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잊힌 묘지를 찾아
2024.05.22 19:50
앞줄 왼쪽부터, 알리 에사시 연방의원, 권태한 부총영사, 김수영 목사, 도나 켄스필드 전 온타리오 자연자원부장관, 김명숙. 김연수 전 평통 회장 부부, 뒷줄 중앙에 김만홍 목사와 딘 스코필드
65년 잊힌 묘지를 찾아
김수영
고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와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토론토 농장에서 알 수없는 피 흘리는 병이 소에게 만연하여 수없는 소가 죽어가도 아무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스코필드 박사는 연구에 몰두하여 원인을 발견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수의학자가 되었다. 독일에서 영국에서 미국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박사학위를 세 번이나 받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수의학자뿐 아니라 세균학자이며 병리학자였다.
캐나다에서 모든 명예를 갖고 있던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에서 평생을 대우받으며 후배들을 양성하고 자기 전문 분야에 매진하며 일생을 편안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선배로 한국의 세브란스 대학 교수로 있던 에비슨 박사의 초청에 응해 세브란스 대학의 세균학 교수로 부임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그는 갓 결혼한 아내 앨리스 스코필드 여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스코필드 여사는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피아노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스코필드 박사 부부는 한국에서 3.1 독립운동을 목격하게 되었고 제암리 교회 방화 사건 (교인 29명 불에 타 사망)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일본 군인과 경찰이 독립운동 가담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내용을 영어신문으로 제작해 세계 각국에 전한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다.
일본 경찰은 외국인이 목숨 걸고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암살을 시도했다. 마침, 그날 스코필드 박사는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약한 아내 앨리스 스코필드 여사는 이 엄청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결국 스코필드 박사는 아내와 함께 1921년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 스코필드 박사는 최선을 다해 아내의 병 간호를 했다. 하지만 아내 엘리스 스코필드 여사는 1959년 고인이 됐다. 그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을 다시 찾아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많은 고아를 돌봤다. 그러다보니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아내 스코필드 여사의 묘소에는 묘비하나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스코필드 박사의 손자인 딘 스코필드가 묘비가 없는 할머니 묘소를 찾아내었다. 올해 스코필드 재단(Schofield Foundation)을 설립한 김만홍 목사님이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묘비를 만들어 설치했다. 그리고 지난 5월 11일에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초청으로 제막식에서 영어 추모사를 했다. 내게는 생전의 스코필드 박사 를 만났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만난 사람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후손들 조차 책이나 전기나 역사 기록을 통해 그를 알 뿐이었다. 살아생전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추모사를 시작하자 모두 눈물을 글썽이었다.
내가 한 영으로 쓴 책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을 20여 권 갖고 가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온타리오 주 조성준 시니어 복지부 장관도 행사에 참석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조 장관은 이튿날 나를 조찬에 초청했고 나는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후 조 장관은 두 번이나 전화로 책을 완독했다며 나를 만나러 미국에 한 번 오시겠다고 해 무척 기뻤다.
스코필드 박사 부부도 하늘나라에서 매우 기뻐하리라 믿는다.
아래에 나의 영어 연설문이다.
Ladies and Gentlemen,
It brings me great pleasure to see all of you gathered here today.
We are assembled to commemorate the placement of the late Mrs. Schofield's grave-marker and epitaph.
I extend my heartfelt thanks to Rev. David Kim who is president of Schofield Foundation in Canada and invited me to the unveiling ceremony for grave-marker placement of Mrs. Schofield who was buried in this graveyard.
I came from Los Angeles in California. I am an immigrant from Korea. When I was in Korea, I met Dr. Schofield 66 years ago. He was one of the greatest men hom I have ever met. He is my unforgettable Uncle Frank. He had an incredible beauty in his mind, heart, soul and spirit.I came here to celebrate the unveiling ceremony for late Mrs. Schofield. My heart was full of deep emotion thinking of Dr. Schofield. I feel sympathetic with her deeply.
Although I never had the opportunity to meet her, it is evident that she endured illness throughout her life. My heart goes out to her, understanding the depth of her love for Dr. Schofield. Indeed, she accompanied Dr. Schofield to Korea as a medical missionary, demonstrating her unwavering commitment to their shared mission for Christ.
I pay tribute to the remarkable lives of both her and Dr. Schofield as I captured the essence of their dedication to their mission and their impact on the lives of the Korean people, particularly during challenging times.
During their time in Korea, the nation was under Japanese occupation, enduring severe oppression and economic devastation. Mrs. Schofield must have faced immense challenges given this historical context. Her resilience and dedication to the mission are truly commendable, and I sympathize with her struggles as a woman in such trying circumstances.
I deeply admire Mrs. Schofield's perseverance and self-sacrifice for the cause of Christ. Despite the challenges she faced, she played a crucial role alongside Dr. Schofield in advancing their mission and supporting Korean independence efforts.
I extend my heartfelt gratitude for her contributions, and I am honored to be present for this ceremony. Furthermore, it is a joy to see Dr. Schofield's grandchildren here today. You must be immensely proud of your grandparents, whose remarkable lives continue to be celebrated and revered by the Korean people.
Allow me to share a few memories of Dr. Schofield as I knew him. I first met him in 1958 at the Foreign Teacher's House within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Medical School compound. Despite his physical limitations, he exuded warmth and kindness. Over time, our bond grew stronger, and he affectionately referred to himself as my uncle, a sentiment that filled me with joy.
Dr. Schofield not only taught me the Bible but also instilled in me a deep faith in Jesus Christ. His commitment to helping the less fortunate was evident through his tireless efforts to secure scholarships for underprivileged Korean students and orphans. His compassion touched me deeply, especially in the aftermath of the Korean War, when many were in dire need of support.
Thanks to Dr. Schofield's advocacy, countless students were able to pursue their education and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South Korea. His impact on the nation's progress and democracy is immeasurable, reflecting his unwavering dedication to justice and righteousness.
Dr. Schofield's character was truly remarkable—a beacon of love and compassion and hope for the Korean people. His gestures of kindness, such as sending postcards from his travels and presenting me with dried Edelweiss flowers, are cherished memories that I hold dear to this day.
I offer my utmost respect, admiration and reverence to Dr. and Mrs. Schofield. Presence of Dr. Schofield’s grandchildren emphasize the importance of passing down their story and values to future generations.
May their legacy continue to inspire and bless us all.
In conclusion, I would like to share my testimony about Jesus Christ. Before I met Dr. Schofield, I was a Buddhist, as was my mother.
Upon meeting Dr. Schofield and participating in Bible study with him, I embraced Christianity. Since then, I have shared the Gospel with my mother and my entire family, and they have accepted Jesus Christ as their savior.
In Him, you will find abundant life and eternal salvation.
God bless each and every one of you!
캐나다 주재 권태한 부총영사와 김만홍 목사와 딸과 손녀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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