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2005.03.10 14:55

김영교 조회 수:226

이육사[-g-alstjstkfkd-j-]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시대에, 편안한 여유를 제공하고, 폭력과 선정적인 프로그램속에서, 인간미 넘치는 시를 제공함으로써 사랑과 인간 본성에 있는 감성을 나누고 회복하기 위해서 시 읽기 계획: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시인에 대해)
이육사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입니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육사는 스무 살까지 조부 슬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그 후 북경대학에서 근대적 학문을 수학한 지식인입니다. 본명은 활(活)이고, 육사는 호(號)입니다. 잡지사, 신문사 등에서 일하면서 사회 운동에도 관계했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30세가 넘어서였습니다. 신석초, 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했으며 '광야' 이외에 '청포도', '교목', '절정', '강 건너 간 노래' 등의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1944년에 독립 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육사'라는 호는 형무소 죄수 번호 64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일제 시대 '윤동주'와 더불어 대표적인 민족 저항 시인입니다. 남성적 어조와 지사적 기개, 대륙적 풍모가 담긴 시를 썼습니다.


Q. 이육사 시인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개인의 안일을 생각지 않고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조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권력의 탄압과 회유 앞에서 굴복한 많은 나약한 지식인들을 보면서 10여 회의 투옥과 북경 감옥에서 생애를 마쳤던 이육사는 우리가 이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30세가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그 때 이미 옥고를 치른 독립 투사요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인 이전에 지사요 투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시에는 실천하는 삶을 산 그의 투철한 역사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남성적인 그의 시에 있습니다. 여성적인 정서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지만 험난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호쾌한 목소리로 역사를 노래한, 의지와 기개가 넘치는 대륙풍의 시에 저는 매료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
어제:
35
전체:
648,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