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김영교

2009.09.03 07:21

김영교 조회 수:587 추천:121

짝사랑
  
    
가까운 한 친구가 여려움을 당하여 허탈 상태에 있을 때 곁에서 지켜보기가 나 역시 괴로웠다. 궁리 끝에 여행보다 더 좋은 치료는 없다 싶어 우리는 유럽 여행에 의견을 모았다. 사실상 기분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간이었기에 가족들의 양해를 얻어냈다. 괴로웠던, 아픈 삶의 구비를 돌아 자신에게로 환원하는 자가 탐구의 시간이 여행이기에 우리 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여행은 일상의 늪에서 벗어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스승이 되기도 한다. 새로 접하는 주위의 풍물은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기도 하여 껍질속에서 살아 온 지난 날을 반성하게도 해 주고 새로운 각오로 내일을 행해 가슴을 열 것을 다짐하게도 한다. 일상의 굴레와 온갖 소유에서 해방되어 스스로의 발가벗은 모습과 마주 설 때는 어느 때보다도 정직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어 좋다. 여행은 녹슬은 감성과 지성을 갈고 닦아서 재충전하게 하여 삶의 활력을 회복시켜 주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 발돋음하는 몸부림이 여행이라면 떠나는 연습, 헤어지는 연습에 익숙할 수록 우리는 마음이 텅 비워지는 성숙함으로 그 발돋움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게 된다.

영국에 들렸을 때다. 명멸하는 가로등에 반사된 안개비는 여행자의 가슴을 아름다움으로 설레이게 했다. 대영박물관. 세익스피어 연극 관람, 워털루 부릿지의 산책. ‘애수’의 두 여인이 대피했다는 Pub에서의 저녁 한 때는 퍽 낭만적으로 인상에 남는다. 강물과 함께 역사가 흐르는 테임스 강. 버킹감 궁전 등 정신 문화의 요람지였던 영국의 구석 구석 어느 것 하나 여행자의 흥취를 돋구지 않는 게 없었다. 우리는 가슴에 요동치던 아픈 기억을 그나마 잊을 수 있었고 공원에 앉아 비둘기 떼를 미소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여유도 생겨났다. 그 친구의 눈물은 어느 정도 말라 있었다.

동창생 섭을 찾아 만난 게 그 때쯤이었다. 30년 만이니 그야말로 꿈 같은 상봉이었다. 그는 정부기관의 총책임자로 영국에 근무중이었고 그가 베풀어 준 대접은 너무도 융숭했다. 우리는 와인 잔을 가운데 두고 옛날에 젖어들었다. 술기운이었을까 아니면 나이 탓이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추억담 속에서 흘러나온 섭의 짝사랑 고백은 너무 황당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졸업했음).

스승 성선생님을 주축으로 영시, 시사영어, Text Book 교정, 영문출판물 편집 등 우리는 자주 잘 어울렸다. 같은 경상도라는 동질감이 우리를 친하게 묶어주었다. 그리움의 강물이 우리를 스쳐 흘러갔다. 지금에 와서 고백을 하여 어쩌자는 것인지 자연스럽던 기분이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얼핏 어둡고 아쉬운 그늘이 그의 눈빛에 머물렀다 지나는 것을 보았다.

홀가분해지고 싶었던 친구나 나의 가슴은 엉뚱한 무게로 내려 앉고 있었다. 신체적 키는 컸을 망정 마음의 키는 그닥 자라지 않았던 나는, 앞에서 혼자 앓고 있었던 한 남자의 가슴앓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나로선 동창 이상의 감정을 전혀 가져보지 못하였기에 그것은 의외였다. 알고난 지금에사 어쩌자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시작하고 혼자 끝을 낸 사랑앓이의 흔적을 지닌 그 남자가, 숱한 세월의 다리를 건너 스스럼 없이 나를 마주보고 앉아 있다니 도무지 실감이 안 났다. 짝사랑이란 소리없이 불러만 보는 가슴 아픈 외쪽 사랑이다. 농담이겠거니 마음을 고쳐 먹는데, 문득 생각나는 전설이 있었다.

옛날 절 근처 마을에 한 낭자가 살았다. 어느 날 낭자는 시주 온 젊은 스님을 한 번 본 후 첫 눈에 반하여 그를 몹시 사모하게 되었다. 속세와 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한 스님과의 사랑은 불가능했다. 결국 낭자는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죽어갔다. 그런데 낭자의 넋은 죽어서도 사모하던 임을 잊을 수 없어 스님이 기거하는 절 가까이에서 선지같은 붉은 꽃으로 피어났다. 훗날 사람들은 무더기로 피는 이 꽃을 상사화(相思花)라 불렀고 낭자의 슬픈 운명이 전설이 되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 내려왔다.

상사화는 8월 중순 경 대궁이 끝에 꽃봉오리가 먼저 핀다. 붉게 물든 꽃송이는 영원히 잎새를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다. 잎새 또한 영원히 꽃송이를 대면하지 못한 채 서로 그리워할 뿐이다. 서로(相) 그리워만(思) 하는 꽃(花)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짝사랑이다. 생각을 온통 주기만 하는 사랑. 가련한 상사화. 사랑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숙명적인 인연.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넋이 연붉은 꽃으로 승화된 전설치고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 애절하다. 돌아와 섭을 생각하니 안스러웠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내 가슴이 아린 듯 씁쓸한 여러 날이 겹쳐 지나갔다.  

몇주전 섭이 LA를 방문했다. 친구 내외와 우리 부부는 영국에서 받은 후대에 보답하고자 회식할 기회를 만들었다. 분위기가 친숙해지자 섭은 남편에게 짝사랑 애기를 하는게 아닌가.

“김형은 참 운좋은 사람이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눈앞을 스치는 가벼운 현기증에 식욕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태연한 척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 안으로 다져 넣었다. 동시에 삶의 또 다른 성숙을 한 웅큼 다져 넣으며 가슴을 문질러 내렸다.

“아, 그래요.” 내 등을 쓸어 주는 남편의 손길에서 신뢰의 체온이 옮아왔다.

이 세상에서 짝사랑의 대가(大家)는 딱 한사람 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돌아 앉고, 외면하고, 배신하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는 그의 짝사랑은 더할 수 없이 위대하고, 동시에 눈물겨웁도록 고독한 사랑이다. 그의 상사화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붉게 꽃피어 우리 마음 속에 노을처럼 타고 있지 않은가.

짝 사랑이든 온 사랑이든 사랑은 분명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선(善)에의 갈망이다. 사랑은 자기 완성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사랑병을 앓고 난 사람이 보다 인간적임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 인간적인 요소에 창조주의 상사화를 접목하면 바로 그것이 더 아름답고 영원한 그림 한 폭을 완성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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