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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훌쩍 새
2011.02.02 15:05

훌쩍 새 / 박봉진
청보라 꽃나무(Blue Potato bush) 곁을 내리서면 뒤뜰은 내 마음처럼 텅 빈다. 이내 차오르는 허전함에 온 몸이 잠긴다.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고 했나. 그런 삶의 무늬에 얼룩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 ‘바이칼호수 같은 그윽한 눈’ 그 정인의 눈에 흠뻑 빠진 사람은 거기서 헤어나기 힘들다는 말의 재현일까. 하기야 그 호수는 세계에서 제일 깊은 담수호이니 그럴게다. 내 취약한 그 부분을 힘들게 해놓고 떠난 훌쩍 새, 서로에게 길들여진 부재의 그리움과 혹시나 하는 기다림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데 너는 어떠니.
나는 네 마음을 좀은 알듯 했는데 실은 넘겨짚은 것뿐. 네 실명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해 화창한 봄 날, 푸른 하늘배경으로 훨훨 날아든 인연이니 그냥 Blue Caller라고 했었지. 너무 외지거나 노출장소는 위험하다고 쪽문 곁 둥그런 나무속에 둥지를 틀고 드나든 나날이 얼만가. 두 날개로 껴안듯 맴돌곤 하던 하늘 꽃, 나비 꽃과의 밀어는 지워지지 않을 동영상 아냐. 내 빈 둥지 안에 남긴 네 빈 둥지는 더 크더라. 그래 마음 가라앉히기 힘들었어. 하지만 네 자유의사가 더 소중해. 태연한척 속 알이 내색 않으려 네 이름을 훌쩍 새라 불렀지.
어떤 만남도 마음 문을 열고 첫정들이기란 쉽지 않지. 뭣 모르고 수북이 웃자란 새순들을 가위질하다 청보라 꽃나무 촘촘한 잔가지 안에서 푸덕 날라 오른 너를 보고 우리 지난날을 되돌아보았어. 첫 만남부터 오랜 지기처럼 나는 좋았는데 너는 경계를 풀지 않고 내 행동반경 바깥에 앉고서야 초롱초롱 눈 맞춤 해주었지. 나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한계를 지켰는데, 점차 마음 빗장을 열게 되어 팔 뻗으면 닿을 거리로 익숙해졌잖아? 그 지근(至近) 거리에서 내가 잔손질을 해도 너는 조금 옮겨 앉아주는 묵계로 우리는 상통했어.
아이들이 성가해 모두 떠나버린 우리 집 빈 둥지. 우렁이껍질 같은 마음이었을 그 때야. 남들처럼 풀어내 보일 아기자기한 추억 보따리도 별로인 내겐, 한 공간에서 연인으로 사귀게 된 네 바라보기는 내 지난날의 보상인 듯싶었어. 너 또한 아침 해 뜰 때나 저무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서로를 확인하는 그 의례를 거르지 않았어. 꽃나무들과 울타리, 차고지붕을 옮겨 앉으며 귀여운 재롱. 그리고 이심전심 교감의 방언을 재잘거렸었잖아. 네 외출 때, 손끝으로 어루만져 본 그 사랑의 결실, 어린 것 두 마리. 부듯한 너만의 감희였겠나.
그날, 어스름 해질녘. 얼룩덜룩 섬뜩해 뵈는 새 매가 네 집에 들어가려할 순간 나는 황급히 막대를 집어 나무 밑둥치를 후렸다. 어디선가 너는 새 매를 향해 내리꽂으며 비명을 질러댔어. 마치 전투기조종사가 적기의 꽁무니 쪽을 잡아 격추시키려 듯이. 마수는 맞서면 물러가지만, 허술한 쪽을 노림으로 뒤를 뵈어주지 말라지 않았나. 귀한 인연은 은혤 듯싶었는데 이렇다 할 정 떼기 수순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나. 그래 그간의 정이 아쉬워서 하는 말이지 원망은 않는다.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문둥이 중 하나처럼 나 또한 훌쩍 새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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