야 김창현. Feb. 6, 2011 편케 하셨네. 내가 마지막 본 자네는 인간 朴鏞武가 지녔던 무언가 모를 아우라를 다 팽개치고 억겁 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삶의 마지막 촛불을 끄지 않으려고 헐떡이고 있었네. 不忍見, 目不忍見... 벌써 半世紀. 내가 자네라고 불렀던 자네는 朴鏞武란 이름과 그 육신. 우리들의 인연 이었지. 名色 因緣. 이제 내게는 박용무란 이름만 남았고 그 육신은 활활타는 불길속으로 떠나보내야 하고 우리들의 因緣은 이제 여기서 멈추어야 할 시간이네. 果報는 또 來日이고. 뒤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두 가지 주장이 있네. 무한한 과거속에 始原이 있고, 그 시원은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소리 하나와 생명에는 시원이 없고 원인이 결과가 되고 그것이 다시 원인이 되는 연결고리속에 있다는 주장이 또 하나지. 영원히 방황하는 삼사라(Samsara). 분명 이승에서 나와 함께 했던 玄岡은 前生이 중이었는데 돌고 도는 길에 나와 잠시 스치노라고 했지만 자네 저승으로 떠나는 길은 또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내게 외치네. 자네가 무어라 해도 나는 상관이 없네. 네게 남은 자네는 그 이름 석자와 그 소중했던 인연들 뿐. 자네의 시계는 분명 뎀뿌라 시계였어. 내 손목의 시계와는 분명 시간이 달랐네. 느긋 그 자체였지. 아득바득 살아야할 강박이 없었던 그 좋았던 자네 팔자 덕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해탈을 해 從心所欲 해도 不踰矩의 경지를 말했는지도 모르지. 내좁은 속아지로는 그걸 짐작도 못해 항상 허덕였네. 뒤돌아보면 자네의 그몸짓 그말씨 하나가 내게는 모두 話頭였어. 혹시 귀신 죽 떠먹는 음흉에 내가 속았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저 하늘의 구름이요 바람일뿐. 자네가 내게 朴鏞武라 했을 때 그것은 분명 자네의 그림자에 불과한 名色이었고 박용무란 이름 석자는 이젠 내게 봄밤 소쩍새의 울음 소리요 空할 空에 마음 빼앗겼던 아삼프레한 하나의 집착이고 기억이었을 뿐. 이제 흩어지세. 잘가게 잘가. 나는 울지 않네. 그럼, 나는 울지는 않네. 9 김창현 이 和尙, 전생이 땡땡이 중. 내가 부지깽이들고 씩씩거리며 따라가면 저 만치 달아나 염화미소 짓곤 했습니다. 이번엔 천당 한번 가보시겠다고 십자가 품고 바쁜 걸음 떠났습니다. 종종 내 우체통에 들어있던 "除煩하고 金公 보시게"라는 어투로 지 깜냥으로 재본 천당소식을 전해줄 터입니다. 그것도 <玄岡>이라고 돋을 새김한 겉봉과 專用箋에 달필로. 그렇습니다. 꼭 만년필을 쎴고 참 達筆이었습니다. 아마 저승에서도 "金公, 공부하시게"라며 내 우체통에 책 채워주던 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씨야 11·02·05 13:49 11 김영교 은영이 남편되시는 박용무 선배님 이제 고통없는 곳에서 안식하소서. 어제 2월 5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 영안실에 들려 은영이 보담아 주었습니다. 이중 화환이 사열하듯 빽빽한 입구. 34호 길을 잃을 뻔. 김창현 선배님의 조사 읽으며 느낌이 깊숙이 파고들어 만감이 교체했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주님 타취를 기도했습니다. 11·02·05 16:51 수정 삭제 9 김창현 어제 제가 玄岡 빈소에 들렸으면 우리 부고가 낳은 대시인 김영교후배를 相面할뻔 했네요. 또 償타러 오셨는지. 지난 2일 아침 玄岡과 한날 한시에 저 세상으로 간 내 고종 11회 李光勳 主筆을 묻고 오느라 어제는 종종 걸음 쳤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구름처럼 몰려와 빈소를 지켜주신 11회 후배 여러분에게 兄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玄岡은 우리 시대의 大賢者였습니다. 역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예지에 저는 항상 옷깃을 여몄습니다. 내일이면 光勳이처럼 한줌의 재가되어 仙化,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두 고인 다 1년여 병마와 싸우며 꼿꼿했던 기품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말씀 올립니다. 특히 이은영 후배의 가없는 헌신에 깊은 Homage를 표합니다. 11·02·05 18:47 9 김창현 편집자님, '네게 남은 자네는'은 '내게 남은 자네는'으로 Homage는 Hommage로 좀 고쳐 주시길. 11·02·05 20:14 11 김영교 2월 4일 1시 40분 강남성모 병원 장례예배소에 들려 문상드리고 이숙진수필가를 만나 놀란 가슴을 달랬습니다. 김창현선배님과의 인척관계를 사전에 알았드라면 기달렸다 뵙고 오는 것인데... 참으로 사람 緣의 길목이 색깔 곱네요. 사진에 선배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힘 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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