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일 / 정임옥 시인
2006.02.16 05:07
시를 쓰는 일
정 임 옥
어려서부터 나는 잘 체했는데
그때마다 등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따고 가스명수를 먹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는
선산 할아버지 묘에 엎드려
평생 고생만 하다 가는 게 억울하다시던 끝에
막내딸이 팔이 아파 시를 못 쓰니
아버지, 그 애 팔 아픈 것 좀 낫게 해달라시더란 말을
전해들은 날부터 내 명치끝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랑채에서 들려오던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장단을 맞춰가며 읽으시던 모습이
내겐 참 좋아보였는데
아버지에겐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까
당 하루도 가족에게서 벗어나 보지 못한 당신께
단 한 번도 나긋나긋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에
아무리 등을 문지르고
열 손가락을 따고 가스명수를 먹어도
삶의 체증은 쉬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꺼져가던 시심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
그러면서 한편으론 두려웠다
쓰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했지 정작
쓸 능력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시를 쓰는 일이
선비로 살다 가신 할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길
머슴처럼 살다 가신 아버지께
사치스런 일이 아니길
*꽃에 덴 자국』(2005.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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