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열쇠 / 오탁번

2008.07.25 00:11

이기윤 조회 수:1544 추천:73

"열쇠" / 오탁번


미아리 삼양동 산비탈에서
삭월 셋방에 살던 신혼시절
주인여자는 대문으로 출입하고
내 가난한 아내는
담벼락에 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쪽문을 열고 부엌을 지나
대여섯 평 좁은 방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며 살았다
뚱뚱한 주인여자의
짜랑짜랑하는 열쇠소리에 주눅이 들어
사랑을 나눌 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몇 년 후 장위동에다
전세방 끼고 대출 받아서
스무 평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와 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열쇠고리에 달린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방 열쇠를 보면서
아내는 함박웃음을 웃었다
열쇠고리를 짜랑짜랑 흔들며
당당하게 대문을 따고
우리집을 맘 놓고 드나들었다

열쇠가 늘어날수록
아내의 허리도 굵어지고
아들 딸 낳아 살다가
10년 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 아니라
열쇠 꾸러미를 분양받은 것 같았다
현관 열쇠, 방 열쇠, 장롱 열쇠, 싱크대 열쇠
화장실 열쇠, 다용도실 열쇠, 장식장 열쇠
그것도 각각 네 개씩이나 되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받아든 아내는
열쇠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듯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열쇠도
세월 따라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제 아파트도 오피스텔도
디지털 키와 카드 키로 다 바뀌었다
제 집 문을 열 때는
열쇠를 구멍에 찔러 넣고
홱 돌려야 제 맛인데
손끝으로 번호를 톡톡 누르니까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같다
열쇠란 열쇠는
몽땅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이순의 저녁나절도 아득히 흘러간 오늘
아내의 방을 여는
사랑의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삭월 셋방 가난했던 그 시절엔
대문을 따는 열쇠는 없었지만
밤마다 사랑의 방을 여는
금빛 열쇠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문학사상> 2008. 5월호에 둥재된 시


* 오탁번 시인

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 현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창작집으로 「처형의 땅」 「새와 십자가」 「내가 만난 여신」 「절망과 기교」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등이 있고, 시집으로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등이 있으며, 저서로 「한국현대시사의 대외적 구조」 「현대시의 이해」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1
전체:
74,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