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2024.08.13 14:10

성민희 조회 수:31

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 성민희 

 

그러니까 벌써 10여 년 전검정깨를 한 봉지 사 온 날이었다찬물에 훌훌 씻으니 물이 새까맣게 변했다몇 번만 헹구면 되겠지 했는데 물을 갈아줄 때마다 똑 같은 농도의 검은 물이 나왔다염색한 중국 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설마 ‘00장터라는 한국산인데 싶기도 하고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검은깨를 씻으니까 자꾸만 검은 물이 나오네요.” “그래안 그런데몇 번 씻으면 물이 깨끗해지는데...” "엄마검은깨니까 검은 물이 나오는 거 아니예요?" "~뭐라카노그라몬 흰둥이가 목욕하몬 허어연 물 나오고노란둥이 목욕하몬 노오란 물 나오고껌둥이가 목욕하몬 시커먼 물이 나오더나?" 엄마의 순발력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어머니는 일제시대에 경상도 함안에서 태어나셨다네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해방이 되자 한국에 나오셨다그때는 열여덟 살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상황이었다귀국을 하여서는 시댁에 들어갔는데 한국말을 몰라 바보 취급을 당하셨다고 했다그때 일어난 시댁 식구들과의 에피소드를 들을 때면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한국에서 32년을 살고 나이 쉰 한 살이 되던 해에 이번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세 나라에 걸친 인생길을 걸어오신 셈이다유년에서 청년까지청년에서 장년까지장년에서 노년까지 살아온 세 나라 중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나고야를 가장 그리워하신다.

 

나는 몇 년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고야 옛 동네를 찾아 갔다노구를 이끌고 70 여 년 만에 돌아온 그곳은 기억 속의 장소가 아니었다어머니가 자전거를 몰고 다니던 개천가 흙길만 그대로 있을 뿐 식구들이 두레상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던 그 집은 날씬한 양옥으로 변해 있었다장삿군의 외침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개천가에 앉아 어머니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신 듯 했다막내 동생을 자전거 앞자리에 앉히고 골목길을 달리던 씩씩한 시절도 있었노라 회상하는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까지 번졌다누나를 따라다니던 동생도자전거를 날렵하게 몰던 자신의 모습도참 예쁘다는 칭찬을 해 주던 동네 어른도 선명하게 보이는지 어머니는 허공으로 이리저리 먼 눈길을 보내셨다가슴 속에 살아 있는 앳된 소녀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차가운 땅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안 하셨을까우리는 그 동네를 몇 시간이나 빙빙 돌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에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이제 아흔 여섯 살이 되셨다거동이 불편하여 보행기를 밀고 다니신다우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를 안 불러주실까 한숨을 쉬기도 한다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를 못 보실 텐데 그래도 가고 싶으냐고 여쭈면 항상 대답은 똑 같다. “너희들 보는 건 좋은데너무 고생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서......” 이 연세에도 맑은 정신과 깨끗한 모습으로 계신 어머니를 뵙는 건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이다나는 기도한다하나님우리 어머니아버지 곁에 가실 때까지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2022.5.8] 중앙일보 게재. / 어머니는 5월 6일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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