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일 / 정임옥 시인

2006.02.16 05:07

박경숙 조회 수:514 추천:38

시를 쓰는 일                 정 임 옥 어려서부터 나는 잘 체했는데 그때마다 등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따고 가스명수를 먹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는 선산 할아버지 묘에 엎드려 평생 고생만 하다 가는 게 억울하다시던 끝에 막내딸이 팔이 아파 시를 못 쓰니 아버지, 그 애 팔 아픈 것 좀 낫게 해달라시더란 말을 전해들은 날부터 내 명치끝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랑채에서 들려오던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장단을 맞춰가며 읽으시던 모습이 내겐 참 좋아보였는데 아버지에겐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까 당 하루도 가족에게서 벗어나 보지 못한 당신께 단 한 번도 나긋나긋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에 아무리 등을 문지르고 열 손가락을 따고 가스명수를 먹어도 삶의 체증은 쉬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꺼져가던 시심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 그러면서 한편으론 두려웠다 쓰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했지 정작 쓸 능력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시를 쓰는 일이 선비로 살다 가신 할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길 머슴처럼 살다 가신 아버지께 사치스런 일이 아니길 *꽃에 덴 자국』(2005.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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