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앗
2024.08.13 14:33
띠앗
성민희
새벽 공기가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5년만인데도 아주 긴 세월을 보내고 돌아온 기분이다. 새벽 네 시이니 아직 세상은 잠을 깨지 않았을 터. 공항 넓은 홀은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하여, 밤새 드리웠던 적막이 등을 보이며 구석으로 자리를 비껴준다. 시간은 아무런 칸막이도 벽도 없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이 널널한 시간의 바다 위를 흐느적거리며 마음대로 유영해도 될 것 같다. 천천히 짐을 찾아들고 공항 터미널로 나왔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일본식 라면 돈가스집'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뜨끈한 어묵우동 이나 한 그릇 먹고 가자며 남편이 앞서 들어간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앉히려니 탁자가 다닥다닥 붙었다. 의자는 네 개 인데 두 사람이 앉으면 딱 적당한 사이즈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어묵우동을 앞에 두고 막 젓가락을 드는 찰나에 우리 테이블 쪽으로 한 여자가 굳이 비집고 들어온다. 자리가 없어 두리번거리고 서 있기에 손짓으로 남편 옆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남편이 먹던 우동 그릇을 옮기며 자리를 내어준다. 가까이서 보니 엘에이 공항에서 본 그 여자다.
가방을 잔뜩 실은 카트를 힘겹게 밀며 터미널 직원에게 “Where is Asiana?”하던 여자. 발음이 중국사람 같았는데 지금 보니 한국 사람이다. 좁은 테이블에 함께 앉은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말을 걸었다.
“엘에이에서 오셨죠? 엘에이 공항에서 봤어요.”
우리랑 똑 같은 어묵우동을 앞에 둔 여자가 반갑게 내 말을 받는다.
“네. 엘에이에서 왔어요.”
옛날 80년대에나 들고 다니던 천으로 된 이민 가방에, 물이 바랜 회색 티셔츠, 푸석한 머리카락이 힘들게 살아왔음을 말해준다.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왔단다. 말씨가 경상도라 고향을 물었다.
“부산이라예.”
지금 부산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의정부 동생네로 간단다. 형제들이 모두 서울에서 산다고 한다.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여자가 말한다. "사모님은 얼굴에 손을 안 대었군요. 눈썹 문신도 안 했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고 쳐다보니 미용실 안에서 마사지 샵을 하고 있단다. 말투도 눈썰미도 그 직업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티가 난다.
우동을 맛있게 먹던 여자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전화기를 꺼낸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띠리릭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피커폰으로 해 두었는지 잘 들린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덜컥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목소리에 찐득한 공기가 잔뜩 묻어있다.
“자나?” “응, 잤다.” “내가 왔다” “응. 왔나?” “지금 공항이다.” “응. 공항이가?" "내가 잠을 깨웠제? 인자 또 자라.” “그래. 잘께.”
뚝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황당하여 입에 넣으려던 우동가락을 허공에 멈춘 채 여자를 쳐다보는데 남편은 하하하 웃는다. “자는 사람 깨워놓고 또 자라고 하면 우째요?”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누군지도 모르는 전화기 속의 그 여자에게 분노마저 생긴다. “누구예요?” “동생이에요.” “아니, 언니가 오는 줄 알면서도 마중 안 나왔어요? 저 짐을 가지고 어떻게 의정부까지 갈려구요?” “괜찮아요. 나는 항상 혼자 가요.” “조카 결혼식에 왔다면서요? 혼주 집에서 식구들이 나와야지요!” “괜찮아요. 한국에 올 때마다 나는 혼자 잘 찾아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니가 오는데도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동생에게 여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싶다. 그녀는 한국에 나올 때마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지만 형제들은 마중도 나오지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받는 걸로 생각하는 듯.
여자는 미국 이민 25년 동안 자식도 없이 부부 둘이서만 살다가 몇 년 전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혼자가 된 이제 한국으로 역이민을 올까 생각 중이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려니 너무 외롭다며 억지 헛웃음을 웃는다.
다른 일도 아니고 결혼식 참석차 열 세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마중 나와 주는 형제가 한 명도 없다니……. 너무 심하다는 내 말에 점등된 것처럼 여자는 마음속의 불꽃을 살짝 보여준다. “나는 돈이 없는 척 해요. 사방에 뜯어먹으려는 사람들뿐이라서.”
그래서 그렇구나. 돈. 돈. 돈. 그것이었구나. 여자는 낯 선 사람들에게 사모님, 사모님 해 가며 모은 돈으로 귀국 준비를 했을 거다. 저 커다란 이민 가방 속에는 자기 모습을 닮은 선물이 들어있겠지. 모두가 시큰둥할 그 선물을 사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여자는 또 살아가면서, 등만 보여주는 사람과 마주보려고 얼마나 더 애를 써야할까. 그런 정(情)도 정이라고 목이 말라서 찾아온단다.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이 헤어졌을 경우 다시 새 것을 얻을 수 있으나, 수족이 끊어지면 잇기 어렵다’고 일찍이 장자는 말했는데. ‘우애’란 단어도 ‘띠앗’이라는 단어도 이제 돈 앞에서 사어(死語)가 되었는가.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무겁게 카트를 밀고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의정부까지 잘 가야할텐데......
걱정도 잠시. 나는 다시 널널한 시간 위를 철벅거리며 앞서 걷는 남편의 등을 따라 거리로 나간다. <재미수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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