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오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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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엄마한테 가자

2022.05.06 13:24

강창오 조회 수:123

“엄마한테 가자”

   어느 날, 둘째누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느닷없이 던진 말이었다. 만 2살 반 정도였던 어린 나에게 선뜻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의 품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너무 어린 탓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막연하게 나마 당시 이역만리(?) 어딘가에 엄마가 있다는 동경이 가물가물한 꿈나라 처럼 마음속에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6.25 동란 중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 왔던 우리 가족은 휴전이 된지 얼마 후 아버지 직장을 따라 다시 움직여야 할 과도기에 처했다. 엄마가 하시던 장사 때문에 부모님은 일시적으로나마 식구를 나누기로 결정하셨고 당시 6형제 중 영리하고 재빠른 둘째누나와, 셋째누나 그리고 내가 아버지를 따라 먼저 올라갔다. 그 당시엔 어리기도 했지만 어디 간다는 기분으로 지체없이 따라나섰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우리는 아버지 회사와 가까운 어느 집 전세방에 들어 분가의 살림을 시작했다. 나보다 8살 위인 국민학교 5학년 둘째누나는 매일 학교를 다니면서도 밤낮으로 밥짓고 빨래하고 집안 생활을 도맡았다. 세살 아래인 셋째누나는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과격한 성격에 한량(?) 같은 기질이어서 그런지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출근하신 이후 나를 돌보아야 할 셋째누나는 어린 내가 혼자 있을 때 툭하면 별다른 이유없이 성질을 내며 물리적인 체벌을 가했다.

   그 당시에는 셋째누나가 너무 무서워 늘 공포에 질려 있었고 둘이만 남아있을때는 혼비백산 할 정도였다. 그나마 누나는 혼자서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나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편했다.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시며 주고 간 1환 (원)이 나의 점심값이었고 점심때든 아니든 우물옆 구멍가게로 쪼르르 달려가 무언가 사서 점심으로 때우곤 했다. 하지만 온 종일 혼자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가끔 길가의 음식을 줏어 먹기도 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아챈 누나들에게 혼나기가 일쑤였고 특히 셋째누나의 혹한 매는 피할 수 없었다. 주인집에는 발을 절름거리는 나와 동갑인 아들 (이조ㅇ)이 있었고 또 우리 옆집에도 내 또래의 아이들(송연ㅅ, 송남ㅅ)이 있어 같이 놀곤 했다. 그 아이들은 혼자 있는 나를 자주 놀리곤 했는데 특히 조ㅇ이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쩔뚝발이야” 하고 맞받아쳐 조ㅇ이 엄마한테 자주 야단맞곤 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모든 정치, 경제, 사회적 질서가 거이 바닥에 내려앉은 상태였기에 일단 생계유지가 우선이었음은 말할것도 없다. 하지만 형편상 가족을 일단 나눌 수밖에 없는 처지 였다고 해도 어떻게 어린 나를 누나들과 함께 그 먼 곳에 보냈는지 부모님의 마음이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나아가서 어린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내 자신을 babysitting 했다는 사실이 또한 도저히 믿기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둘째누님으로 부터 들은 얘기는 자신은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만 되면 늘 학교주위를 뛰면서 배고픔을 이겨냈다고 한다. 나도 같은 환경 속에서 고생은 했지만 일단 철이 없었기에 그냥 뭘 모르고 지난 정도였다. 하지만 집안 일을 거머쥐고 챙겨 나가는 누나가 그 정도로 배가 고팠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었을때 새삼스럽게 찡한 아픔이 마음을 가로질렀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점심 굶는 학생들에게 사각 강냉이 빵으로 급식을 했건만 전쟁 바로 이후에는 그런 제도가 미처 마련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활력이 강한 둘째누나는 그 때 이후로도 우리가 다 자랄때까지 갖가지 굳은 일을 하며 우리집 살림을 보탰고 이모저모로 어린 우리의 배고픔을 덜어주었다.

   작은 아버지 댁이 근처에 있어 가끔 가기는 했어도 워낙 모두들 살기 어려운 형편들이라 그런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한것 같다. 한가지는 작은 집에 갈 때마다 항상 책상에 놓인 동그란 야광 탁상시계가 눈길을 끌었다. 초록색 야광 바늘이 밑에 깔린 초록색 줄무늬 위를 째깍거리며 지나가는것이 상당히 신기해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우연히 매사추세츠의 어느 시계 상점에 들어갔다. 믿을수 없게도 똑 같은 시계 하나가 째깍거리며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보는 순간 거이 뒤로 넘어질 정도로 반가웠고 또한 그 토록 오랜 시간 후 미국 땅에서 같은 시계를 대하는것이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졌다. 아울러 기억되는 당시의 나의 어린시절이 신기루가 아니라 실제였음을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이 흘러가던 세월속에 어느 날 갑자기 둘째 누나가 “엄마한테 가자”고 한 말은 구원의 소리였고 그때까지 아련하게만 기억됐던 엄마에게 실제로 갈 수 있다는 환상의 소리였다. 누나손을 잡은 채 무조건 집을 나섰고 기차역(경인선) 에 다다랐다. 일단 간다고는 했지만 보장없는 아슬아슬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기차표 값은 둘째 치고 주머니에 1전 한 푼 없는 누나는 나보고 앞에가는 아저씨 옆에 붙어 따라 들어가라고 해놓고 기차역 철조망을 뚫고 들어와 바로 나를 찾았다.

   일단 영등포역에서 내려 여기저기 돌아서 다른 기차(경부선)로 갈아탔다. 그 때 누나가 나에게 명심시켜 주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차표 검사원 오면 화장실에 숨었다 나올테니까 여기 꼼짝말고 있어” 하는 당부였다. 아닌게 아니라 누나가 없어지면 곧 차표 검사원이 눈에 띄었다. 그럴때마다 나를 따로 놓아두고 혼자 숨어야하는 누나가 얼마나 가슴조이며 애가 탔을까? 열댓시간의 증기기차여행이 바늘방석 같았으리라 가히 짐작해본다.

   대구역에 내린게 그 다음날 캄캄한 새벽이었고 1시간쯤 길을 걸어서 늘 작은엄마라고 부르던 친척집에 도달했다. 그 때 엄마한테 간다는 기쁨속에 느꼈던 싸한 새벽공기는 지금도 가끔 콧속에서 맴돌 뿐만 아니라 같은 공기 내음을 맡을 때 마다 움칫 그 옛날이 생각나곤 한다. 조바심에 행여나 하고 문을 두드리니 눈에 익은 작은엄마의 모습이 나타났고 우리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아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엄습했고 다시 눈을 떴을때는 이미 엄마집에 와 있었다.

   며칠 있다가 아버지가 내려오셨다. 통신 수단이 거이 없었던 때라 아이 둘이 없어진 것을 알고 성급히 내려오신 것이었다. 엄마는 우리보고 아버지를 따라 다시 가라고 했지만 나는 몸부림치며 울고불고 무조건 안가겠다고 저항했고 둘째 누님 역시도 처음엔 안가겠다고 저항했다. 엄마는, 조금 있다가 나머지 식구도 다 올라갈테니까 조금만 더 참고 가라고해서 누나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아버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후, 엄마 말씀처럼, 얼마 안 있어 나머지 식구도 다시 경부선 열차에 올랐는데 지난번 둘째 누나와 같이 내려올 때와는 대조적으로 참으로 행복한 기차여행이었다.

   떠나오기 바로 전에 지금도 아스라히 기억되는 일이있다. 어느날 대통령이 우리 동네를 지나간다고 하니까 우리집 근처 신암동 다리 주변에 사람들로 꽉찼다. 그 당시 나와 친했던 어느 여자아이와 손을 잡고 환호하는 사람들 틈으로 대통령의 행렬을 지켜보며 그 여자아이에게 “우리 이사간다”고 했다. 그 여자아이는 고개를 떨구며 “가지마” 한 마디를 뱉은 뒤 막 뛰어서 행렬속으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이 나를 보더니 느닷없이 한 마디 했다. “너도 대통령처럼 귀가 크구나. 나중에 대통령되겠다”. 무슨 말인지 확실히 귀에 안 들어왔어도 지금 거리를 지나가는 대통령을 빗대어 하는 말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좀 더 이야기를 넓히자면, 앞서 말했듯이 주인집 아들 이조ㅇ은 당시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우리 가족이 다 합류한 뒤 얼마 안 있어  조ㅇ이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 이후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어쩌다 길가에서 멀리 한 두번 보기는 했는데 군훈련소에 입소하니 조ㅇ이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일단 반가운 마음에 너 “조ㅇ이구나” 하고 먼저 아는 체를 했더니 그는 나를 아주 생소해하며 “너 내이름을 어떻게 아니?” 하고 되물었다.

   대충 옛날 일을 얘기했지만 전혀 기억을 못했고 혹시나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다는 투였다. 아울러 나의 의구심이 발동해 “너는 그 당시 다리를 절었는데 어떻게 군대에 왔니?” 하고 물었다.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나 어릴때 다리를 잠깐 절었는데 곧 나았어. 근데 그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하며 의아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무튼 훈련소를 마치고 부서는 달랐지만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3년을 함께 생활하게 된 이상한 인연이었다.

   옆집 아이들 송연ㅅ, 송남ㅅ은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역시 우연히 멀리서 몇 번 정도 본적이 있다. 10여년 전 내가 한국에 온 것을 안 친구하나가 국민학교 동창회에 데리고 갔다. 700 여명의 같은 학년중 고작 10댓명이 어떤 노래방 코너에 앉아 있었고 다가서자 마자 각 자 자기 반 과 이름을 소개했다. 그 중 하나가 “나 몇 반 송연ㅅ이야” 하지 않는가? 나는 놀라움과 함께 대번에 알아 차리고는 “너  어디어디서 이조ㅇ 옆집에 살았었지? 하고 물었다. 쌍동이 남동생 남ㅅ이 하구. 나는 그 당시 이조ㅇ이네 집에서 전세 살았었는데” 했지만 그녀는 대번에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그녀가 기억을 못해서 약간 실망감이 들어 이내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 놀라는 표정으로 내 팔을 덥석 잡으며 “너 누나 둘하구 살던 애구나? 우리가 자주 놀리곤 했는데” 하지 않는가! 이어서 그녀는 조ㅇ이는 아는데 이조ㅇ이라구해서 생소했고 자기도 그 동네에 잠깐 살다 이사를 가서 그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단다. 그러면서 남ㅅ이는 동갑이지만 동생이 아니고 조카라고 했다. 아무튼 오래 살다보니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사람을 다시 만날수 있다는 현실이 또 한 번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세상이 좁다고 하는가 보다.

•    믿지 못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이 글의 95% 이상은 저 혼자의 기억으로 쓴 것이고 저의 둘째 누님이 “너는 당시 애기였는데 어떻게 이걸 다 기억하느냐”고 의아해 하면서 확인해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