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아이의 마음은 강물이 아니다

성민희 / 수필가

내 어릴 적 애칭은 모개였다. 모과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 과일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의 장난기 가득한 눈을 통하여 별로 예쁜 과일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 챘다.

별명은 언니 때부터 시작 되었다. 언니는 올록볼록 살이 찐 얼굴 때문에 이웃에 사는 외할머니와 이모들로부터 “모개야”로 불리어졌다. 나는 태어나자 말자 ‘작은 모개’가 되었다. 큰 모개, 작은 모개. 우리는 그랬는데 세 번째로 태어난 막내 여동생은 달랐다. 그 애는 예뻤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딸이 셋, 아들이 셋이었다. 딸과 달리 아들은 인물이 좋았다. 허옇고 두리뭉실한 언니랑 나와는 달리 오빠와 남동생 둘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굵직한 눈망울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고향 친구가 오셨다. 오랜만의 만남인 듯 아버지는 몹시 흥분하셨다. 그를 구들목에 앉혀 놓고 아이들을 불러 내렸다. 저 놈이 맏이고 저 놈이 막내. 우리는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모두 받고는 아버지의 어깨를 탁 쳤다. “자네는 심보가 왜 그런가. 남의 집 농사는 다 망쳐놓고 자네 농사만 멋지게 지어놨네. 그려.” 어른들은 마구 웃어대었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아들은 잘 생겼고 딸은 못났다는 말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그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계시다면 내 아이들을 데려다가 보여드리고 싶다. 내가 남의 집 농사도 얼마나 잘 지어놨는지.

여고시절이었다. 내 학교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부산진역에서 올려다보면 정문이 바로 보였다. 그런데 빤히 보이는 그 길은 오르막길인데다 20분은 족히 걸어가야 했다. 무거운 책가방에 도시락통, 체육복 가방까지 들고 올라가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 길을 여중, 여고 6년을 다니다보면 다리에 근육이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친구랑 둘이서 걸어가는데, 구멍가게 앞의 평상에서 장기를 두던 할아버지의 수군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아이구, 저 처자들 다리 좀 보소. 축구 선구들인갑다.” 우리는 슬며시 책가방으로 다리를 가리고는 마주보고 킥킥 웃었다. 2년 뒤 대학생이 된 친구와 나는 뾰죽 구두 위에 얹힌 날씬한 두 다리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 장기 두던 그 할아버지들 앞을 다시 지나가볼까? 왕년의 그 축구 선수들이 돌아 왔다고 하면서. 흐흐흐”

어떤 사람은 어릴 적 엄마 친구로부터 “저 아이는 부엌일 많이 하는 사람처럼 손이 왜 저리 못났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로 손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이의 마음을 어른의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흔적 없이 흘러가버리는 맑은 강물인 줄 알고 있었을까. 불쑥 내뱉은 부정적인 한마디가 평생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내가 이렇게 씩씩하게 잘 자랐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자존감이 없는 아이였더라면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어있을까 싶다. 끊임없던 엄마의 칭찬과 격려는 지금도 내 마음에 살아서 나를 당당하게 세워준다.

[LA중앙일보] 발행 2019/07/08 미주판 18면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497,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