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2004.10.28 15:38

김영교 조회 수:562 추천:106

부치지 않은 편지 (e)
        
                김영교

     공원 오리군단이 살이 통통 오르고 가을이 문턱을 넘어서는 9월, 경악의 외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튼튼하고 안전하리라는 세계 최강국의 척추가 반으로 토막 처졌습니다. 자존심이 폭삭 내려앉았습니다. 번득이던 도시 심장부가 시커먼 먼지와 화염에 싸여 발버둥 치던 모습, 전 세계가 함께 전율했습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많은 생명들이 겪었을 마지막 불안과 공포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고 치미는 분노는 아픔으로 변해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눈들이 초롱초롱 지켜보는 가운데 화요일 아침 9/11/2002, 이토록 처참한 역사적 사건이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다니 첨단의 방어벽도 자살공격에는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목격한 사건은 놀라운 인간의 비극이었습니다.
     증인이 너무 많습니다. 충격이 너무 큽니다. 치밀한 잔인성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사연들은 가슴을 저미는 검은 눈물로 신문 방송을 뒤덮었습니다.
     세상은 소음으로 흔들리고 있어 구별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가늠할 수없는 때와 계획 가운데 우리는 놓여 저 있습니다. 기다림의 출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구위의 그 많은 양심들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분노와 안타까움을 주체하기 힘들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통곡과 피 맺힌 절규는 어떻게 달래질 수 있으며 무엇으로 보상될 수 있겠습니까?

     넋을 놓고 있을 수만 없는 나의 삶이 눈앞에 있습니다. 오늘 공원에서 손녀 미선이를 그네 태우면서 노래할 때는 정말 무의식적으로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루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구나
농부는 발을 갈고 씨를 뿌린다.'
     인간의 두뇌에 망각기능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손 벽치며 고개 끄덕이며 피우는 손녀의 재롱에 무겁고 어두운 생각은 밀려나고 금새 눈앞은 웃음바다가 됩니다. 손녀의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노는 걸 지켜보는 일을 통하여 이렇게 알토란 기쁨을 누리는 게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심심한 할머니에게 손녀가 재롱을 피워 즐거움을 듬뿍 준다고 생색내는 미국산 아들의 사고방식이 그럴 수도 있다싶어 오늘은 더 당당해 보여서 좋았습니다.
    헤어질 때 내일 또 미선이와 만날 기대가 나를 설렘으로 몰고 갑니다. 바쁜 동작으로 몽땅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 내내 눈앞의 손녀만 돌보았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9/11의 슬픈 기억은 멀리 가 있었습니다. 걱정이나 염려스런 일을 아득한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빗자루 같은 손녀의 존재가 참 신기하네요.
     나를 다 가져가는 작은 몸집, 조그마한 두 눈망울, 또 확대되어 가는 인식의 세계에 달려드는 호기심...사랑의 연결고리가 이렇게 이어져 다음 세대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가 봅니다.
     우리 두 사람의 웃음 두엣이 아직은 짙은 초록색이 더 많은 공원에 초록웃음을 더 보태고 나서 우리는 유유히 걸어 나왔습니다. 하늘을 처다 보았습니다. 주위에 보이고 피부로 만져지는 것에 대한 감사가 살아있어 의식하는 가슴을 적셔주었습니다.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너무 억울하여 희생자 가족들의 핏빛 눈물이 땅에 있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가 분노와 슬픔을 쏟아 붓기라도 하려는 듯 검게 하늘 가운데 떠있습니다. 뉴욕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흑 구름의 행보가 여간 심상치가 않습니다.
    내 코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 미선이에게는 역사 이야기, 부치지 않은 편지에 적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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