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夫婦

2008.10.04 17:10

유혜자 조회 수:464



조만연.조옥동[-g-alstjstkfkd-j-]이글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인 유혜자 수필가께서 <부부夫婦>에세이집 출간을 축하하는 "축하의 글"로 책머리에 실린 글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울리기 위하여
                                              
                                        유 혜 자(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재미동포 문인들이 여고동창생 조옥동의 소식을 전할 때, 그 내용이 자랑스러워도 마음 한구석엔 친구 김 옥동을 미국에 뺏긴 것 같아 허전했었다. 그런데 2년 전, 친구 내외와 미국 서부여행을 하며 섭섭함을 풀 수 있었다. 옥동의 남편 조 선생은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으로서 우리를 인솔했고 친구는 여러 번 간 곳이었음에도 나를 배려해서 동행했었다. 친구와 나는 여고시절 경주 여행 이후 50년만의 동행이었다.
친구 옥동과는 이민가기 전에도 서로 직장에 매어 있어 동창모임에도 못 나가서 단편적인 소식만 들었을 뿐 잘 만나지지가 않았었다. 결혼식에도 못 가 봤는데 조 선생을 잘 아는 나의 직장선배가 신랑이 멋있는 친구라 했을 때, 나는 재색이 겸비한 신부가 밑지는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뽐낸 기억이 있다.
서해안의 서천(舒川) 태생으로 일찍이 상경한 조 선생과, 부여(扶餘)태생으로 강을 건너 대전에서 중 고교를 마친 친구는 각각 서울대학 상대 경제과, 사대 화학과에서 수학하며 청운의 꿈을 키워 부부의 연을 맺었다. 조 선생이 금강(錦江), 친구가 백마강(白馬江, 사실은 錦江의 본류, 충남 부여군 북부를 흐르는 강)을 건널 때 이들은 아스라한 수평선 너머를 동경했던지, 태평양 큰 물결을 건너 미국에서 꿈을 이루었다. 아내는 UCLA 의과대학 생리학 연구실의 연구원으로, 남편은 회계사로 이민사회에서 드문 성공케이스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옥동은 몇 년 전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詩)에 입상하고, 계속 <순수문학>과 <현대시조>에 시와 시조로 재차 검증을 받더니 <한국수필>에서 수필신인상으로 등단했다. 3년 전엔 현대시조 2005년 ‘좋은 작품상’을 받고, 2년 전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다시 신인상을 받는 것을 보고 역시 전교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의 버릇이 아직 남았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여고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 대학 때 화학 전공이면서 국내 유수 신문 대학생 란에 시를 발표하던 문학에의 열정을 누르고 있다가 뒤늦게 도전하는 창작정신에 감동을 했다. 그리고 분망했던 이민생활의 고독이 다소 짐작되기도 했다.
제1회 재외동포문학상에선 조선생이 수필부문, 옥동이 시 부문으로 부부가 나란히 수상을 했다. 2006년부터 재미수필문학가 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 선생은 수필집『새똥』으로 제11회 순수문학상 수필본상을 수상한 부부문인이어서 자랑스럽다.  
내가 재능 있는 친구라고 뽐낸 것처럼 옥동은 일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안 들리는 존재를 감지하는 시인의 눈과 가슴으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도전하여 빛나는 작품들을 엮어내고 있었다.    
  
  풀꽃은 순간으로 피어 영원을 버리고
  빛은 영원을 달려온 순간이다.
.
  망각의 수 억 년 세월이 토해낸 각혈
  멀리서 보면 황혼의 바다
  땅과 시간을 뭉크려 빚어낸 조각들
  부드러운 살빛 발갛게 살아나는
      .  . . 중략. . .
  삶이란 또한 흘러가는 뜬구름 한 조각
  벼랑위에 선 순례자
  무심한 구름이 되어
  말없이
  출렁이던 핏빛 바다를 건넌다.

옥동의 첫 시집『여름에 온 가을엽서』에 실린 「브라이스 캐년」의 시 구절을 기억해내며, 다양한 붉은 색 계통의 첨탑 같은 봉우리가 수백만 개나 들어찬 브라이스 캐년을 함께 바라보는 감개가 무량했다. 하수직으로 침하한 뾰죽한 봉우리들을 경이롭게 보며 “시간적으로는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문학을 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친밀감이 깊다”고 친구는 말을 꺼냈다. 브라이스 캐년이 동화의 나라 같다는 내게, 친구는 한편에 있는 조선조 궁궐모양과 상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 형상의 봉우리들을 설명해주며 수 억 년 시간의 위대한 진실과 50년 동안의 알차고 허술했던 우리끼리의 작은 역사를 주고받았다.
몇 년 전부터 ‘LA해변문학제’에 수필부문 연사로 내 이름이 거론되어 기뻤다는 친구는 남편이 협회장을 맡았을 때 오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우등생, 모범생 기질 때문에 친구의 생활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한 치의 오차나 실수가 없어야 하는 낮 동안의 연구원 일과 집안일, 새벽에 쓰는 친구의 시는 깊은 탐구 끝에 빚어내는 조각품 같다. 어쩌면 브라이스 캐년의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진 조각처럼 아픔과 고뇌로 깎여진 것이다. 사려 깊은 정한과 예리한 감성, 그리고 깊은 신앙으로 승화된 인생관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에겐 관대하지만 자신의 일엔 냉정하고 엄격함이 일과 작품에 들어 있다.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글에서도 나타나는 조 선생님은 한국어 진흥재단일로 새로운 일을 기획 추진 중으로, 이들은 은퇴연령이 지나고도 바쁘게 일하는 부부로도 알려져 있다.
  절대자께서는 누구보다도 이들에게 많은 분량의 일을 하도록 사명을 주신 것 같고, 두 개의 저울로 형평을 유지시키려는 것처럼 남편이 많은 일을 하는가 하면 부인 또한 혹사에 가까운 작업으로 저울이 한쪽으로 쏠리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 같다. 서로 존중하며 협력하고 도우며 단란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신다.
작년연말, 조 선생께서 한국어진흥재단 일로 한국에 오셨을 때, 짬을 내어 부인이 다니던 S대를 찾아가 거의 50년 전 부인의 작품이 실린 신문을 구하려고 했다고 했다. 귀한 선물이 될 것 같아서 찾아보았다는 말에 머리가 숙여졌다. 가정과 직업을 양립시키는 일에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고 가까이 조 선생의 역할 분담과 이해, 협조가 가장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70을 맞고 또 앞둔 이들 부부는, 깊은 강처럼 출렁거릴 뿐 소리 내어 흐르지 않는다. 친구의 끊임없는 탐구심과 끈기는 평생 연구직의 진지한 자세를 유지하게 했고, 시, 시조, 수필 등 전천후 문학인으로 성공하여 제2시집 제목『내 삶의 절정을 만지고 싶다』처럼 잘 익은 저녁놀같이 인생의 후반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지적이며 진실을 향한 섬세한 성찰’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 ‘모국어의 아름다움으로 건강하게 고향을 조명’ 등 국내 평론가 중진문인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조 선생도 젊은 시절의 열기를 봉사로 할애하고 모국어의 올바른 보급과 발전을 위해 사명처럼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며 세월의 흐름 따라 묵묵히 흘러가고 있다.
1941년부터 정식으로 시작된 빈 신년음악회는 이들 부부보다 한두 살 젊은데, 70년이 가까워 오도록 전 세계국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으레 끝 곡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작곡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의 박수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빈 신년음악회가 한 해를 밝게 열고 축복하고 마지막에 다함께 신년축하와 한 해의 행복을 축원하듯 기나긴 인생의 구비를 돌아와 만년의 작업에 골몰하는 이들 부부에게 신나고 즐거운 라데츠키 행진곡을 울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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