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테 1, 2

2005.06.12 17:32

김영교 조회 수:686 추천:176

저는 하나님 창조의 정원에 심겨진 한그루의 나무입니다.
나무가 나이를 먹으면 생기는 것이 나이테입니다.
나무가 상처를 입어서 생기는 것이 상처테입니다.
제 안에는 많은 방들이 있습니다. 상처테의 방들입니다.
BC/AD 를 통과하는 과정에 깊숙이 있는 그 방들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제일 큰 방이 부러움의 상처테라는 방, 그 다음이 두려움의 방, 그 옆으로 즐비한 거절당함의 방, 시셈의 방, 기대미달의 방, 열등감의 방, 인정받지못함의 방 등 각기 다른 크기로 다른 두께와 무게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다정다감하고 감성이 여린 문학소녀여서 삐쩍 마르고 목이 길고 키가 큰 용모를 비관한적이 많았습니다. 얼굴이 빨개지는등 자신감이 전여 없어 사람 앞에 서는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쉽게 기분 나빠하고 쉽게 화를 내며 주빗주빗 살아왔습니다.
속내를 감추고, 척하며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왔고 우쭐댐과 과시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내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꿈에도 생각 못했고 옛날에는 그런 말 조차도 없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고의적으로 준 적이 없는데도 혼자 받고 후유증으로 괴로워 하는 피해자 쪽은 자존감이 낮은 바로 저 자신이였습니다. 상처테 발원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관리를 잘하는 자신감이나 책임감있는 담대한 사람은 상처 따위는 안 받거니와 받아도 적게 받고 또 해결도 쉽게 한다는 점입니다.
알콜중독자의 두 아들의 이야기는 같은 상황이나 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삶을 어떤 quality life와 아닌 방향으로 갈라지게 만드는지 우리로 하여금 눈 뜨게 만듭니다. 한 아들은 술주정뱅이가 되어 감옥에, 다른 아들은 교구목사가 되어있었습니다. 인터뷰에서 평생 보고 배운것이 이것뿐인데 당연하다는 감옥아들과 평생 보고 배운 것이 이것인데 아버지처럼 안살겠다는 목사아들... 어느 쪽에서 보느냐의 마음의 시각이 인생의 목표를 판가름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 기본 욕구중에 여러분은 어느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까? 저의 경우는 의복이었습니다.
옷의 기능은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위하여 추위를 막고 가리고 싶은 곳을 덮어 몸을 보호하는데 있습니다. 옷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갈 곳이 많고 추한 곳이 많아 가리고 덮을 부분이 많다는 얘기도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실족은 의상 과잉 충동구매에 있었습니다.
내적치유는 거울입니다.
거울 안에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핏기 없는 한 여인의 몸부림이 보였습니다.고급 명품 옷 뒤에 숨어 살아온 추한 면이 많은 빈 껍질인 저를 직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열이 대단한 개성어머니와 학자풍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는 막내 딸로 저의 유년은 대물림의 옷으로 환한 꽃밭이었습니다. 새 옷에 대한 눈물겨운 부러움이 커다란 보름달로 떠있습니다. 신발까지 새것으로 얻어 신는 명절에는 참으로 행복했던 종달새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속에 슬픈 낱말하나- 여러분 <우라까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물론 일본말입니다. 지금은 향수마저 자아내는 옷수선입니다. 저는 줄여서, 뒤집어서, 교복까지도 철저한 Recycle 수혜자였습니다.
자라면서 언니들이 새 옷을 당연하게 받아 입는 가족제도가 불공평하다고 느꼈지만 어머니가 언니들을 편애했다는 기억은 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몰래 어머니 젖을 만지며 잠들도록 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왼일입니까? 놀랐습니다. 결핍은 가시가 되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나봅니다. 그것이 상처로 남아 있는 걸 BC/AD에서 발견했습니다. 부러움의 쓴 뿌리, 불공평의 쓴 뿌리였습니다. 그 쓴 뿌리를 인정, 그것이 회복의 길로 들어서는 첫 발걸음이라고 깨닫게 되었고 <불행 끝, 기쁨 시작>의 문이 열렸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상처는 없는 줄 알았지요. 오랜 세월 가두어두었던 눌린 상처가 심층부에 방치되어 있음을 알아내어야 했고 극소화의 훈련이, 나아가 내적치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영적 성숙을 더디게 한 이 방해전파를 제거해야 겠다는 결단이 섰습니다.
그 이유는
제 경우에 있어서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이며 치유자로 주권인정, 구원의 확신, 더 풍성한 영적 삶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내적치유는 영적 훈련소입니다  
지난 세월을 변명과 핑개로, 듣기보다 말하기에 입이 빨랐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숨어있는 복병을 떨쳐 버려야지 다짐하게 되자 내적치유 최 단기 영성 프로그램 문을 활짝 열고 겁 없이 뛰어 들어 한 껍질 두껍질 벗어던지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적 치유는 기회입니다. BC/AD훈련은 생명 달리기가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장입니다.
속도가 빠를수록 좋고 거리가 짧을수록 유익합니다.
기도와 찬양, 사랑과 용서의 땀 겨루기 훈련장에 이렇게 일찍 오시기를 참 잘 하셨습니다.

그렀습니다. 저는 성인이 된 다음에도 세상적 욕심이 많음을 <의복>을 통하여 바벨탑을 쌓고 또 쌓아왔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옷들로 4방의 옷장을 체우고도 모자라 설합장들도 가득합니다. 욕심입니다. 내적치유를 통해 가치관에 변화가 왔습니다.
옷은 필요한 만큼 갖추고 깨끗하면 족 한 것이라는 개념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상처테가 많은 한그루의 사람나무는 늘 무엇을 입을까 궁리가 많았지요. 옷이란 날개를 달고 다른 세계로 날아가려는 찬란한 꿈,
깨고나면 공허했고 새옷을 입을 때 기분좋은 마음의 즐거움은 잠시일 뿐,  그 뒤는 허망했습니다.

BC/AD 그 넓은 옥토를 경작하는 과정에 해답의 깃발 하나 보였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의 보혈의 십자가였습니다.하늘 보좌를 버리고 나의 죄를 탕감해주려고 자리바꿈 까지 감행한 그 사랑이 해답임을 깨달았을 때 모든 컴플랙스의 사슬이 풀리며 자유함에 온 몸이 떨려 왔습니다. 오로지 은혜였습니다.
달려갑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려갑니다. 나 있는 그대로를 내놓고 나의 한계를 토설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는
자신을 과잉방어하며 상대에게 공격(상처)을 가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두 얼굴의 제 모습, 비교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퍽이나 이기적인, 마음이 비좁은 편견덩어리의 제 모습이 비추어 졌습니다.

쓴 뿌리의 가시는 가깝게 있는 사람,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을 찔러댑니다. 제일 많이 할퀴고 찌른 말의 칼을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 자식에게. 부모에게, 친구에게 휘둘렀음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엎드린 무릎사이에 눈물강이 멈춰지지않았습니다. 눈물이 깨끗이 영혼의 아픈 부위를 씼어 소독하고 아물도록 수리해주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성품에 참여하는 '선’에의 갈망입니다.
용서의 기도, 사랑의 간구는 제가 했는데 상처받은 것보다 준 것만 기억나게 하여 회개토록 제 무릅을 꺽고 또 꺽어준 성령님의 개입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평강과 자유함과 감사를 먼저 준비해놓으시고 제 마음속 깊이 물밀듯 밀어넣어 넘치게 해주셨습니다.

내적 치유는 꼭 전문가인 유일한 치유자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의 또 다른 사랑 표시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결핍환자임을 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맡기십시오. 치유는 그 분이 하십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지금도 들리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무엇을, 왜 주저하십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장은
여러분과 저를 위해 주신 말씀으로 가슴 저리도록 절절한 주말 오후입니다.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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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알고 자유함을 얻은 영교 사람 나무는
하나님 정원 안에서 햇빛과 바람과 사랑비를 받으며 자녀의식을 절감하며 잘 크고 있습니다. 상실된 관계회복,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이 관계말입니다. 생명의 관계말입니다.

이 내적 치유 신앙훈련을 통해 옷에 대한 가치관에 변화가 왔습니다.
살이 빠지니 옷이 다 헐렁해졌습니다. 치수가 틀려도 또 입을 것 같고 아까워 고가의 의류들을 집안 가득 보관해왔는데 갑자기 집이 좁아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저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깨달음을 삶에 적용하여 실천훈련에 과감한 정리를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지속적으로 의료 선교를 가는 후배의 남편, 윤장로의 선교 비젼을 듣게 된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옷을 살려던 돈은 후원금으로, 드라이 크리닝 까지 한 깨끗한 옷들은 신발도 함께 겯드려 트렁크에 담아 그 댁 차고에 아무 때고 날라다 놓습니다. 옷장 청소를 시키시는 주님의 섬세한 방법도 다양해졌다고 느껴겼습니다.
그 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제 마음을 비우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탐욕으로 치닫던 쟁취욕이, 소유욕이 minimize되면서 시각에 shift가 오게 되었습니다. 편한 옷을 좋아하도록 편한 사람으로 다듬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후, 제마음에 걷잡을수 없는 나눔의 기쁨이, 베품의 기쁨이 점점 불어나는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의 아픔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가늠하는 이해의 심장을 허락받게 되었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신 예수님 닮기를 열망하는 기도가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게되었습니다.

하나님 정원에 심겨진 대로 순응하는 사람나무 하나
주인의 계획에 따라 사계절 정원을 지킵니다.
꽃이 지듯 나의 숨이 질 때까지
의미있게 나의 몫을 감당하는 자녀 수목이게 하소서.
이웃 풀들과도 살 비비며 어울려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이 옥토 들판 소풍 (Field Trip)을 통해 다져주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나됨이 있는 그대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높이는데
쓰임받기를 원하옵니다.
할렐루야-

                  #2 끝
  
김영교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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