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마지막 회)

2003.05.30 10:00

김영강 조회 수:621 추천:67

    점심도 안 먹고 나간 사람이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소식이 없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옥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이 생각을 진작 못했지.
    그녀는 큰딸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텅빈 캄캄한 집에 들어서는 남편을 그려보고는 고소한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는데 삼십여 분 운전을 하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치밀던 울화가 점점 가라앉았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는 성당에서 외우는 글귀가 생각났다.  어쨌든 옥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리고 '박영선' 운운하며 잔뜩 벼룬 자신이 가소로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남편으로 하여금 지난 추억을 돌이키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할머니이' 하고 좋아 날뛰는 손자들을 품에 안으니,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엄마 웬 일이냐고' 큰딸은 옥희의 방문을 뜻밖인양 의아해 했다.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아까 낮에 전화 걸었더니 엄마는 친구 만나러 나가고, 아빠 혼자 계시기에 이 서방이 골프 치러 가자고 불러냈거든. 지금 들어오실 시간 다 돼 가요."
    옥희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사위의 전화를 받고 얼시구 좋구나 하면서 골프채를 차에 싣고 막 떠나려는 차에 우체부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들을 갖고 들어와 겉봉을 훑어보는 중에 옥희가 들어온 것일 게다.
    옥희가 집구석에 앉아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에 남편은 푸른 초원을 훨훨 날아다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와중에 골프는 잘 맞았을까?

    드디어 차가 멎으며 남편의 모습이 거실 창밖을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도 열심히 운동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 탓인지 멀찌김치서 보니 그냥 사위 또래 같다.  옥희는 그게 싫다.  사위보다는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듯한 남편의 큰 키가 오늘 따라 왠지 멀대같이 보인다.
    "오늘 아버님 싱글 쳤어요. 싱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사위가 한 첫 마디였다.
    싱글이란 남편이 아직 한번도 못 쳐본 점수가 아닌가?
    옥희의 출현이 뜻밖이라는 듯 남편은 주춤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게 김동추 머리통이다 하고, 때리니가 따악 딱 하고 어찌나 공이 잘 맞던지.., 어허어 쏙 씨어언해."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목청을 돋구며 그는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큰딸과 사위는 김동추가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 있다아아 --'하고 노래를 부르듯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두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계속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진짜 김동추의 머리통을 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고 옥희의 눈에 시선을 꽂고는 말 마디마디를 꾹꾹 누르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쩔거야?  회갑잔치에 갈거야? 말거야?  가고 싶으면 가라구. 얼마든지 가라구.  나는 아무 상관 않을 테니가.  6월 6일이면 아직 보름 남았으니까, 그 안에 만나도 되겠네."
    남편의 끝말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왠만큼 잔잔해진 그녀의 감정에 남편이 다시 돌맹이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위 앞이라 어쩔 수 없어 꾹 참았다.  남편을 잠깐 꼰아 보고는 맘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덩치 값도 못하는 양반아. 당신, 나한테 열등의식 있어?  아니면 개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이 박영선이 이하 여러 여자들하고 놀아난 결과, 얻은 결론이 겨우 그거야? .
    큰딸과 사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이서 눈빛으로만 무언의 표정을 주고받았다.  옥희는 사위를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 서방, 배고프지? 저녁 다 됐으니 어서 씻고 와."
    부엌을 향하는 옥희의 뒤통수에다 대고 남편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말했다.  사위 앞에서 채신머리 없이 구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도 같이 갈까?  그 새끼 상판대기 한번 보게."
    그녀는 한번 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그래, 같이 가자구.  가서 아주 근사하게 쇼를 하는 거야.  아마 지금 그 사람 부동산 재벌이 됐을 걸. 그리고  S공대에서도 손꼽히는 수재였으니 유학와서 칼텍이나 MIT 쯤은 나와 적어도 대학교수 정도는 됐을 것이고. 그 부모도 둘다 대학교수였거든.

    그리고 생각했다. 김동추의 외모를 보고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하지만 지금 김동추는 예전의 하얀 멸치 같은 모습은 싹 사라지고 지위와 부에 이력이 붙어 보기 좋을 정도로 중후하고 듬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옥희 역시 세월에 연륜이 붙어 듬직하게 변했다.  스무살 적의 날씬하고 청초한 모습은 아주 옛날에 다 사라져버렸다.  김동추가 지금의 옥희를 보면 실망할 건 뻔한 이치다.
    문득, 남편이 박영선이라는 여자를 지금 만나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지, 입장이 바뀌어 '박영선'이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 아니 눈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옥희는 저렇게 채신머리 없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편안한 감정으로 여유있게 대할 자신이 있다.

    드디어 6월 6일이 코앞에 닥친 어느 날이었다.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통 받았다.  발신처는 김동추가 보낸 초대장과 같은 주소였고 발신인은 이정자였다.
    이정자가 누구지? 이정자..., 아, 김동추의 집안을 잘 안다던 바로 그 친구가 아닌가?
    이상하게도 며칠 내내 그 친구 생각이 자꾸 났었다. 옥희는 급하게 봉투를 뜯었다.  뭔가 깜짝 놀랄 사연이 적혀있을 것만 같았다.

                                                                                                                                                                                                                       - 끝 -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6
전체:
74,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