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2005.05.16 15:15

김영교 조회 수:310

윤석산의 '죽음, 그 낮선 시간속으로, 둘'(6/9)[-g-alstjstkfkd-j-]

산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스스로 가슴 깊이
허망의 비수 꽂는 일이다.

슬어가는 녹,
만큼이나,


반짝이며, 날 세우는, 그 칼끝만큼이나……

         윤석산(1946-)'죽음,그 낯선 시간 속으로, 둘' 전문

                    

투병의 긴 세월을 견디온 시인의 눈은 예사롭지가 않다.
지난 역사, 지난 생애의 구현만이 아닌,
오늘의 삶 속에서 오늘을 바라다 보는
날 선 칼끝 자신의 삶을 껴안는 덕도의 경지가
우리를 긴장시킨다. 생각 없이 사는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며 사는 삶으로 옮겨 가게 우리의 속을 짚는다.
우리의 솜털 서정이 파르르 떨며 '그 낯선 시간'을
의미있게 반응하게 한다.
  
                                                 김영교(시인)

커버스토리 / 윤석산







마음에서 마음을 돌아(迂廻)가는 길









백인덕









1.

밤은 깊고 쓰라리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시집과 몇 권의 책들, 지난 한 달 동안 틈틈히 적어두었던 단상 몇 개, 그리고 한 켠에는 안산으로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 끄적였던 수첩 한 개. 그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둠이다. 새로 한 시를 넘기고 두 시가 다 되어가지만 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쉽사리 길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잘 현상된 선생님의 사진 속 희긋대는 흰 머리카락이 멋스럽지만 언제부터 이 흰 머리를 뵈었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다. 초조와 불안감 속에서 이것 저것을 뒤지던 손길로 드디어 나는 한 실마리를 잡았다. 사소한,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어쩌면 아주 위태롭고 좁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는 그런 실마리를 말이다.

선생님의 연보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1967년 한대학술상 1회 수상. 그로부터 정확히 이십년 후 나는 그 상을 받았다. 간절히 시를 쓰고는 싶었지만, 과연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기 확신에 목말라 하던 시절, 오직 술과 치기로 휘청이던 이십대 중반의 일이었다. 이쯤이면 독자들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윤석산 선생님은 내게는 스승이자 선배님이시고, 문단에서는 몇 안되는 동문 시인 선배님이시다. 하지만 이 원만한(?) 관계들이란 지금 이 순간 내게는 가장 아픈 족쇄일 뿐, 이 어눌한 글의 방향타가 되지 못한다.

다만, 이십년이라는 것. 그 어감과 세월의 간극이 주는 느낌, 잘 바랜 벽 앞에서 찬찬히 깨어져 간 금들을 찾는 기쁨. 그런 것들만이 이 순간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은 선생님의 전기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감상도 아니다. 나는 그저 멋지게 자기 그림자를 드리운 한 그루 나무의 줄기 하나, 작은 가지의 잎사귀 몇을 흔들어 보려 할 뿐이다. 온전한 나무는 독자들이 그려내리라 믿는다. 깊이 웅크린 어둠과 쏟아지는 햇빛 그 모두를……



2.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충고를 해 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沈潛)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리를 뻗어 나오고 있는지를 알아 보시고, 만일에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런 의문을 우선 조용한 밤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될까? 그리고는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대답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만일에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명확하고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세우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비록 아무렇게나 다뤄도 좋거나 쓸데없는 순간이라도 그 충동에 대한 증거가 돼야만 합니다”



구차하게 길게 인용한 릴케의 이 근사한 충고는 충동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 아니라면 지나친 확신에 가득차 있던 시절, 내게는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현란했던 문학수업 시절, 나는 당시  얼굴을 알 수 있었던 몇몇 시인들의 속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고시합격 쯤으로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시인이란 멋진 레테르를 가진 인물들의 내 또래의 자화상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학교에 재직중이시던 선생님들이 우선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는 시간이 늘었고, 그때 민족문화사에서 시리즈로 간행된 총서중 《고전적 상상력》(1983)이라는 제하의 선생님의 시론집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철저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자 노력했었다’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그 책을 말이다.



“시인은 곧 자기라는 한 개성의 창구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다 본다. 자기라는 개성의 창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는 시인도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총체적인 삶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이라는 구성원과, 이 구성원의 유기적인 연관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 총체적 삶인 대중에의 인식도 궁극적으로는 시인이라는 한 개인의 삶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중의 아픔이 노래되기 위해서는 가장 절실하게 자신이라는 한 개인의 아픔이 노래되어야 하며, 또한 보다 절실하게 표현되기 위해서는 가장 개인적인 체험이 압축되어 표출되어야 한다”

─ <자성을 위한 몇 단락> 부분



십 오륙 년의 세월을 건너와 다시 읽는 선생님의 시론집에서 이 부분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선생님이 서울 출신이라는 것이었으리라. 그 무렵에 나는 심각한 ‘서울컴플렉스’를 앓고 있었다. 지방출신이 많았던 학교 분위기에도 눌렸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 ‘광주’라는 상징적 공간 외에는 다른 모든 곳이 죄악의 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런 저런 근사한 추억을 늘어놓을 수 있는 ‘고향’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땅, 불모의 공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선생님의 글 앞머리에는 돈화문에서 원남동, 서울대 병원을 거쳐가는 길과 당시의 감성이 쓰여져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느낌이 반가왔다.

또 한 가지 확연한 차이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각 세대마다 그 시대가 주는 뉘앙스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사실 팔십 년대를 통과하는 내 문학수업기는 의미의 중압이 너무 심했다. 근사한 표현은 사치였고, 잘 가꾸어진 이미지나 은유는 그저 장식에 불구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반역이었다. 외톨이 아닌 외톨이었던 내가 죽을 힘을 다해 여러 선생님, 선배들의 글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문학적 욕구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 눈뜸이 표현에의 욕구를 거쳐 처음으로 빛을 본 것이 1967년, 경동고등학교 3학년 재학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편지>라는 동시가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교 재학시 이미 조정권, 홍병철, 신현정과 같은 예비 시인들과 만나게 되었고, 선생님은 한양대 국문과 재학시 김용직, 김대구 등과 ‘해익’이라는 문학동인을 하기도 하셨다. 지금처럼 등단의 기회나 방법이 다양하지 못했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선생님은 이미 한 분의 기성시인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바다 속의 램프>가 당선됨으로써 한 젊은 시인으로서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이런 노력들을 바탕으로 선생님은 1975년 1월 조정권, 김용범 시인과 함께 3인시집 《분리된 의자》를 펴냈고, 한광구, 조정권, 김용범, 김성춘, 권달웅 등과 함께 <新感覺> 동인을 결성,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한다.



이오네스크의 演劇을

보고 돌아왔다.

저녁이 낮게 가로막고 있었다.

해태의 크고 성긴

눈망울이 불타고 있었다

西大門쪽 하늘

아,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을 뽑아

힘껏 던지고 말았다

─ <노을> 전문



여인숙 괘종시계가 몇 번인가 울었다.

화차에 실려서 나의 잠은 오래 전에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산골의 어둠을

빠져나가는 원목더미들.

어둠 속에 발이 빠진 사내들이

막소주를 키며 아직도

목로의 가스등 밑에 뒹굴고 있다.

우람한 어깨를 벌리고 버티어 선 산.

마시고, 부수고, 잠들고, 깨어나고.

흰 팔뚝이 하나,

오래 오래 허공 중에 떠오르고 있다.

─ <龍門에 가서> 전문



선생님의 첫 시집《바다속의 램프》가 고려원에서 발간된 것은 1980년이었다. 이 시집에 해설을 맡은 오세영 시인은 선생님의 시들이 모더니즘 계열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모더니즘 본질 그대로 선생님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문명비판적인 태도 위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시에서 구사하는 감각적인 언어 표현을 들고 있다. 즉, 선생님의 시는 관념적이라기보다는 즉물적이며, 뛰어난 시각적 이미지의 제시, 거의 서경적일 만큼 정확한 언어의 조형, 간결한 언어 표현, 적당히 절제된 주관의 표출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세째로는 선생님의 지적 서정성을 지적하고 있다. 언어표현이 감각적임으로 해서 시인의 정서가 객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와 어울려 선생님의 서정적 관심 역시, 사적, 신변적인 데서 벗어나 공동체적인 데 있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문학이론이나 현대시사에 일천한 나로서는 더 이상 토를 달 능력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언제부턴가 우리 시에서는 소위 ‘젊음의 알 수 없는’ 괴뇌, 슬픔, 절망 같은 말들이 사라져버렸다. 아니다. 너무 현란한 방식으로 분출되고 있다. 그 현란함 속에 겨우 겨우 시대는 읽혀지지만 도무지 인생이 보이지 않는다. 시력 30년을 바라보는 시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기록들, 이제는 낡았다고, 너무 식상하다고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작품들, 그 정직성과 우직함이 빛나는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고, 눈 있는 자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이런 행복감은 그저 시대착오적인 망상, 또는 낭만적 기질에 지나지 않을 뿐일까? 여하튼 선생님의 시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 여물고 터져 나왔으리라.



잘 헷갈리는 내 기억으로는 내가 선생님께 받은 강의는 시론도 아니었고, 문학개론도 아니었다. 그건 한문소설이나 한시와 같은 고전문학이었다. 시와 더불어 감히 선생님의 생의 두 축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전문학을 택하셨고, 수십 편이 넘는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셨고, 결코 멈추지 않을 선생님의 학문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겠되었다는 일반적인 이야기의 배면, 그 배후에도 고전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두번째 시집인 《온달의 꿈》(정음사, 1986)과 시선집 《처용의 노래》(문학아카데미, 1992)를 들 수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책상이 자꾸만 나를 밀어낸다.

밀림에 동의하고자 하는 나와

밀림에 동의할 수 없는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정말로 요즘은 진퇴유곡이다.



책상물림으로 평생을 살아가신 우리들 할아버지 생각을 한다.

한여름에도 풀먹여 빳빳한 옷 입으시고

다리 한번 바꾸지 않던,

그 융통성 없는 앉음새를 생각한다.



琫準이 숨죽여 울음 삼키던 밤에도

나라 빼앗겨 피눈물 쏟던 저녁에도

다시 나라를 되찾은 아침에도

책상머리에 앉아, 默念良久

오랫동안 눈 감으시던 책상물림,

우리들 할아버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 앉음새가 오히려 부러워진다.

할아버지, 융통성 없음이 그리워진다.

빳빳이 풀먹인 옷이라도 한 벌

입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된다.



책상 앞에 앉으면 자꾸만 떨칠 수 없는 생각.

옥양목 희디흰 물살같은

아픔은 밀려와,

우리들 답답한 진실을 흔들곤 한다.

─ <책상물림> 전문



김장독에 담겨진 배추는,

이제는 다시

그 퍼런 잎들을 가질 수가 없다.

소금기와 젓갈과 양념 속에서

더 이상 푸르러 진다는 꿈은,

이제는 버려져야 한다.

겨우내 언 땅 속에 묻혀서, 또는

무거운 김칫돌에 눌려서.



푸릇푸릇 살아나는 객기보다는

오래오래 안으로 배어드는 간기를

그리하여 시큼시큼 곰삭아져야 함을

어쩔 수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장독에 담겨진 배추는,

또는, 우리는.

─ <김장김치> 전문



두번째 시집인 《온달의 꿈》에서 인용한 위 두 편의 시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도 그 어떤 핵심을 향해 힘이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차라리 ‘융통성 없음’에 대한 그리움이고, ‘푸릇푸릇 살아나는 객기보다는/ 오래오래 안으로 배어드는 간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어쩔 수 없는 기쁨’이 선생님께는 고전에의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새로운 시의 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집의 ‘시인의 말’과 윤재근 선생님이 쓴 발문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런 행위이며, 또 가장 필연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필연의 행위가 가장 자연스럽게 오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느냐 하는 기다림의 문제, 기다림의 자세, 기다림의 마음가짐, 이것 또한 시를 쓰는 일만큼이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 《온달의 꿈》 시인의 말 부분



“윤석산의 시는 말을 다듬어 비단결처럼 꾸며 첫 눈에 산뜻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수수한 말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우러나게 하여 삶을 곰곰히 짚어 보게 한다. 윤석산의 시는 巧言令色을 싫어 한다. 그는 멋진 말보다 바른 말을 시의 표현질료로 생각한다. 이러한 다짐은 시대를 마주쳐 시로써 삶을 짚어 볼 때 오히려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윤석산은 시로써 생각 없이 사는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며 사는 삶으로 옮겨 가게 사람의 속을 짚는다.”

─ 《온달의 꿈》 <言語의 仁術> 부분



시선집 《處容의 노래》는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 그대로 우리 고전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들을 오늘에 되살려 소재화하는 이른바 소재전승(素材傳承)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님이 고전에서 소재전승한 경우는 백제 무왕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서동요>를 전승한 <맛둥의 노래>와 온달과 평강공주이야기를 빌은 <온달의 꿈>, 그리고 신라의 향가와 설화인 <처용가>를 전승한 <처용의 노래> 등의 연작시편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소재전승이 단발적인 시도로 그치지 않고, 선생님의 시쓰기에서 계속적인 작업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단순하게 소재를 빌어온다는 것은 죽은 이를 무덤에서 꺼내 식탁에 앉히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변용에 있어서 항상 창조적이라는 말이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창조성이 지향하는 바가 어디냐 하는 것은 시인 각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서정주의 ‘춘향’이 불교적 사상의 매개고, 박재삼의 ‘춘향’이 설움과 한의 총화인 것처럼 말이다. 선생님이 지향하는 바 소재전승의 목표는 우리의 정서, 우리의 서정을 통한 우리시의 해석틀의 건설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을의 나는

당신의 뜨락이나 넘보곤 하지만

가끔 발돋움하여 한 치 높은

세상의 하늘

올려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어슬렁거림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쌈판이나 굿판, 술판이나 노름판

으레 판치는 사내가 있듯이

이 세상 외곽이나 어슬렁거리는

사내가 있나니,



이 가을 나는

다 자란 억새풀이나

갈숲보다 더 스잔한 머리를 하고,

새떼보다 더 많은 생각을

날려보내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어슬렁거림일 뿐

이 세상,

아무것도 되질 못함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안다.



이 시에서 처용의 음성은 역신에게 아내를 주어버리고 저자거리에 나와 춤을 추는 의연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는 현대인, 그것도 어떤 사내의 음성으로 들린다. 이 시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는 바 선생님의 소재 전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3.

전기를 쓰지 않겠다는 장담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시력(詩歷)을 좇아가다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전기를 쓴 셈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 선생님을 자주 뵈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선생님이 96-97년 한국시인협회의 사무국장을 맡으시면서부터였다. 오래 겉돌다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 있었던 내게는 더할나위 없이 무서운 국장님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의 기질대로 은근히 선생님의 속을 썩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녀석’하는 한 마디로 그 많은 죄(?)는 사면되기가 십상이었다.

선생님은 1998년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에 학술정보관장으로 재직하시면서 뜻깊은 일 하나를 해 내시고 말았다. 다름아닌 ‘시자료실’을 개관하신 것이다. 작고 아담한 규모지만 그 의의만큼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들리고, 대학 도서관의 대부분이 제2의 고시원이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과제가 아니라면 대학생 그 누구도 시집 코너를 찾지 않는 요즘, 어찌되었던 오직 시만을 위한 공간을 개관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각종 시 관련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중이라고 한다. 개관 당시 비록 7천 여종 2만 여권의 규모였지만 나는 참으로 오랫 만에 대학 도서관에서 시를 위한, 시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에 동참할 수 있었음을 한동안 벅찬 기쁨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97년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시인협회에서 사무국장님과 간사로 만나던 인연도 다 되어갈 쯤이었다. 충무로에서 회의가 있어 뵙게 되었는 데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시집 한 권을 주셨다. 그것도 ‘백인덕 시인’이라고 쓰셔서 말이다. 사실 그때(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선생님들께서 책을 하사하실 때는 거의 다 ‘에게’, 아니면 ‘군’ 일색이었다. 그러니 내 기분이 얼마나 좋았을지는 당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시집은 다름 아닌 《용담(龍潭)가는 길》(동학사, 1997)이었다. 동학과 선생님의 인연은 그저 3대째 동학의 도를 따르고 있다는 것 정도로 숨겨두기로 한다. 하지만 동학연구에서 선생님의 발자취는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에 관련된 책들로는 《龍潭遺詞硏究》, 번역서 《道源記書》, 주해서 《東經大全》과 수운 최제우 선생의 평전인 《후천을 열며》등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동학 연구를 통해 선생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두 개의 대답을 들려주신다. 그 첫째는 학자로서 한문인 동학서들을 주해함으로써 동학연구의 텍스트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인으로서 동학이 갖고 있는 ‘한국적 원형’ 속에서 문학의 이론 내지는 틀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집 《용담가는 길》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시집의 특색은 수운선생의 생애를 시로 노래했다는 것이다. <후천을 열며>, <어둘 녘 세상 길에 갇히어>, <봄꿈 같은, 혹응 아지랑이 같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 <마음 한 자락 세상에 드리우고>, <마음, 또 하나의 감옥>, <죽음, 그 낯선 시간 속으로> 등 7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서사적 기법으로 연대기적인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60 여편의 시가 수운 선생의 생애를 감싸안으면서 독립된 작품으로 완성되고 있다. 수운 선생의 생과 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해 자칫 교설로 빠질 위험을 넘어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다만 지난 역사, 지난 생애의 구현만이 아닌, 오늘의 삶 속에서 오늘을 바라다 본 모습들의 구현이 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이 안산으로 이주하신 것도 3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학기부터는 작은 보따리 하나 둘러 메고 안산으로 편안하게 자주 선생님을 찾아 뵐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쉽게도 선생님께서는 연구차 하와이 대학에 반 년간 머무르실 계획이라고 하신다.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런 중에도 틈틈히 선생님의 작품을 뵈올 수 있길 바라며, 《용담 가는 길》에서 선생님의 시 두편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대신한다.



시간은 늘 막막한 만남.



흐트러진 하늘의 별들을 주워

잠드는 이들의

가슴 위로 뿌린다



아, 아 다시 살아나

어둠 속 돋아나는 의문이 된다.



─ 우주는 나에게 늘 미지(未知)의 커다란 웅덩이

─ <후천을 열며, 여덟> 전문



산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스스로 가슴 깊이

허망의 비수 꽂는 일이다.





슬어가는 녹,

만큼이나,



반짝이며, 날 세우는, 그 칼끝만큼이나……

─ <죽음, 그 낯선 시간 속으로, 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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