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1

2012.06.16 01:36

강학희 조회 수:465 추천:1





 






모딜리아니 (Modigliani, 2004) 



 

 

  




 

 

  


 
  

 


 

 

 

 









Andy Garcia



 

 




 

 

 

 

 

 



Elsa Zylberstein


 

  



 

 

 







 







 







 







 








 

 





 

 

 

 





 

 

 

 

 

 


 





붓 하나 없이 계절마다


신비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자연의 손길



고요하게 그러나 순수하게

그 빛깔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그 향기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나무와 풀, 꽃은 오늘 어떤 기도를 할까 살아가는 동안 바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무는 흔들리는 잎새들에게 일러 주겠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할 때는 


꽃이 필 때가 아니라 질 때라는 것을,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빛깔보다는 그 향기 때문일 거라고, 깊은 숲 속에서 흐르는

한 모금의 샘물을 마시는 기쁨을 맛보려면

뿌리까지 길어오는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고...


끝없는 욕망의 늪으로 불어오는 한줄기 봄바람의 여운이

가슴까지 스치며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바람 속에서도 꿈을 키워온 나무처럼
날마다 쌓아가는 삶의 탑에 
차곡차곡 인내의 공을 들여야겠다고



나무와 풀, 꽃처럼
나는 오늘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 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 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 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 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위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 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남용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4~16년의 2년 동안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와 함께 살면서 복잡한 연애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술상 폴 기욤이 그를 도와주었고, 특히 폴란드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몇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사주거나 남에게 팔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그해 12월 베르트 베유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경찰은 이 누드화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그림을 치우게 했다. 그의 마지막 연애사건은 같은 해인 1917년에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는 젊은 화가인 잔 에뷔테른

이었는데, 그는 잔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로 가서 살았다. 그들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난 것은 1918년 11월이었다. 이무렵 그의 그림도 활짝 꽃피었다. 그의 윤곽선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의 평온한 생활과 날씨도 쇠약해진 화가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온 뒤 1920년 1월에 앓아누웠고, 10일 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임신중이던 잔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리의 전위 예술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살롱 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베르트 베유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의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죽은 뒤인 1922년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시인 앙드레 살몽이 쓴 논문을 통하여, 모딜리아니는 마침내 명성을 얻었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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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Amadeo Modigliani, 1884-1920)의 "모자를 쓴 여인의 초상"(Portrait of Woman in Hat)
1917, Oil on Canvas, 55 x 38cm, Private Collection
후에 "Jeanne Hebuterne in Hat"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림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이 여인은 19세의 미술학도로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와 동거하여 딸아이를 낳고 두째를
가졌을때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하자 절망한 나머지 바로 다음날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한다.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모델로 25점의 작품을 남겼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몽파르나스 시대의 친구인 시인 앙드레 살몽(Andr&eacute; Salmon)은 《모딜리아니의 정열적 생애》에서, 모딜리아니를 가리켜 “한 사람의 외톨이”, 또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나이”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젊은 날의 모딜리아니가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주와 기행의 숱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가장 치열한 예술과의 투쟁을 벌인 고독한 내면적 존재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똑같은 유태인이며 몽마르트 시대 이래의 예술적 동지였던 막스 자콥 또한 말년의 모딜리아니에게서는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지만 모딜리아니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에 대해 뜨겁고 깊은 애정을 한없이 기울인 드문 화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줄곧 초상화를 그렸고,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루에 1백 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이 데생과 조각과 유화의 세 부문에 걸쳐 빼어난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초상화 부문에서이다.
<서 있는 나부> <팔을 들어올리고 누워 있는 나부> <앉아 있는 나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나부> 등 일련의 나부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남불 니스에서 요양할 때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그의 회화 작업 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과 혼과 손으로 재구성한 초상화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놓기도 하고,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쉼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간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장 콕토) 

1906년 파리에 왔을 때,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예술 동지였던 시인과 화가들, 키슬링·막스 자콥·수틴·앙드레 살몽·호안 그리즈·피카소·블라맹크·블레즈 상드라르 …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러한 초상화들 가운데 <장 콕토의 초상>(1917)이 있다. 이 초상화 속에서의 시인은 프록코트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하얀 행커치프를 슬쩍 꼽고 있는 약간 뽐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확실히 콕토라는 시인에게는 이러한 멋부리기의 아니꼬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에서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시인의 나비 넥타이와 행커치프가 아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의 손이다. 
왠지 연약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신경과 감각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길다란 손’의 모습. 이른바 보들레르가 데생에 대해 정의하면서 ‘위대한 의지’ 와 ‘섬세성’(<1845년의 살롱>)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막스 자콥이 데생을 가리켜 하나의 ‘형태의 의지’ 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의지’와 ‘섬세성’이, 모딜리아니가 묘사하고 있는 콕토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에 관하여 <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에세이를 썼다. 
거기에서 콕토는 조셉 바라 거리에 있는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모딜리아니가 “유채로 나의 초상을 그려 주었던 시기에 우리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고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화가를 위해서 3시간이 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화가는 시인의 특징적 인상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려 나갔던 것이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최고의 엘레강스이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귀족이다. 마치 유령의 선(線)처럼 보이는 핏기 없는 그의 선은 결코 서투름에 빠진 적이 없다. 
그의 선은 샴 고양이의 부드러움으로 서투름에서 벗어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 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 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 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라 로통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쉼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초상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감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에피소드들은 로맨틱한 전설을 만들어 내고, 애수에 젖게 하는 소설 같은 감동적 이야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허황한 전설을 꾸며 낸 호사스런 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콕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객을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비슷비슷한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그런 화가가 아니고 “객석에 앉아서 손금을 보는 존엄한 집시”로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 따위는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과 혼과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생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한다.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방랑기사들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 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의 색깔 중에서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이 ‘파란 색의 신비’이다. 
<파란 눈의 소녀> <파란 옷의 소녀> <파란 에이프런의 소녀> <파란 상의의 소년> 등,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왠지 청색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특히 <파란 상의의 소년>(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자화상>(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한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한 친구인 음악가 마리오 바르보리를 그린 데생에서 넘쳐 흐르는 신생(新生)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음을 예감한 인간의 환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1884년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으며,

 소학교 시절 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불행히도 그는 어려서부터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가 많았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했던 모딜리아니는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시작했다.

 17살이 되던 해에는 폐병이 재발하여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로마와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예술적인 잠재력을 유발했다.





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를 얘기할 때면

 여러 가지 평들이 거론되곤 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  등장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 되기도 했다.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은 ‘오직 모딜리아니에 의해서만이 표현될수 있다' 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20세기의 빼어난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화가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람이다. 


 



그는 초상화나 나부화, 

그리고  모두 인물이나 인체를 그렸다.하물며 조각품도 모두사람을 소재로 하였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아름다운 사랑얘기와 함께 방랑자적인 예술가 기질로 유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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