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다니는 여행
                                          조옥동/趙玉東
                                             oakdjo@gmail.com
콜로라도 주 덴버 국제공항을 이륙한 것은 오월 하순의 하루해가 서너 뼘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철새가 긴 여행의 피곤한 날개를 접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선명한 풍경이 시야에 들었다. 덴버와 LA는 시차가 있어 서쪽으로 갈 때는 여름날의 해가 지기까지 1시간 반을 덤으로 받은 생각에 밖을 내려다보며 등을 느긋이 뒤로 밀었다. 여행은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바퀴였다.

저녁놀 아래 펼쳐질 실루엣을 연상하며 멀리 또는 낮게 두 눈의 초점을 맞추는데
끝없는 장관이 시야를 채웠다. LA하늘이 가까워질수록 형형색색의 저녁노을은 스러지고 어둠이 세상을 덮을 때까지 나는 만년설을 높이 펼쳐 쓴 록키 산맥의 장엄한 행진을 오랜 시간 뇌리 속에 사진 찍고 있었다.
록키 산맥은 북미대륙의 등뼈라 할 수 있고 서부와 동부로 가르는 분수령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미국 뉴멕시코 주까지 남북으로 4,800km에 걸쳐 뻗어있는 록키 산맥의 장대하고 웅자 함을 하늘 위에서 편히 구경한 일은 여행의 끝에서 받은 선물이었다.

집을 떠나 여행길이 길어지고 멀어질수록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게 된다. 젊어서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일들을 연륜이 쌓여 늙어가며 깨우치고 볼 수 있게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산을 높이 오르고 고공을 비행할 때는 지상에서보다  미미한 자신의 존재가 더 잘 보인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대한 우주공간의 질서 속에 자리한 미소한 생명체라는 생각이 창조주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게 만든다.  

바람이 불었다. "형님, 메모리얼데이 연휴에 여행이나 갑시다."하고 남편의 대학 후배내외가 바람을 넣었다. 한 술 더 떠 경노관광으로 모시겠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며칠 간 바람을 따라 나섰다. 소소한 일상을 비우고 바람 따라 가는 동안 만남과 배움과 즐거움으로 채우리라는 바람도 배낭에 넣고. 여행은 비움이고 힐링이라 했다. 힐링이란 말이 그럴 듯한 유행어가 되어 회자되는 시대가 아닌가.

새벽에 LA공항을 떠나 덴버공항에 내린 여행 첫날은 이른 점심을 먹은 후 백설이 살아 숨 쉬는 콜로라도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으로 출발했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거대한 자연 속을 동서로 횡단하는 도로는 10월에서 이듬해 5월 하순까지 폐쇄되고 한여름에도 수시로 통행을 막는단다. 그날은 운 좋게 한 시간 전에 길이 열려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4시간이나 돌면서 산꼭대기까지 올랐다.

3000m이 넘는 수많은 봉우리, 험준한 협곡, 맑은 호수가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물론 설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을 따라 해발 3500m 높은 지역엔 툰드라와 초원을 이뤄 흔히 볼 수없는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콜로라도 주의 앨버트 산으로, 해발 4,401m이다. 길고 긴 관광 도로는 포장이 잘 되고  안전해 보였다. 높이 오를수록 길 양 옆의 4-5미터나 층층이 쌓인 백설의 빙벽이 햇볕과 바람에 녹아내리는 물로 도로는 젖어 번들거렸다.  
  깊은 골짜기를 따라 흐른 물은 시냇물이 되어 콜로라도 강물을 이루고 유타 주의 그랜드 캐년을 휘돌아 네바다 주를 거쳐 캘리포니아 주에 이른다. 북가주의 사막 땅을 적셔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평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식수를 공급한다. 록키 마운틴의 눈이 녹아 LA의 내 집까지 멀고 먼 여행을 한다 생각하니 그 백설이 새롭게 보였다.

정상에 오르니 세상이 하얗다. 설경은 깨끗하고 바람은 뼈 속까지 상쾌했다. 해마다 쌓여 만든 만년설은 이 땅의 알피니스트에게 알피니즘을 자극할만하겠다.  

눈은 녹아야 하는가 아니면 녹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가? 눈의 운명도 알쏭달쏭하다는 상념이 오락가락 하는데 눈밭에는 눈(雪)의 눈(眼)들이 반짝거렸다. 꼭대기에는 관광객들과 지나는 바람 뿐, 바람이 투명한 햇살을 삼키며 눈밭을 헤맨다. 흰 눈은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의 손끝에 날리거나 아니면 바람을 품어 안는다. 아마도 록키 산맥을 지배하는 것은 바람이렷다. 그 맑고 좋은 날, 가파른 언덕의 늙은 소나무 숲이 울고 있다.

정상의 휴게소는 문을 열지 않았고 주차도 할 수 없어 만년설을 밟아보는 기회를  잃고 겨우 차를 돌려 서둘러 산을 내려 왔다.
설원에 올라 기껏 무명의 바람을 만나고 내려오면서 무소 부재한 신의 속성에 비유할 바는 못 되나 자유로 왕래하는 바람의 속성을 생각해 보았다. 높은 산을 넘고, 깊은 바다를 흔들고, 바람은 때로 길을 지우고 지도를 바꾼다. 오롯이 한길을 가는 수행자의 눈앞을 흐리거나 세상의 유혹을 불러들인다. 매서운 바람이 빙산을 쌓고 따뜻한 바람은 눈을 녹여 콜로라도 강을 만든다. 대자연이 찬바람도 따뜻한 바람도 품어야만 하듯 우리는 수시로 크고 작은 바람이 교차하는 긴 여행길, 오르면 내리막이 있는 인생행로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콜로라도 록키 산맥의 웅대한 경관을 뒤로하고 바람과 함께 다음 목적지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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