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추한 것들을 위한 노래 - 이창동 감독의 절창 <시(詩)>

아름다움은 현실의 비루함에서 도드라진다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은 가능할까. 치매에 걸린 할머니, 미자 (윤정희 역)는 시 쓰기를 열망한다.


아름다움이 치매에 걸렸다. 시를 쓰고자 하는 아름다움이 명사를 잃어간다. 미자(美子).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여자. 할머니라 불리는 그 여자는 명사를 이미 잃어버렸고 동사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지금, 시 쓰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시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처럼 ‘시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강좌에 갔더니 시인 선생님은 미자에게 ‘시상(詩想)에게 찾아가 사정해도 올동말동’한 게 시라고 가리킨다. 그래도 그녀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떡하면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선 ‘시’가 죽어가고 있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쓸 수 있는 방법을 곡진히 묻고 있었다. 영화는 아예 처음부터 강물에 떠내려온 소녀의 시체 위에 간단없이 ‘시’라는 타이틀 자막을 올려놓는다. 시체가 된 시. 시체가 될 시. 시체와 시. 시의 시체.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분절과 생략의 미학을 가지고 이창동이 우리에게 다시 온 것이다. 소설만 쓰던 그가, 마침내 영화가 시라는 걸 터득한 것처럼, 잔혹하면서도 자비로운 부정교합의 시를 읊는다.

사실 미자의 세계, 그 섬세하고 고운 서정의 세계는 몹시 위태위태하게 유지되고 있다. 손자는 급우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소녀를 성폭행해 자살에 이르게 했다. 그 소년의 아비들은 사태를 무마하려 죽은 소녀의 육체에 값을 매겨 미자에게 분담금을 요구한다. 미자가 간병해주는 노인은 반쯤 애원하는 눈길로 그녀의 손을 부여잡는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치매 초기에 놓여 있다. 이창동 감독은 시의 세계에 성기고 거친 욕망을 끼워넣고, 폭력적 현실을 난입시킨다. 영화를 보다 보면 현실의 세계에서 감정의 실타래를 뽑는 것이 시가 아니라, 감정의 실타래를 부여쥐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침입을 막는 게 오히려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처음에 미자는 자꾸자꾸 피한다. 사태를 무마하려는 학부모 회의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고, 시를 채집하러 나선다. 그녀가 동백꽃은 겨울의 꽃, 순결은 흰꽃, 이렇게 도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동백꽃은 종이 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비로소 보기’ 시작했을 때 한 소녀가 겪었을 고통의 동선에 스스로의 발자국을 겹칠 수 있게 된다. 소년들이 자신의 순결을 난자해놓았을 때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샤워를 하면서 울고, 소녀처럼 수치감을 감추고 노인에게 성적 서비스를 베풀고, 소녀처럼 다리 위에서 생과 사를 저울질한다. 오직 미자만이 소녀의 스토리와 소녀의 이름을 궁금해했고, 오직 그녀만이 소녀를 내사화한다. 미자의 손자는 심지어 죽은 소녀의 사진이 식탁 위에 있어도 밥을 먹을 수 있다. 사물과 타인의 내사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심이 혼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시>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중의적인 스토리와 풍요로운 사색이 있지만 문학으로서 시가 주는 서정성을 영화가 주는 시적 이미지로 등치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은 시를 다루는 기존 영화가 주는 정갈함, 여백, 정서적 누수, 배경음악 같은 클리셰를 모두 전복한다. 이 영화에선 화면짜기에 여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백인 공책이 클로즈업된다. 소년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거칠고 낯설고, 영화의 90%를 차지하는 미자는 늘 화면 중앙에 배치돼 있다. 게다가 화면에는 어김없이 누군가의 뒤통수가 잡힌다. 앞과 뒤. 카메라의 최선의 야심은 피사체를 잡는 ‘거리’와 피사체의 ‘앞과 뒤’에 국한돼 있다. 즉, 이창동의 <시>는 한국판 <일 포스티노>가 아니다.


마지막 장면, 이창동의 또 다른 성취


오히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추함과 남루함과 비루함에서 도드라진다. 미자의 고운 얼굴은(배우 윤정희의 본명이 미자라는 것과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던 배우인지 상기해보라) 결정적인 순간, 시든 나신과 맨몸으로 다시 전시된다. 고결한 시의 끝에는 반드시 음담패설이 이어진다. 윤리의 뒤 페이지에 윤간이 따르고, 시의 뒤 페이지에 시체가 떠다닌다. 그래서 더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 시가 죽어가는 건 시가 어렵거나 시가 죽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들이 죽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상이 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감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얼굴은 예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 아름답다.

그리하여 <시>의 마지막은 한국 영화 역사의 또 하나의 성취를 이룬다. 마음속 문학소녀가 진짜 소녀를 만나 시의 자장 안에서 영적으로 조우한다. 꽃이 된 시는 소녀의 핏빛 상처를 위무하고, 시체는 인간이 되어 스크린에서 사라질 수 있게 된다. 이 작은 초월의 순간, <오아시스>가 보여주었던 찬연한 판타지보다, <밀양>이 보여주었던 가슴 찢어지는 울음보다 더 뭉클한 무언가가 관객의 가슴을 친다. 상업적인 모든 계산을 떨치고 시네아스트의 길을 올곧게 가겠다는 이창동 감독의 결기가 느껴진다. <시>는 말할 것 없이 이창동 감독의 최고 작품이다. 무거운 생의 그림자 위에 핀 영화의 간명함이 눈부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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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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