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ck

독자놈들 길들이기/ 박남철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해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시집 '지상의 인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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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란 것이 벼룩이 간에서 부터 항공모함까지 소재가 안 되는 것이 없고, 그  형식의 다양함이 현대시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처음 이 시를 보고 '뭐 이런기 다있노'싶어 명색이 문학 동네를 기웃하는 나조차도 당혹스럽고 지나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를 어떤 고정관념의 틀 속에 단단히 묶어놓고 겉핥기로 감상했던 버릇이 남아있다는 반증의 다름 아니고 심각한 인식의 오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떤 시가 좋은 시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 물음에 대한 대꾸 이전에 시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 가치와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되물음이 필요할 테지만, 다 접어두고 좋은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좋은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틀을 과감히 부수고 나와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도 지금까지는 박남철 시인이 말한 길들여져질 독자 가운데 한사람은 아닐까 반성하며 자진해서 대가리를 박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기 힘들었던 관념의 틀이란 어떤 모양일까? 박남철 시인의 시에서 그 해답을 찾자면 먼저 시라고 하면 소월(물론 한국의 현대시 100년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임에는 틀림없지만)의 '진달래꽃'이나 윤동주의 '서시' 같은 시만 떠올리는 독자, 시에는 온통 사랑에 관한 시나 곱상한 서정시가 다 인줄 아는 독자, 시라고 하는 것은 적당히 행 구분이나 하고 줄이나 맞추면 되는 줄 아는 독자.


 더 나아가 좀 아는 채 하는 부류들 가운데 좋은 시는 알듯 모를 듯 애매한 상징과 은유로 코팅되고 그 코팅의 윤기가 반짝거릴수록 좋다고 믿는 독자, 그리고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이 바쁜 세상의 여가선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독자, 시에서 소시 적 낭만과 이상과 꿈 그리고 감상만을 기대하는 독자. 덧붙여 시 감상의 안목이 60년대 국어 교과서 수준에 묶인 독자 등을 모조리 싸잡아 구시대의 독자로, 길들임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보는데 조금 시를 안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조차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둘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인사가 꽤 되리라 본다.


 하지만 이러한 구시대적 독자의 성향 말고도 좋은 독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더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 부분은 문학적 테두리 안에서의 문제라기보다는 원초적 인간의 품성 또는 덕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이를테면 오로지 자기가 지향하는 형식의 시라야 온전한 시라는 철옹성의 믿음을 가진 독자. 서정과 자연에만 기대어 시를 이해하고 한정지으려는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 유명한 시인의 시 아닌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조건 폄하하려드는 사대적 습성의 독자, 시를 좋아하고 공부한답시고 문학의 본질은 외면하고 자기 기준의 모양이나 재고 권위를 내세우며 시기, 질투 등 비문학적, 비양심적 행위를 서슴치   않으며 허명만 좇는 독자 등도 넓게 보면 다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진정한 좋은 독자가 되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겠는데, 무엇보다 먼저 민주사회의 본질인 자유와 다양성 그리고 대화의 정신이 구비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박남철 시인의 시에서 풍자한 것처럼 군사문화의 토양에서는 그러한 정신을 꽃피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져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탈근대의 시대니 하는 말들과 함께 그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인터넷 상의 다양하고 개성 있는  글들이 주목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조류의 의미와 핵심은 시인과 독자로 상정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직적 상하 관계는 붕괴되고 수평적 대화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안과 밖, 위 아래로 구분되는 가치 차별적 이분법은 와해되고 누구도 중심일 수 없는 시대, 대화의 수평사회가 온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독자중심 비평이란 말도 나온 듯하고 독자는 수동적 수혜자나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라 시인에게도 어렵지 않게 말을 건네는 능동적 참여자이자 재구성적 생산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소설의 경우 확석영, 박범신 등이 인터넷을 통해 작품을 연재하고 독자들과 댓글을 주고받는 현상은 주목받을 만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고라'와 '광장'을 통한 정치참여 현상 또한 이러한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쓰는 것이 곧 읽는 것이고 읽는 것이 곧 쓰는 것이라는 명제도 대두되었다. 이런 판국이니 시인의 자세도 물론 바뀌어야겠지만 독자의 자세나 능력도 달라져야 마땅할 것이다


 박남철 시인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가 부디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좋은 독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를 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와 진정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 생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이렇듯 좋은 독자의 자격을 갖추는 일은 그만큼 시 감상의 폭이 넓어지고 그 깊이도 더해져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격 또한 갖추는 거라 보고 좋은 독자와 시인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훨씬 성숙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 또한 한결 고양될 것으로 믿으며 고양된 영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고 살맛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권순진 )



"https://www.youtube.com/embed/e7AHkOPLY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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