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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소설 연구 (5)
2006.02.27 05:58
「미주 한인소설 연구」(5)
삼일운동 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 한인 영어 소설 (2)
박영호 (시인, 평론가)
2. 강 용흘 (상)
《머리글》
1930 년대에 미국에서 출판 발표된 강용흘의 영문 소설인 <초당>(草堂. The Grass of Roof.1931년)과 <동양인 서양에 가다>(East Goes West. 1937년)등은 1928 년에 발표된 유일한의 <한국에서 내 어린 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과 함께 1930년대 미주에 나타난 한인 영문소설들로서, 이들은 우선 한인에 의해서 최초로 쓰인 영문 소설들이란 점과 함께, 현지어인 영어를 통해서 처음으로 우리 문학과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기치가 있고, 다음으로 이러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공적을 떠나서 하나의 순수 문학작품으로서도 그들에게 상당한 미학적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점이 또한 특별한 가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강용흘이 그의 작품으로 동양인들에게는 극히 보수적이었던 미국 문학풍토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고, ‘북 오부 더 쎈추리’(Book of The Century)상과 동양인 최초로 구겐하임 장학 재단(Guggenheim fellowship)으로부터 문학장려상까지 수상했던 점이나, 동양인의 소설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그 당시 영어 이외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십여 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던 점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프랑스 최고 번역상인 ‘르 프리 할페린 카민스키’ 상(1937년)을 수상하기도 했던 점은 특기 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그 당시 춘원 이광수씨에 의해서 신문지상(「동아 일보」1931,12,10),「조선일보,」’일사일언’ 1933, 12,22)을 통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가 있었지만, 일반인에게는 작품이 소개 되지 않았고, 1947 년에야 김 성칠 씨(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일반에게 1부만 소개된 바가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한 거론이나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근래에 와서야 재외동포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으로 그에 대한 연구도 크게 진전이 되어 현재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특히 김욱동씨(서강대 교수)의 저서인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은 자료 수집에 특별한 업적을 이루고 있고, 이에 따른 연구 분석 역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가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김욱동 교수의 자료를 많이 차용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이는 시작일 뿐이라고 여기고, 앞으로 보다 많은 분들을 통해서 작품에 대한 보다 폭 넓고 다각적인 분석으로 이 작품이 지닌 참된 문학적 가치와 함께 작가의 공적에 대한 보다 합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우선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다 큰 가치를 고국에서 충분하게 대중적으로 소개되지 못한 이유를 살펴 보면, 우선 그의 작품들이 영어로 쓰인 작품이어서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견해인데, 이제는 많은 분들이 이도 우리 문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밝히고 있고, 이는 인식에 대한 문제일 뿐 앞으로 우리 문학의 세계화나 다중문학 내지 글로벌 문학으로 다가가는 시대적인 필연성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우리 문학에 포용이 되리라 확신한다.
또 다른 한 이유는 그의 작품 세계에 나타나는 꿈의 추구가 하나의 개인적인 것이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주체의식이나 정체의식 등의 표현이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점과 함께, 조국의 현실을 저버린 채 서양을 찾아간 일종의 도망자 문학연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행적 위주의 표현일 뿐,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정신 세계는 단연 동양과 조국의 혼에 대한 사랑과 조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에 대한 애정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고향 송둔지 마을을 천혜의 낙원으로 여기고 있는 점부터가 그렇고, 그가 찾아간 서양에 대한 꿈은 아메리카 드림이 아니고 새로운 학문과 신 세계에 대한 탐미적 꿈이고, 그것도 다음 작품에서 결국은 실망으로 나타나고 피닉스적인 탐미의 세계로만 남는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그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사실은 그는 죽는 날 까지도 그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 살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그가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는 극히 민족적인 국가관과 정치관을 지니고 있었던 탓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국가관은 신탁통치나 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단일 통일정부 수립을 원했고, 이로 인해 그는 이승만이나 미 군정청과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시켰으며, 그로 인해 그는 결국 민족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귀국해야만 했고, 이후로도 미국 반정부 요시찰 인물명단에 올라 정보국의 꾸준한 감시를 받아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분단이 아닌 중립국과 같은 이상적인 통일정부를 바랬던 것 같다. 역시 그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치관에서도 유토피아적인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가 쓴 영문 소설들이 순수 소설이 아닌 한낱 자서전으로 보는 견해인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욱동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이 작품은 분명히 자전적 소설 이라고 못박고 있듯이, 이 작품은 분명 자서전이 아닌 소설이고 이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김욱동 교수의 표현처럼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앞서서도 거론했지만, 재미 일세 작가들의 영문 소설이 한결같이 자전적인 내용을 소재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여건을 이해해야 하고, 특히 강용흘의 두 작품은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반적인 소설보다도 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이야기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설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국은 이러한 형식이나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문제이어서, 설령 개인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사회적 시대적 역사적으로 확대되어 소설의 미학적 가치로 표현되고 있다면 이는 분명 소설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시대에 이만한 동양적인 사상과 고전 시문학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서양 문화와 문학에 대한 이해도 함께 작품 속에 표현한 사람이 그 몇이나 되었던가, 이는 소설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이야기 같지만, 서구 문명에 의해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잠식되어가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서사적 내용이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적 가치와 소설적 가치로 활용되고 있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유영 교수가 (문학 평론. 번역가)가 그의 번역서 <동양선비 서양에 가다>에서 밝힌 것처럼, 강용흘의 <초당>과 <동양선비 서양에 가다>는 일찍이 한국 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동양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일 수 있다는 비슷한 표현이 전혀 터무니 없는 표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점으로도 설명을 할 수 있다. 또한 동양과 서양 두 세계가 함께 조화되어 나타나는 미주 한국 이민 문학이라고 하는 특별한 형태의 문학이라는 점을 감안 하면, 그 소설적 가치가 더욱더 뛰어난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 강용흘(姜鏞訖 Younghill Kang 1903-1972)의 출생과 생애
강용흘의 출생과 성장 및 행적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더러 혼란이 있고,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들이 있다. 이러한 점은 우선 그가 태어난 시기가 시대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여서 기록상 제도상의 모순이나 실수 등에서 비롯된 점이 많고, 다음으로는 더러 허구가 있을 수 있는 그의 소설에 나타나 있는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모두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 데서 오는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용흘은 1898년 5월 10일에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산양리(山陽里) 둔지 마을에서 진주 강씨인 아버지 강신풍(姜信豊)과 어머니 청주 김씨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진주 강씨의 교리공파(校理公派) 27대 손으로 자(子)는 성녀(聲汝)이고 호(號)는 초당(草堂)이다. 원래 초당이란 말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일찍이 이조 초기 사육신의 한 분인 유 성원( 柳誠源) 의 시조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에서 인 것 같고, 다음으로 이화진(李華鎭)의 시조에도 쓰이고 있다. 소박하고 전통적인 우리의 고유한 가옥의 모습을 나타낸 이 초당이란 말을 그는 여러 곳에서 즐겨 쓰고 있고, 말년에는 호를 다시 백령초부(白嶺樵夫) 라고도 썼는데, 이 역시 산속에서 소박하게 사는 나무꾼이란 뜻으로 초당과 별 다름이 없는 표현이다.
그의 출생지와 출생 년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구구하나,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출생 년도로 경우에 따라 1896년에서부터 1903년까지 7년의 차이가 나타나고, 맨 먼저 1896년 설은 호적 기록에 의한 것인데, 착오일 가능성이 많고, 다음은1898년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그의 친구이며 함흥 영생 중학교 동창인 김상필씨가 “그는 1898년 5월 10일에 태어났고, 그의 중학교 졸업은 1918년, 바로 삼일 운동의 전해로 그는 21세였다.”(김상필, ‘대통령 지망생 강용흘 씨’<신동아 >104호 1973, 4월)고 밝힌 것을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기록에 의하면 먼저 1899년 출생설로 이는 월터 K 유 씨가 에서 밝힌 것으로 (‘Befor Grass Of Roof; Younghill Kang’s’ University Days 1988년) 캐나다의 댈후지 대학교 입학원서에 두 차례에 걸쳐 그 자신 스스로 1989년으로 표기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공식서류인 미국 이민서류와 구겐하임상 신청서 등에 한결같이 1903년으로 쓰고 있고, 뉴욕 대학 기록 보관소와 ‘20세기 미국작가 사전’(1945년) 등에도 모두 1903년으로 표기되어 나온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그의 생년월일을 1903년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그 시대에 흔히 있었던 일로, 이삼 년 늦게 혹은 조혼을 원해 이삼 년 빠르게 기록 했는데. 강용흘도 <초당> 작품 속에서 “손자를 빨리 보고 싶어서 많은 아버지들이 나이를 속인다. 내 나이도 호적에는 대여섯 살이나 잘못 기록되어 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가 직접 적성한 미국 쪽의 기록이 확실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1903년이라는 기록에도 문제는 있다. 그의 모친 사망 기록이 1902년 8월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모친의 사망기록 잘못 되었으리란 추리가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혼란은 출생 년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의 다른 행적에도 더러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소설 <초당>에서는 그가 일본에서 4년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그의 집안은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선비 집안으로 그의 조부는 지관(풍수)이었고, 부친은 농기구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큰 숙부는 이름난 시인으로 오로지 시에만 취해서 사는 사람이어서 그를 두고 미치광이 시인이라고들 했고, 그의 다른 막내 숙부 역시 선비 신분인 듯싶지만 밖으로만 떠도는 탕자였고, 그의 당숙 한 분은 일찍이 서울에서 큰 벼슬을 지낸 박사 시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모두가 시와 학문을 숭상하는 대표적인 선비 집안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모친이 그를 낳은 지 수 개월 후에 바로 사망해서 그는 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조부가 지관(풍수)이어서 항상 집을 비웠기 때문에, 그의 조모가 그의 부친인 재혼 하지 않은 큰 아들과 함께 대가족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조모는 그에게 어머니와 같았고, 그가 장손인 관계로 다른 나이 많은 사촌들과는 달리 조모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자랐다. 특히 그의 조부가 무덤을 잘 쓴 관계로 장차 집안에 박사가 나오리란 기대 때문에, 장손인 자신이 장차 훌륭한 시인 학자가 되어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을 조모로부터 수없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조모의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자신은 남다른 사람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는 특별한 꿈을 유년시절부터 그의 가슴에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숙부에게서 한문과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 했는데, 그는 이삼 세 때에 벌써 한시를 지을 수 있었고, 육칠 세에 이미 고문진보 사서 삼경 등을 외울 수가 있어서, 신동이란 말이 중학을 다닐 때까지 붙어 다녔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는 분명 양반 집안인 선비의 집안 출신 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무척 빈한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와 함께 자라고 함께 중학을 다닌 친구 김상필씨의 말에 의하면 그는 빈농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고 있고, 미국 쪽의 일레인 김은 그를 귀족가문의 출신으로 보고 있어서, 서로 상반된 표현 같지만 사실은 이 두 경우가 다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1912년 그가 아홉 살 때 서울에서 내려온 박사 당숙의 권유로 읍내 초등학교에서 입학해서 1914년까지 2년 동안 신교육을 받았고, (뉴욕 대학 기록보관소의 기록) 다시 부친 몰래 도보로 걸어서 16일만에 서울에 올라가 오성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일년 동안 고학을 하면서 수학하다가 폐교가 되어(작품 속에서는 일본인 교사들과의 잦은 마찰로 퇴학을 당한다.)다시 고향 가까운 함흥으로 옮겨가서 영생중학교(캐나다 장로교 설립)에 다시 입학하여, 그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준 평생 은인인 교장 루서 L 영 선교목사와 만나게 되고, 주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4년 뒤인 1918년에 수료하게 된다.(이 때의 동창생으로 ‘대통령 지망생 강용흘 씨’(222)를 쓴 김상필씨와 ‘초당 강용흘씨의 출세 비화’(민성 1950년)를 쓴 한흑구 씨가 있는데, 김상필씨의 말에 의하면 “그는 사서삼경, 고문진보 같은 책을 줄줄 외워 신동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고,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면서 배일운동은 한국독립의 유일한 수단이라고도 하여, 미국에 가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겠다고도 했으며, 당시 친구들의 그에 대한 인상은 ‘야성적인 소박한 시골뜨기’.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허파에 바람이 든 작자’, ‘그러나 장차 엉뚱하게 큰일을 저지를지 모를 친구’ 라는 것들이었다.” 김 상필. ‘대통령 지망생 강용흘 씨’ 에서)고 밝히고 있다.
그는 벌써 예닐곱 살 때부터 큰 꿈을 지니고 이에 따른 많은 기행과 호언을 일삼았고, 학문을 닦는 길이 장차 한 나라의 재상이 되는 꿈을 이루는 길이라 생각하고 많은 지식을 설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생중학을 졸업한 그는 목사를 따라 다니며 교회를 순방하고, 중국을 비롯해서 많은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와 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에 종사한다. 그러나 한 처녀 여선생과의 산책이 문제가 되어 교직을 그만 두고 1919년에 상경한다.
상경해서 캐나다 선교사의 소개로 호레이스 C 언더우드 부인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의 번역 일을 돕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어떤 형태로든지 영어에 습득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러한 점은 그가 종로에 있던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 강습을 받고 있었던 점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이때 그는 영국의 많은 낭만주의 시작품들을 읽고 있었고, 더러는 번역을 하는 일에도 몰두 했었던 것 같다.
그는 1919년 삼일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바로 삼일운동이 시작되었던 종로에 있었으며, 당일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전매청 연초공장 부근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들어가 “여기 직공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고 호통을 친 것이 화근이 되에 일경의 추적을 당하게 되어, 그는 결국 1919년 삼일운동 직후 두 차례(1919년 4월과 6월)에 걸쳐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결국 삼일 독립운동의 실패는 그에게도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안겨다 주고 만다.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까?’ 하고 한 나라의 재상이 되려던 꿈도 모두가 헛된 꿈이란 걸 현실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다 마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던 중에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영생 중학교 교장인 루서 앨 영 선교사가 귀국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간청을 하게 되고, 이에 영 선교사의 승낙을 받아서 결국 일본 정부에 십 원이나 되는 보증금을 내고 여권을 받아준다.
그는 영 선교사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꼬하마로 거쳐 그곳에서 다시 영국 선적의 배를 타고 중국을 경유 태평양을 건너 쌘프란 시스코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대륙을 횡단하여 영 선교사의 고향인 노바스코시아 핼리팩스로 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1920년에 댈후지 대학에 입학하여 다음해까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보스턴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고 의학을 전공하여 1925년에 이학사 학위인 과학등업사(科學 得業士)의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다시 하버드 대학 교육대학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전공을 바꾸어 영문학과 영문 교육학, 그리고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1927년에 영문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이처럼 의학에서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꾼 데는 그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다른 곳에서는 평화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 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때 벌써 그곳에서 발행되고 있던 유학생들 중심 잡지인 <한국 학생 불리턴.>(1922년 12월 창간)지와 <우라키>(Rocky, 1925년 창간)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고, 직접 편집일을 맡아보기도 했다. 이 잡지에는 후일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28년에 뉴욕 아트 쎈터에서 ‘동양예술과 동양사회 ‘라는 강연 (11월 18일자 <뉴욕 타임지 >소개)을 하고 이듬해는 <리뷰의 리뷰>잡지에 동양에 관계된 글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은 1928년 대영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14판 편집에 종사하게 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편집인인 W. B 핏킨을 도와 동양에 대한 백 항복이 넘는 새로운 기록물을 집필했는데, 그것은 동양의 역사와 문학과 종교 정치 등을 총 망라한 것 들이었다.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뒤로 미국의 많은 유명 백과사전에 동양에 대한 전문 집필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이미 동양에 관한 해박한 학자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동양에 관계된 많은 모임에 강사로 초빙되었다.
또한 그는 같은 해에 미국 상류시회 출신이고 그보다 다섯 살 위인 프린시스 킬리 (Frances Keely.金 吉利 웨슬리 여대 영문학과 졸업,)와 그녀의 할머니의 별장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아울러 그는 이 해부터 초당 집필에 들어갔고, 다음 해엔 뉴욕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 때 함께 강의하던 토마스 울프, 바디스 피셔, 월리암 트로이, 프레대릭 프로코쉬, 위리엄 틴딜 등은 후일 유명한 영문 학자들이 된다. 특히 소설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를 발표하여 이미 유명작가가 되어 있던 토머스 울프(Thomas Wolfe)와 바디 피셔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게 되었고, 또한 울프는 그가 <초당>을 발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람이고, 또한 그를 동생으로 입양까지 해주어서, 그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동양의 한시 등을 번역했고. 최초의 동양번역 시집인 <Oriental Poetry>(동양 시집 1929년)를 타자판으로 간행했다.
그와 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토머스 울프(Thomas Wolf-1938, 9월 사망)에게 그가 쓴 <초당>을 보여 주자, 이를 읽고 난 울프는 그에게 소설 출간을 권했고, 존 어네스트 해밍웨이 작품과 같은 유명작가의 작품만을 을 출간하던 유명한 찰스 스크리브너 선스 출판사(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의 편집인과 사장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승낙을 받아내, 1930 년에 <초당> 출판 준비 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해에 그의 부인은 딸을 출산하게 된다 (루시 린. Lucy Lynn Kang 1930-1995)그의 딸은 그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그와 가까이 지냈고 그의 문학과 그를 가장 잘 이해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의 부친이 사망한 뒤인 1986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해 왔다.” “소녀시절에는 우상을 숭배할 정도로 그를 숭배했다”(뉴욕 타임스 1986, 4, 7)고 회상하고 있고, 또한 그녀는 민주주의 이상은 미국 이민자들 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A. M 론즌설의 글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면서, “그러한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다고 불랙 리스트에 오르던 매카시 시대에 나의 아버지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다’ (Lucy Lynn Kang. 뉴욕 타임스 1986, 4, 20)고 말한바 있다. 그와 그의 부인 사이에는 다시 두 아들이 출생했다. (장남–강 경구. 미국명 크리스토퍼 영힐 강. MIT 수학. 공군 소령제대 버지니아 거주. 1936년-) 차남 -강 나구(로버트 영힐 강 1949년-)
<초당>은 단행본으로 출판이 되기 전에 흔히 있는 관례대로 1930년 1월부터 <아시아 매거진>에 축소판으로 연재가 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는 제목이 ‘서양 모자’로 표현되어 있고 첫 회의 끝이 그가 그의 스승 박 수산이 준 모자를 쓰고 집에 돌아오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그는 편집자에게 무척 화를 내고 소송까지도 운운 했었던 것 같다. (‘Book and Other things’ Lewis Gannet, 뉴욕 헤럴드 트리1931년 4,17)
아무튼 다음해인 1931년에 드디어 ‘초당’이 발표가 되었다. <초당>이 발표되자 많은 찬사를 받게 되고 그는 일약 유명한 동양 최초의 미국 작가이면서 최초의 한국계 작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의 작품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등 십여 개 국가에서 번역 발표되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번역 발표되어 1937년에 ‘르 프리 할패린 카만스키’ 번역상을 수상하는 등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가 이처럼 이름이 알려지자 그도 주위의 유명작가 작품들에 대한 평을 거침없이 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같은 해에 발표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던 <대지> 작품을 두고 “ 마치 기사도나 기독교 제도를 제대로 모르고 유럽 중세이야기를 쓰는 것 같다.”(Younghill Kang. Cahina different, <뉴 리퍼블릭,> 1931 7, 1)고 평하고, 이어서 작가 펄 S 벅에 대해서도 “대중 작가일 뿐이며 미국 문학계에서는 조금도 가치를 주려 하지 않는다.” 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의 친구인 토머스 울프에게 조차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저작은 너무 개인적이어서 풍자성을 띠지 못했고, 유머를 발휘 하는데 까지는 가지 못했다.”(강용흘 ‘ 강용흘이 본 미국문학’ 1949, 4) 고 서슴없이 비판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이 때부터 글이나 강연 등을 통해서 동양의 해박한 지식인으로 통하기 시작했는데, 뉴욕 타임스 뉴 리퍼블릭, 네이션, 뉴욕 이브닝 포스트 등에 서평,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그들의 강연에 초청되어 ‘극동의 현대시,’ ‘동양과 서양문화의 문화적 해석’ ‘에머슨 철학’ 등을 강연했다. 또한 그의 강연 내용은 문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일반 문화(동양에서의 책 도둑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 1931년 6,16)나 미국 사회에 대한 모순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여성 문제인 페미니즘(<뉴욕 타임스> 1931,1011)을 통해서 여성 자유 평등 사상을 직접적으로 역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그의 딸이 기술한 것처럼 전통적인 백인사회로부터 그가 미움과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요소가 되었으리란 추리가 가능하고, 그가 근본적으로 미국사회에 동화할 수 없었던 차별의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다음에 나타나게 되는 그의 시민권에 대한 문제와도 맞물려 그의 개인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게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그는 1933년 7월에 그의 <초당>작품을 어린이들이 볼 수 있도록 초반부 만을 다시 고쳐 써서 <The Happy Grove>(행복한 숲. 부제 낙천적 방원 (樂天的 芳園)를 같은 출판사에서 펴내게 된다. 이 책은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고, 또한 꼭 어린이들에게만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양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성인들에게도 유익 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서 다음 해인 1934년에 <초당’>으로 인해서 미국의 유명한 ‘구겐하임 펠로우 쉽’(상원 위원을 역임한 사이먼 구겐하임이 1925년에 설립한 문화재단)을 받게 된다. 이는 일종의 창작 장려기금으로 예술가들이 창작에 전염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제도로, 노벨상과는 달리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에서 주어지는 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흘은 이의 신청을 <초당>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유배자의 죽음’ (후일 <East Goes West>’동양인 서양에 가다’로 발표)에 대한 집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이 기금을 받아 가족과 유럽 각국을 여행하고, 이탈리아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이 늦어지자 그는 다시 구겐하임 재단에 이차로 6개월의 연장허가를 신청하고 이를 받아서 독일 문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는 소설 집필에 열중하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많은 한국 지식인들을 만나 교우하게 되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이 미륵(1899년 해주에서 출생)씨다. 이분 역시 1919년 삼일 독립운동 직후 중국을 거쳐 독일로 건너가서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 베르그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28년에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지만, 전공과 달리 창작에 몰두하게 되고, 신문과 잡지에 그 시대의 한국 시대상에 대한 글을 많이 발표했고, 1946년에 드디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의학이 아닌 동양학과 한국학을 강의 했다.
강 용흘씨가 독일에 머무는 동한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김 재원 (사학자 9국립박물관장 역임)씨의 후일담에 의하면, 그때 강 용흘씨가 이 미륵씨에게 자신처럼 자서전적인 소설을 써보기를 권했고, 이를 이씨가 받아드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미륵씨는 독일문단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그의 작품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1935년 6월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사회에서는 물론 재미 한국인 사회에서도 저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 한 예로 김규식, 서재필, 주미 중국대사 등, 내노라 하는 인물만이 연사로 초청되는 주미 유학생 총회 동부대회에 11차 대표 연사로 초청 되었던 점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드디어 1937년 9월에 <동양인 서양에 가다>(East Goes West.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부제 ‘동양 양키 만들기’)의 집필을 끝내고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초당처럼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본인은 초당보다 훨씬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며 자신은 이 작품에 더 애착을 느낀다고 하고 있다.
이 해에 그는 또한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만 전전했던 신분에서 처음으로 뉴욕대학 영문학과 조교수로 발령을 받게 된다. (1937년 9월) 드디어 전임 교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라던 전임 교수가 되자 한편으로는 “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는 할 수 있지만-이 일 때문에 내 중요한 일인 글을 쓰는데 좀처럼 시간을 낼 수가 없다”(Kunitz, edt Twentieth Authors p 509)하고 대담에서 이를 탓하기도 했다. 또한 영문학 강의를 하면서 생긴 현상이겠지만, 그는 이때에 시에 대해서 상당히 몰두했던 듯싶고, 소설보다는 늘상 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소설가라 하지 않고, “나는 시인이다.”(An Oriental Yankee Talks of Love, Life, Literature, and Interracial Marriage,” New York post 2. oct, 1937 p 9), “시인 한 사람이면 철학자 열 사람 몫을 할 수 있다.”(68쪽) 등의 표현을 일삼았다.
또한 이 때부터 그의 강연을 소개하는 전문적인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헤랄드 피트’라는 사람으로 그는 보스턴, 시카고, 롱비치 등에 지사를 둔 에이전트로 그의 강연에 관한 리스트를 작성해서 미국 각지에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1939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극동 미술 분과 큐레이터로 일을 하기 시작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 때까지도 시민권이 없었고, 이를 취득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1939 7월 10일 문서 HR 7127,),(1940년, 2월 매슈 M, 닐리 웨스트 버지니아주 상원위원. 문서 S 2801), (1942년 6월 2일 문서 뉴욕대학 기록)( 강 용흘 시민권을 위한 위원회. 켄드 E. 켈러 일리노이 주 하원 위원 신청) 유명 대학총장, 교수, 신문사, 잡지사 등 유명 언론인과 국회의원 등, 수 없는 인사들의 추천을 받아 무척 노력을 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고, 1952년 무렵에야 가까스로 취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욱동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이를 보면 그 시대 미국 사회가 얼마나 보수의 벽이 두꺼웠나를 잘 알 수가 있다.
이 때의 추천서를 통한 강씨에 대한 현지인들의 표현을 보면 크리브너스 선스 출판사 편집인 멕스웰 퍼킨스는 “ 강용흘은 대부분의 미국사람보다 이 나라를 더 잘 알고 있고, 이 나라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Rodger L. ed, Max and Majority. Gainesville; University 1999. p 396)라고 했고, 캔터 캘리 하원 위원은 “그는 철두철미한 한국사람이지만, 더더욱 미국 사람 이었다.” 라고 밝히고 “나는 그의 처와 두 자녀를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책 몇 권을 저술하고 영문학과의 교수가 된 사람에게 이 법을 적용해서는 미국의 정신에 어긋난다.” “만약 우리가 우리가 강 용흘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준다면 그것은 미국과 미국의 이상을 비상하게 이해하고 있는 한 정신을 해방하여 마침내 완전히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Citizenship for Kang Younhill’) 라고 표현하고 있고, <뉴욕 헤럴드 트리분> 편집인 제프리 파슨스도 하원에 보내는 청원서에 “그는 이 나라에 충성심이 강하다는 것과, 그가 미국 시민권을 아주 고맙게 생각할 뿐만 어니라. 미국 정부의 원칙에 충실하리라 확신 합니다.” (‘Korean Novelist May Get American Citizenship,’ ‘Korean Student Bulletin1 1939. 11)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가 미국시민으로서의 자격에 부족함이 없다고들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서슴없이 자신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고 있는데 다음은 뉴욕 선지<Sun>(‘Korean Seeks Army Training’ 1946, 25)에 실렸던 이전에 그가 했던 말이다.
“ 나는 미국인과 결혼했고 이 땅에서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나의 모든 뿌리는 이 나라에 있고, -(중략) 내 한 가지 욕망은 기회가 오면 이 나라, 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또한 그는 “시민권 서류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나는 미국 시만이다.” (Common Ground. 1941,겨울) 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을 보면, 그의 의식세계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자신은 미국인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훗날 그가 미국 정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점에서 실증이 되고 있는데, 1941년 일본과의 태평앙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 국방성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일하게 되고, 이즈음 ‘일본 정신은 병들었다,’ ‘전재국가가 하느님에게 보내는 탄원’ ‘일본군이 진군해 들어올 때” 등의 반일본 선전 논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다음 해는 미 육군 섭외국에서 일본어 교육과 번역을 담당했고, 조국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여 이승만과 함께 펄 S벅 여사가 사회를 맡은 한국 독립 궐기대회의 대표로 참석 했다. (뉴욕 시티 타운 홀 1942, 5.27)또한 1943년에는 미국 경제전 위원회의 한국 및 만주 담당 수석 경제 분석가의 일을 맡아 보았고, 1944년에는 뉴욕에서 미육군 교육국의 언어 자문관으로 일본어 교본을 작성했다.
아무튼 그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부터는 그의 순수한 문필생활 보다는 오로지 미국을 위해서 그의 모든 정력을 바친 것처럼 보인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에 그는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고국 군정청의 출판 부장으로 발탁이 되어 도미 27 년 만에 귀국하게 된다. 그가 맡은 일은 출판부장이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정보수집 임무에 종사했던 것 같고, 미 군정청에서 새로운 법령에 의해 새로 설립된 서울대학교의 문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고, 동양 외국어 대학 설립에도 관여했던 것 같다. 또한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 민간 정보부의 정치분석가와 자문관으로 일하면서 한국 정치의 실태에 대한 정보를 수집 보고했다. 이 때 정인보와 함께 종사했던 점으로 보아 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활동을 했던 것 같으나, 그가 군정청에서 정보에 관한 일에 종사했던 관계로, 실제 정치 일선에 있던 이승만과는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 같다.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그로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남북한 통합 정부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박용구, 김동식 설정식 김규식 변영태 등과 교우했고, 변영태가 편집한 한국 최초의 영문시집 <진달래 숲>(Groves of Azalea 1947)에 오우가 등의 시조를 번역해서 수록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김 성칠(서울대 사학과 조교수)에 의해서 <초당> 1부가 최초로 번역이 되어 일반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 이승만과의 불화와 이승만에 대한 지나친 비판으로 미 군정청에 말썽이 일고 마침내 하지 중장과의 불화로 발전되어 그는 결국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또한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그는 오히려 미 육군의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르게 되어 오랫동안 불편을 느꼈던 것 같다.
그가 미국에 돌아오자, 1948년 5월 <유엔 월드> 지는 “살아있는 한국 사람 가운데서 아미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는 정치적으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기자들에게 “나는 한국정치가이건 미국 정치가이건 정치가는 모두 싫어한다. 나는 작가요 예술가다. 예술가는 실리를 찾는 정치가들의 싸움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 고 밝히고 있는 점을 보면 그 당시 그의 처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시 뉴욕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 헸고, 이 때부터 여러 대학교에 초청이 되어 강의를 했다. 또한 1949년 뉴욕의 WCBS 방송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방송국에 출연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예일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동아시아에 관계되는 장서를 조사 추가하는 일을 맡아 보게 되고, 예일 대학원에서 동양문학에 관한 강의도 맡아서 하게 된다.
또한 그는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여러 지면에 글을 발표하고 한국적인 비극을 역설한다.
“내가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고, 마찬가지로 한국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갈등이 일어나는가 “(Kunitz, ed, Twentieth Century Authors 509)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것일까? 민주주의일까? 둘 다 아주 낯선 이데올로기 일 따름이다. (중략) 전형적인 한국인은 쫓김을 받는 무식한 농부일 따름이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는 삼팔선, 그 한 가지로 그는 정신 착란을 겪는다.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든 정치적으로는 패배할 것이다. 수술은 성공 하였지만, 환자는 사망하였다. - 그것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성공일 따름이다. “(1954년 구겐하임 펠로우 쉽 신청서에서)라고 그는 밝히고, 무엇보다도 “ 한국 사람은 열정적인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으로 열정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열정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미국사람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큰 비극,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공할 무지의 비극이다.”(Kunitz, ed, Twentieth Century Authors, p 509)라고 미국 정부에 대해서 직접적인 불만을 표현했다. 이어서 그는 “이 세계에서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이단적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열렬한 러시아적 한국인도 열렬한 미국적 한국인도 전혀 인기가 없다. 한국인들은 어쩌면 네루 같은 지도자를 좋아 할런지도 모른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그는 중립국 정치체제를 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전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대의 미국 정치 풍토에서 그는 극우파들에 의해서 좌파로 낙인이 찍혔던 것 같다. 이러한 점으로 그는 미국 정보국으로부터 극심한 조사와 감시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는 정신적으로 유배자나 유민 같은 소외의식에서 고통을 받았다는 점은 앞서 말한 그의 딸의 회고담에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그는 1953 년에 뉴욕시의 뉴 스쿨로부터 시인이요, 교육자요, 작가로서의 성인 교육에 대한 공로가 많다고 하여 ‘성인 교육상’ (“Commencement, 53; The Louis S, Weiss Prize in Adult Education for 1953 M r Younghill Kang” new School Bulletin, 2 Jun, 1953)을 수여 받는다.
또한 1954년 4월에는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였던 전쟁 체험 소설인 ‘아나타한’(마루야마 미치로 작 허마타자 하우스 출간. 뉴욕)을 번역하기도 했으나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고, 1953년 뉴욕대학교 교수직을 그만 둔 뒤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겼었던 것 같다.
그는 1954년에 다시 구겐하임 재단에 펠로우쉽을 신청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한국과 동북 아시아 문화사 집필을 목적으로 그 제목을 ‘잠에서 깨어난 용’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10여 년 전부터 동양의 네 마리 용이란 표현이 떠오르게 되고, 요사이는 중국을 거대한 용이 떠오르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점을 보면, 그는 문학자이지만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의 안목이 뛰어났던 것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희곡 ‘영원한 실마리’(1958년)와 ‘다리 밑에서’(1959년)를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힝에서 공연하여 미국 연극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극작가 이근삼을 만나게 되고, 이로 인해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희곡을 집필하게 된다. 그는 단막극을 써서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네올라와 펜실바니아 주의 스트라우즈버그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를 4장의 장막극으로 다시 고쳐 써서 다시 뉴욕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이근삼에게 타자본으로 된 이 희곡을 건네주게 된다.
이근삼은 이 희곡을 1974 봄 년에 ‘문학 사상’ 에 발표했고, 동년 6월에 영동 국립극장에서 ‘백조의 노래’란 제목으로 발표(극단 ‘민예”)하기도 했다. 이 작 품 내용 역시 고국 고려 말의 공민왕과 승려 신돈 (辛旽) 그리고 애첩 반야(般若)가 등장하는 역사물이다. 이를 두고 월터 K 류는 그의 발표문(Walter K Lew. for the “ Murder in The Royal” 쌘디아고 AAs 학회)에서 이 희곡은 혼란된 고려의 정치 사회상을 통해서 현대 한국 정치풍토를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65년부터는 옥스포드에 있는 웨스턴 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1960년대 말에는 그 때 한창이던 미국 월남전 참전에 대해 또 다시 신랄하게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꽤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그의 부인도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1970년 6월에 한국에서 열린 제 37차 국제 펜클럽 대회에 귀빈으로 초청을 받아 그의 부인 프랜시스 킬러와 그의 딸 루시 린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게 된다. 한국의 유명 문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그의 가족은 상당히 감격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인생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그의 부인 킬리 여사는 암에 걸려 앓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척 즐거워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그녀는 남편의 고국인 한국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점은 그녀가 김치를 손수 담가 먹었다는 점 하나만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특히 그의 딸 루시 린은 연회장에서 아리랑에 맞춰 그의 어버지와 함께 춤을 추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울고 싶었다. 당신에게 너무나 사랑을 느낍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힘에 대하여, 연약함에 대하여, 마법사적인 모습에 대하여, 총명함에 대하여, 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한 소녀가 누구에게서도 똑 같이 받을 수 없는 그 사랑스런 보살핌에 대하여…… “ (Kang, ‘Thoughts of The Time,’2) 라고 말했다고 훗날 회고 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6월 26일에 고려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실로 송둔지의 초당에서 시작된 가문의 꿈이고 자신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순간 이었을 것이니 그로서는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소장하고 있던 오천 여권에 이르는 책을 모두 고려대학에 기증했다.
그는 6월 7일 기독 청년회관에서 실시된 “시민 논단’에서 강연을 했고, 동서문화 잡지사에서 김 은국 등과 함께 좌담회를 갖기도 했고, 평소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만해 한용운 시를 그의 처와 함께 번역하여 영시집< 님의 침묵>이 그 해 8월 고려대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그의 한용운에 대한 생각은 그가 일찍이 발표했던 ‘객관적인 문학의 독창력’ (<경향신문 >1947,1,1) 이란 글에서 “네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작고하신 한용운 씨다.”(중략)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심볼한 붓으로 가장 독창적인 솜씨로 보여준 세계 어느 시인에 결고 떨어지지 않음을 발견했다.”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그가 그의 시에 얼마 크게 심취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 해 12월 16일 훌로리다에서 그의 부인 킬리가 사망했고, 그는 두 해 뒤인 1972년 12월 11일 뇌졸증으로 훌로리다 애텃라잇 비치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오 천석씨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언젠가 한번 그의 미국인 처와 딸을 데리고 조선에 나와 금강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살고 싶다.”(오 천석. ‘미주 유학생의 면영’ 45쪽>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꿈은 이룰 수가 없었고, 그의 소설 <초당>에서 한 청파가 “사주에 따르면 나는 이 광활한 세계 말고는 아무 집도 없이 평생 떠도는 방랑자가 되려고 태어났다.” 라고 말한 것처럼 결국 그는 먼 이국 땅을 떠돌며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결국 그의 미국에서의 삶은 결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의 꿈인 시인과 학자라는 꿈은 부분적으로는 실현 되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볼 때 그렇게 만족스러운 생은 못되었다. 그는 서양의 세계를 이상의 세계로 알고 찾아갔지만 거기에서도 결코 꿈은 이룩되지 않았고, 그는 말년에는 인간적인 외로움에 많이 쌓여 살았던 것 같다. 결국 그가 정신적으로 꿈꾸던 그의 꿈의 세계는 실패했고, 그것은 그가 뉴욕에 첫날 도착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의 영원한 불사조의 꿈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2)<초당>(.草堂. The Grass Roof )
소설 <초당>은 먼저 이 작품에 대한 독자 반응과 홍보를 목적으로 1930년 1월부터 ‘아시아 매거진’에 ‘서양모자’ 라는 제목으로 먼저 축소판으로 연재가 되었고, 1931년 2월에 뉴욕에서 출판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되었다. 책의 속 표지에는 모두 草堂 이란 한자 제호와 1931년, 뉴욕과 런던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어떤 속 표지에는 초당 그림의 삽화가 있고, 어떤 책은 삽화가 없는 것도 있어서, 책은 몇 판 몇 쇄가 인쇄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꾸준하게 발매가 되고 있었고,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절판이 되자, 1959년에 출판사가 다른 시카고의 플릿 출판사(Follett Publishing co, Chicago)가 다시 출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본국에 소개되기는 1931년 같은 해에 잡지 ‘삼천리’에 이광수의 서평이 실리는 등, 소개가 있었으나 일반에겐 소개된 적이 없고, 1947년에야 강 용흘의 귀국시 김 성칠(金聖七 서울대 교수)에 의해 제 1부가 번역 소개되었고, 1975 년에 장문평의 번역으로 <세계 문학 속의 한국 >이란 작품집(전 12권. 정한 출판사)속에 출간 되었고, 다시 1993년에 범우사에서 역시 장문평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이 뉴욕에서 처음 출간되자 무척 반응이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해에는 노벨 수상작가 펄 S. 벅의 소설 <대지>가 발표 되었고, 그리고 윌러 캐더 ‘바위 위의 그림자’와 유진 오닐의 희극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가 발표된 해였다. 이러한 쟁쟁한 작품들 속에서 뉴욕 서점가 주간 판매 부수 집게에 따르면 펄 S 벅의 <대지>가 소설부 1위로, 그리고 비소설 부분에서 그의 <초당>이 1위를 점유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 관심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이 출간되자 마자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유수의 신문과 <뉴 리퍼블릭> 같은 유명 잡지에서 앞을 다투어 서평을 실었고 많은 문학자들이 그를 극찬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대표적인 평을 살펴보면 펄 S 벅은 “그는 동양의 가장 빛나는 정신의 소유자의 한 사람” 이라고 평햇고, 영국의 H. G 웰스는 “바로 여기에 위대한 작가가 있다.” 라고 했고, 역시 영국의 레배커 웨스트는 역시 “강씨 이후의 대부분 책들이 맥이 빠져 보인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더욱이나 그의 친구이고 <초당>출판의 산파역이었던 소설 작가 토머스 울프는 그를 두고 “그는 타고난 작가로 어디를 보나 자유롭고 박력이 넘친다.” ‘‘그는 지상에서의 인간 방황과 유배를 기록하고, 그 속에 고통과 배고픔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냈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한 플로렌스는 “은자의 왕국에서 한 가치 있는 인간의 기록’ 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일찍이 동양인으로서 이만한 관심과 극찬을 받았던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당시 고국에서도 그의 작품에 대한 서평을 이광수가 ‘동아 일보’에 발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강 용흘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근대 조선인 혼의 고민의 호소 “라고 지적하고, “건강한 인간상을 그린 강 용흘을 두고 작가적 역량을 승인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광수.’강 용흘 씨의 초당’ <동아일보> 1931년12월 10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그릇된 부분 까지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등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다음은 홍 효민(영문학자 비평가 소설가)의 표현인데, 그는 미국<아시아 메가진>에 실린 강 용흘의 ‘서양 모자’(초당 예고 축소판)를 읽고 나서 이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퍼붓는데, 이의 표현을 보면 “너무나 조선 사람으로 조선의 미점 보다도 결점 이야기가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인에게 좋도록 되었고, 내 밑 들어 남 보기에 좋은 글이라는데 지나지 않는다.” (‘강 용흘 씨의 ‘웨스턴 햇’을 독하고’ <삼천리>. 1931년 6월)라고 평한다. 그라나 초당의 원본 소설을 읽고 나서는 비평이 전혀 달라진다. “강씨에 대한 누를 끼친 것을 도로 찾으려 한다.” “ 경솔이 거필함을 더욱 느껴마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예술상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음은 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면 미국에서 ‘우라키’ 등을 통해서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한흑구씨는 사뭇 비판적이다. ‘초당 강용흘 씨의 출세 비화’ 라는 글을 통해 고국을 위해서 글을 쓰기를 간절히 바라고, 삶의 예술이 아닌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하는 강용흘의 문학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강용흘은 “문학에는 국경이 없소.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사람이오.”하고 답변을 하고 있고, 한흑구는 ”강씨여 ! 중국이 자랑할 수 있는 임 어당 같이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초당이 되어 달라.” 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이는 앞서 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얼핏 보면 강용흘이 민족이나 조국에 대해 크게 소홀한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초당>이 출판되어 나오는데 영향을 끼친 점을 살펴보면, 먼저 유일한의 <한국에서의 내 소년 시절> 이 발표된 것이 1928년이고 강용흘이 <초당>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1929년이니, 어쩌면 유 일한의 작품이 그로 하여금 초당을 쓰게 된 동기를 유발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두 작품의 집필 의도부터가 다르고 중심 내용이 크게 다르지만,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나 꿈의 형성 과정 등에 유사한 점이 많고, 고국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라는 부분에서는 특히 비슷한 점이 많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집필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프린시스 킬리 여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유명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동료 교수이며 친구이기도 한 소설가 토머스 울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의 문학적 장르라 할 수 있는 형태적인 면을 살펴보면 이 소설은 한 개인의 인생 여정에 대한 기록을 소설로 꾸민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러한 작품 형태적인 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들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자서전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선 책을 발간한 출판사가 수록한 신문과 잡지의 광고에 ‘한 젊은 한국인의 삶의 이야기’ 라고 표현 했었고, <초당>의 뒷 표지에도 ‘강 용흘 자신의 삶의 기록’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 해에 같은 출판사에서 함께 출간된 펄 벅의 <대지> 는 픽션으로 구분 되고, <초당>은 논픽션으로 구분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작가 강용흘 자신 조차도 실제 그의 소설 속 맨 서두에서 “이제 나의 생애에 대해서 나 자신의 펜으로 진실을 이야기 하겠다”. “성서에 손을 얻고 맹세한다.” 라는 글로 시작하고 있고, 쿠니츠와의 대담에서도 “동양에서 겪은 내 자신의 삶을 다룬다” (Kunitz, and haycraft eds , Twentieth Century Authors, p 744)고 밝히고 있어, 그 스스로도 초당이 자서전이라는 인상을 짙게 표현을 하고 있는 점 등이 더욱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들 뿐만 아니라 신문들의 서평이나 비평가들의 평은 거의가 자서전 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든 한인 일세 자가들의 소설들이 한결같이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의 작품 배경이나 인물 및 내용이 자전적인 소재일 뿐, 이를 통해서 한 개인의 꿈이 사회적 국가적으로 연계되어 나타나는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모습을 미학적으로 형상화 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점으로, 이 작품은 하나의 자전적 소설임에 틀림이 없다. 모든 소설 문학이 허구나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고, 어떻든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고 보면, 자전적인 글도 표현에 따라 소설이 될 수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햇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이야기가 더러는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경우를 참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사실적 경험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형상화 되었느냐에 따라 그 사실적 기록이 사실이 아닌 하나의 허구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리라 믿는다.
다만 이 작품의 발단에서, 그것도 서두에서 작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설명을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점은 작자의 진실성에 대한 이해나 작품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이는 소설 작품 형태로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해서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닌 한낱 자서전이라는 인상을 많은 독자들에게 굳게 심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표현들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초당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 24장으로 되어 있고, 이를 크게 2 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초당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세계에서 꿈을 꾸고 평화롭게 성장해 가는 필자의 성장과정과 함께, 그 꿈을 위해 노력해 가는 수학 과정을 표현하고 있고, 2 부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적 국가적 혼란을 통해서 전통적인 꿈이 무너져 가는 좌절과 고통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꿈을 형성해 가는 세계로 이어지게 된다.
이어서 이 소설에 나타나는 표현상의 특색을 보면 각 장마다 내용의 예시(豫示)에 가까운 싯귀의 일부를 수록하고 있고, 문장 속에도 자신의 시를 비롯한 많은 시문 등을 인용하여 총 90여 편에 달하는 글이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소설의 내용을 보다 미적이고 문학적으로 형상화 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그의 정신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일종의 시 정신을 통해서 전통적인 동양의 정신세계와 정서를 표현하려는 작가적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에 있어서도 그렇디. <초당>보다 3년 전에 발표된 유일한의 문장이 전체적으로 감정의 표현까지도 조금은 딱딱한 문어체의 형태가 많고,, 비교적 장문이 많은데 비해, <초당>의 문장은 비교적 간략하고 유연한 편이고, 문장의 흐름이 시적이고 부드러운 것이 특색이다. 유 일한이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그의 집필에 도움이 되었을 그의 부인 매리 여사는 미국 출생 중국계 아메리칸 이지만 그녀는 의학을 공부한 소아과 의사이다. 이에 비해 강용흘은 어려서부터 시인의 집안에서 자란 시인이고 정식으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또한 그의 집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그의 부인도 영문학을 공부한 문학자이고 보면, 문장이 유일한의 영어 문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란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웨이드는 “그의 문장은 힘이 있고 시적이나, 오류와 자연스럽지 않은 외국어 문체 같은 냄새가 난다” 는 표현도 있지만, 이는 표현 내용이 외국의 것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강용흘은 한국말에는 크게 불편이 없으나, 영어 발음은 좋지 않았고 그는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의 문장만은 서정감이 넘치는 표현 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그의 문장에 대해 일찍이 엘리스 M 샤퍼는 “그의 문장은 다분히 시적이며 암유적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초당>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고찰이다. 우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 청파 (Han Chungpa)는 작가 강 용흘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상장적 표현이다. 우선 한 청파에서의 한은 그의 성(姓)과는 전혀 다른 성이고, 이를 택한 이유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흠모해 마지않는 한용운의 성에서 따온 듯 하다.” 고 김욱동 교수는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확인 할 길이 없고 일찍이 유 일한이 그의 마지막 이름을 형(馨.)에서 ‘한’ (韓 )으로 고쳤던 것처럼, 한국을 나타내는 가장 크고 으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던 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또한 청파에 대한 설명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달라, 유영(柳玲 )은 ‘靑坡’’ (푸른 언덕)로, 일레인 김은 ‘靑波’(푸른 물결)로, 김욱동은 ‘靑岥 (푸른 산)로 각기 다르게 보는데, 이는 원문에 분명히 ‘Han -Chung -Pa (Green Mountain)’ 란 설명이 쓰여있기 때문에 靑岥 (푸른 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한 청파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고, 그를 통해서 그가 살아왔던 파란만장의 젊은 날의 삶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처럼 그가 본명을 피한 가명을 사용한 점은 김욱동 교수의 설명처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실명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많은 역사적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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