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길(장편소설)

2004.07.30 04:20

박경숙 조회 수:960



박경숙[-g-alstjstkfkd-j-]장편소설 『구부러진 길』서문

  박경숙
  

                       -그 잿빛 터널을 통과하며-

태어나서부터 거의 반생의 세월을 고국 땅에 살면서 행여 한 번이라도 탈출을
꿈꾸었던가. 나는 거기서 살다 묻히리라 생각했다.

운명은 예고되지 않은 데서 바뀌고, 뜻하지 않은 이민을 결심하고 떠나오던 그 4월,
새 땅에선 기상천외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비극의 장이 잘 체감되지 않던 것은
겨우 이민 27일된 국제미아의 아둔한 방향감각 때문이었는지
도 모르겠다.

이듬해 어찌어찌 둥지를 튼 백인동네에선 산불이 일어났고, 한 해 뒤엔 지독한
지진을 맛보았다. 낯선 땅이 낯설게도 나의 삶을 흔들어대는 동안 나는 이상하
게도 젊은 날 묻어두었던 소설쓰기의 감각을 찾아내었다. 그 되돌아가기의 고
통, 그러나 그것은 지병처럼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세상은 시끄러웠고 이국땅에 펼쳐진 나의 삶도 잿빛 터
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회색의 시간들을 견디며 내 안에서 풀려나온 생각들
은 여자와 남자를 지어내고 그들의 삶을 그려내었다. 그러니까 소설은 내 삶의
반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나의 감성은 인물들 안에서 굴절되었고, 그들은 소설 속에서 전혀 생각지 않은
삶을 살아갔다. 시작은 분명 내가 했지만 끌고나가는 힘은 내 밖의 힘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속에 한 편의 장편소설이 완성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삶의
터널 안에 있었다. 이것을 끝내고 나면 터널은 끝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손끝에 쥐어진 한 장의 디스켓은 그 시간 속 내 울분의 토사물일 뿐이었다.
그것을 손에 들고 초조하게 서성이던 지난 4년의 세월 동안 마음에서 넘실대던
것들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는 땅처럼 낮아진 내 마음에 대고 고요
히 타일러 본다. 이것은 그 때 그 시간, 나만이 할 수 있던 작업이었다고.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이제 비끗 뚜껑을 열어 내 회색의 작업을 여기 쏟아 부으며 깨닫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조금은 잿빛이란 것을.

그것이 나만의 회색터널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남은 내 삶 앞에는 아직도 많은 잿빛의 터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완전한 암흑의 터널이 아니었던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를.

언젠가 내 인생의 완전한 어둠을 만나기까지 나는 회색의 길고 짧은 터널을
지나며 또 소설을 쓰게 될 것이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소설작업이 더 깊은
고통은 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삶의 고통엔 향기가 없지만 소설쓰기의 고통엔 향기로움이 어려 있다.
그것에 매료된 나의 소설중독증은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내 존재가 투명해질 때까지.  

                              200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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