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
김태수
카톡이 울렸다. 윤규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보름 전쯤에 어머니 안부를 묻길래 요양병원에 계시니 그날이 그날이겠지 했더니, 여름 방학이 곧 시작되면 요양병원에 들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는 이젠 방학만 되면 연례행사로 여름엔 수박과 참외 등을, 겨울엔 귤과 오렌지 등의 과일을 사 들고 요양병원을 찾곤 한다. 지나 번에는 어머니 침대를 포함하여 열두 분이 함께 생활하시는 2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더니 이번엔 새로 옮긴 6명이 생활하는 곳을 보여준다. 유난히도 무덥다던 여름 하루를 수박과 참외를 나눠 드시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인다. 올해는 꼭 찾아뵈어야지 하면서 벼르다가 5년이 훌쩍 지났는데....... 나를 대신한 친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올해 90세이신 한국의 어머니는 혼자 실버타운에 사시다가 3년 전에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나는 항공기 승무원이 되어, 외국으로만 나다니다가 미국에 이민을 왔다. 형님네가, 모시려 해도 혼자 사는 게 서로 편한 거라고 거절하셔서, 밑반찬, 빨랫감, 청소 등을 보살펴드렸었다. 그러다 형님이 5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형수님은 형님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형님이 입원한 병원을 한동안 찾지 않으셨다. 형님이 움직이지 못해도 죄스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며, 또 의식이 깨어나서 당신을 보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 것이며, 당신도 그런 아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어,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기 전에도 한국의 어머니는 전화를 걸 때마다 건강부터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선 당신께선 넘어져 허리와 팔목, 다리를 다치셔서 병원 신세를 여러 날씩 지곤 하셨다. 당신이 골절상을 입어 고생하실 때는 내색 한마디 안 하신다. 나중에 형수나 친척으로부터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면, 늙어서 뼈가 부실해서 그런 거니까 별거 아니라고 하신다. 오히려 조심하지 못해 사고를 당해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고 미안해하시며 당신 탓으로 돌리시곤 했다. 이제는 돌봄이와 간병인이 있는 요양병원에 계셔서 그나마 한 시름 놓인다.
2년 전의 일이다.
“엄마, 나 이번에 문학 공모전에 상 탔어! 잘했지?”
“엄마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아?” 하고 전화로 말씀드렸더니 시큰 둥 하신다. 별로 기쁜 내색도 안 하시고는 별말씀이 없으시다.
“엄마, 이번에 또 상 탔다고. 이번엔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재외 한인 동포들이 겨루는 국제공모전이라니까. 내가 꼭 받고 싶었던 상이란 말이야.”
“게다가 다른 곳에서 또 하나 받았어. 안 될 때는 죽어도 안 되더니만 되려고 하니까는 한꺼번에 두 군데나 됐다니까. 상복이 터진 모양이여.”하고 좋아하면서 어리광을 좀 부려본다.
그때서야 “그려 잘 혔는디, 너무 글 쓴다고 신경 쓰지 말어. 잠도 잘 못잠시롱 얼마나 그 상 타보려고 고생혔겄어. 상 타는게 어디 그리 싑다냐? 건강 헤쳐감시롱 상타봐야 하나도 안 방가운게 늬 건강부터 챙겨잉.”하며 자식 건강부터 걱정하신다.
이민 온 지 30년이 다 돼간다. 아이들 대학 졸업시키고 나면 좀 숨통이 트여 자주 어머니한데 갈 것으로 여겼는데 뵌 지가 5년째다. 찾아 뵐 때까지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뭣 하러 와, 거기서 느그나 잘 살믄 됐지. 나는 암시롱토 않응게 엄마 걱정 허들 말어, 밥 걱정, 반찬 걱정 안 혀도 되고 아프면 약주고 치료도 해중게로 괜찮혀. 이렇게 가끔 전화로 목소리 들으면 됐어” 하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6.25 전쟁 중 헤어져 있다가 아버지가 딴 집 살림을 차리자 어머니 혼자서 형과 나를 갖은 고생을 하시며 키우셨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고등학교 때이다. 우리 집의 비극은 우리 민족의 비극에서 연유된 거로 생각하면서부터이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경찰 아들 둔 죄로 빨치산에 끌려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어머니도 혼자 고생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계속해서 못된 짓도 서슴지 않는 불량 청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였을 법한데 어머니는 경찰 공무원 정년퇴직하시고 힘이 없으신 아버지께 용돈이라도 자주 드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용돈을 드릴 때면 잘 받지 않으셨다. 어쩌다 받으시면서도 미안해하셨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온 후 얼마 있다가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사랑까지 주시려고 어머니는 나를 더 챙기셨다. 생선찌개나 구이를 먹을 때면 어머니는 늘 머리 부분을 차지하셨다. “엄마 이것 좀 먹어봐, 맛있어” 하고 통통한 가운데 부분을 내밀면, “아녀, 늬나 맛있는 살 많이 먹어잉. 어두육미라고 요 대가리 부분은 깨물수록 고소한 맛이 난당게. 넌 아직 어려서 그 맛을 잘 모를 거여.” 라고 하셨었다.
생선을 먹을 때면 어머니의 어두육미 말씀이 떠올라 아들딸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곤 한다. 아빠는 정말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고. 자식을 키워보니 알겠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잘 한다 해도 부모의 자식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부모 마음 상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도 때로는 효가 된다는 것을.
어머니와 떨어져 외국에서만 보냈으니, 얼마 동안 나의 노후 일부를 어머니와 함께하려 한다. 아버지 사랑까지 더해서 받은 어머니의 사랑을,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마저 더해서 어머니에게 되돌려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안부1/ 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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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아들의 상황이지만 내가 겪지 못한 정경이며 나에겐 ‘로망’이기도 했다. 그만큼 알뜰살뜰 생의 밥그릇을 빡빡 긁어 다 드시고 가시길 소망했다. 만약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밥숟가락을 스스로 들지 못하는 지경이면 입을 아 벌리라 하고선 밥을 떠다 먹일 생각이었고, 똥 싼 옷도 잘 빨아 말려서 개켜둘 것이라 단단히 각오했건만 어머니는 내게 그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진작부터 혼자 은밀하게 그린 추상화 같은 바람이었으나 예기치 않게 졸지에 쓰러져 백일 만에 가셨으니 허망하고 억울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그 상황이 닥치면 어찌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야 어머니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앙갚음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햇빛 가득히 눈부시게 쏟아지는 어느 봄날,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서 공원나들이를 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그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셈인데, 어쩌면 어머니 생각에 도무지 가망 없는 노릇이고 실컷 구박이나 받다가 쓸쓸히 눈을 감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서둘러 가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에 이르면 생전 어머니께 저질렀던 온갖 불효들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곤 했다. 지금껏 그 여한은 문득문득 나를 오금 저리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 방문부터 열어보는 것까지는 이 시와 다를 바 없는 습관이었으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보다는 당연히 멀쩡한 어머니의 말간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는’ 대목에서 눈물이 찔끔 흐르면서 저 수발이 부럽기조차 했다. 저와 같은 ‘효’를 못해본 게 못내 뼈아프고 억울해서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일관된 불효자였던 나를 스스로 기만하는 위선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번 양보해서 소박한 효심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혼자 치매 앓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의를 다해 친절하고 상냥하게 돌봐드릴 수 있을까. 초등 4학년 때인가 어느 날 아침 열이 펄펄 끊던 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시던 그 자애로운 손길일 수 있을까.
한없이 베풀고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의 그 마음과 어찌 견줄 수 있으랴. 치매 걸린 어머니를 껴안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고 토로하는 자식들도 적지 않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참아내는 자식들이 대부분이지만 진짜로 자기 부모를 창밖으로 떠밀어버리는 호로 새끼들도 있다. 노부모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자연의 부름 때문만은 아니다. 자식들이 떠밀어내기 때문에 서둘러 하직하는 경우도 많다. 물 타기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고 낳아 길러준 부모에게 마지막 인간의 예를 다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수두룩하다. 노인 요양기관이 있지만 노년의 삶은 노인요양보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치매는 노년이 기이하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멈추는 지점이다. 치매라는 경계 이후의 삶에는 이름도 인격도 없다. 그냥 치매에 걸린 거추장스러운 노인일 따름이다. 경계너머의 치매환자들은 이쪽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암묵적인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 불과하다.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인지 능력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등 생리적 신체 행위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치매환자를 사랑환자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듯이 치매는 둘레의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꼬마 계집아이’로 환원하여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함부로 말하지 말자.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