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오랜 사랑과 기억과 자존(自尊)의 시편들
제9회 해외풀꽃시인상 본심에 올라온 네 분 시인의 역작을 오래도록 읽었다. 미주시단에서 보여준 이러한 성과와 도약의 장면들은, 충남 공주에서 탄생한 풀꽃이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곳으로 퍼져가며 숲을 이루어가는 순간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치열한 예심 과정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그 형상화와 주제 의식에서 남다른 성취를 보인 가작들이었다. 그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오연희 시인의 작품 세계가 완결성과 진정성을 두루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여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오연희 시인의 작품은 기억의 깊이와 내면적 진정성을 가진 결실들이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상상과 조형의 능력을 회감(回感)의 언어에 실어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첫숨」은 “겨울 끝 햇살에 비친 투명한 자목련”의 “머나먼 시간을 돌아온 숨결”을 느낄 새도 없이 “개똥벌레의 반짝임 같은 불씨 하나”가 만들어낸,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거대한 산불을 소재로 하였다. ‘대피령’과 ‘헬기’를 동반하면서 숲은 무너졌고 작은 생명들은 사라졌다. 이제 봄비가 비가(悲歌)처럼 내려 “잊힌 것들을 적시며/말 없는 존재들의 기도”를 듣는다. 잿더미에서 다시 한 줄기 숨이 깃들어 그렇게 무너진 삶 위로 내려앉는다. 그 ‘첫숨’으로 소생하는 봄날의 비극과 희망을 균형감 있게 노래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발코니」는 “저녁이면 미동도 없이 굳어가는/바람의 자리”에서 발견한 “자존심을 내려놓은 자의/자존감”에 관한 노래이다. “물 없이도 버티는 선인장 몇 그루”처럼 은은하고 든든한 존재 방식에 대한 수용의 공간이 그곳이었던 셈이다. 「기억의 폐가에서」는 “기억이라는 폐가”에서 “말 못 한 감정들”을 발견하면서 “기억에 닿기도 전에/꽃잎처럼 사라져 버린 인연들”과 “꼬인 채 풀리지 못한 말들” 그리고 “건네지 못한 사과,/삼켜버린 말들”을 되살핀 시편이다. 마침내 “마른 바람 속에도 잊히지 않는 향기처럼/조용히 다가오는 사람”을 불러보는 시인의 마음속으로 “오늘을 단단하게, 더 깊이 살아가게 하는 인연”이 파고든다. 이 모든 인연들이야말로 지금도 “내 마음 한 칸을 환하게” 비추는 등대와도 같을 것이다. 「비 내리는 마야」는 “격동의 거친 파고 속에서/매몰되지 않고 살아남은/우리 언어, 우리 문화, 우리 사람들”을 다시 강조하면서 스스로에게도 그 중요성을 다짐하고 있는 시편이다. 이 모든 결실들이 바로 시인의 오랜 사랑과 기억과 스스로에 대한 자존(自尊)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수작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마다 고유한 경험을 자산으로 삼으면서 오랜 창작 시간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연희의 시편들을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외로운 이민 생활의 결과를 이렇게 미학적으로 잘 구성한 역량을 보여준 시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발전된 모국어의 진경을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나민애(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해외풀꽃문학상 시상식- 가디나문화센타-2025년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