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듬나물에 대한 추억
며칠 전 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야채코너에 비듬나물이 있어 무심코 집어 들었다. 한국에서는 종종 비듬나물을 먹으며 초등학교 때의 내 단짝 생각을 하곤 했는데 미국에 온 후로는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비듬나물을 보니 내 어릴 적 짝지 생각과 함께 그 때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그 때도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입이 짧았던 나는 그 당시 내 기억에 그리 잘 살지는 않았으나 도시락 반찬은 할머니가 꽤 신경을 써 주셨던 것 같다.(남들이 보면 누나인 줄 알았던 엄마는 내 어렸을 때 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반도 안 먹고 남겨 오는 도시락을 보고 속상한 할머니는 “매일 장조림만 싸 주랴? 호강이 요강이라 배가 쫄쫄 굶어 봐야 반찬투정 안하지..”라고 푸념하였는데 나는 아랑곳도 없이 “맛없는 걸 어떡해” 하고 책가방을 휙 집어 던지고 쪼르르 동네 밖으로 나가 골목길에 위치한 요즘으로 말하면 불량식품인 뽑기 아저씨의 달고나 사탕을 사먹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도시락을 다 비우고 반찬 또한 깡그리 비우는 할머니의 입이 귀 밑에 까지 째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때 내 옆 자리는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비어 있었는데 하루는 한 아이가 전학을 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이 아이의 첫인상이 좋았던 것 같다. 우린 금방 친해졌는데 좀 이상한 것은 얘는 점심시간에 항상 같은 반찬만 싸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슨 계란후라이나 오뎅같은 것도 아니고 조그만 양은 벤또에 담은 무슨 나물 같은 거였다. 내가 그게 뭐냐고 물으니 비듬나물이라고 한다. 나는 그게 얼마나 맛있으면 같은 반찬을 계속 싸 올까 하고 생각하다가 하루는 그 얘에게 혹시 너 내 반찬이랑 바꿔 먹어 볼래? 하고 거절당할 지도 모르는 제안을 했더니 녀석이 의외로 흔쾌히 그러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금은 짭짤하고 조금은 매콤한 비듬나물이 내게는 묘하게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내 도시락의 밥과 반찬통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깨끗이 비워져 할머니를 기쁘게 했다.
학년이 바뀌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이 친구를 다시 생각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인가 영어 교과서에 실린 감자(potato)란 단편소설을 배울 때 인 것 같다. 그 소설의 내용은 매일 감자만 식탁에 오르는 한 가난한 가정에서 어린 주인공이 마침내 자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성장소설인 셈이다. 나는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매일 점심시간에 비듬나물만 반찬으로 싸 왔던 그 짝지가 가난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 버렸다. 그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그 퀭한 큰 눈에 녀석의 착한 모습이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
세월이 한 참 흘러 대학 일학년 때로 기억하는 데 여름 무더운 저녁 동네 당구장에서 아저씨랑 한게임 하고 있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다가와 혹시 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세요? 하고 물으니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을 대며 자신이 그 짝지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짝지를 알아보았으나 그 변해 버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행색이 남루한 것을 떠나서 그 순박한 큰 눈은 왠지 모를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는 듯이 보였으며 입가엔 천진스런 웃음기가 사라지고 뭔지 결의에 찬 모습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술 한 잔이 들어가니 짝지는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공사판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였고 가난으로 인해 대학도 못가는 이 사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너무도 변해 버린 이 짝지의 모습에 당황하였고 왠지 나랑은 너무도 멀어져버린 그에게 연민과 동시에 소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전화로 몇 번 연락을 한 것 같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그 후로 가끔 비듬나물을 먹을 때면 이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그나마도 미국에 온 후 십 몇 년 동안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 친구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오늘 뜻밖에 비듬나물을 보니 불현듯 이 친구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옥수수빵 배급받은 것을 우리 할머니가 좋아한다고 하자 이것도 갖다 주라고 내게 주던 이 순박한 짝지에서 “야! 나는 말이야 앞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고 살거야.”라고 마지막 만났을 때 절규하다시피 외쳤던 냉혈한으로 만들었던,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오늘은 오랜만에 비듬나물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그러나 내가 암만 요리를 잘 한다지만 도시락 반찬이라곤 집 앞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비듬나물만 뜯어 간장과 고추장에 버무리며 엄마의 눈물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들어간 그 절묘하고도 비장한 맛의 비듬나물을 내 어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야채코너에 비듬나물이 있어 무심코 집어 들었다. 한국에서는 종종 비듬나물을 먹으며 초등학교 때의 내 단짝 생각을 하곤 했는데 미국에 온 후로는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비듬나물을 보니 내 어릴 적 짝지 생각과 함께 그 때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그 때도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입이 짧았던 나는 그 당시 내 기억에 그리 잘 살지는 않았으나 도시락 반찬은 할머니가 꽤 신경을 써 주셨던 것 같다.(남들이 보면 누나인 줄 알았던 엄마는 내 어렸을 때 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반도 안 먹고 남겨 오는 도시락을 보고 속상한 할머니는 “매일 장조림만 싸 주랴? 호강이 요강이라 배가 쫄쫄 굶어 봐야 반찬투정 안하지..”라고 푸념하였는데 나는 아랑곳도 없이 “맛없는 걸 어떡해” 하고 책가방을 휙 집어 던지고 쪼르르 동네 밖으로 나가 골목길에 위치한 요즘으로 말하면 불량식품인 뽑기 아저씨의 달고나 사탕을 사먹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도시락을 다 비우고 반찬 또한 깡그리 비우는 할머니의 입이 귀 밑에 까지 째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때 내 옆 자리는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비어 있었는데 하루는 한 아이가 전학을 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이 아이의 첫인상이 좋았던 것 같다. 우린 금방 친해졌는데 좀 이상한 것은 얘는 점심시간에 항상 같은 반찬만 싸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슨 계란후라이나 오뎅같은 것도 아니고 조그만 양은 벤또에 담은 무슨 나물 같은 거였다. 내가 그게 뭐냐고 물으니 비듬나물이라고 한다. 나는 그게 얼마나 맛있으면 같은 반찬을 계속 싸 올까 하고 생각하다가 하루는 그 얘에게 혹시 너 내 반찬이랑 바꿔 먹어 볼래? 하고 거절당할 지도 모르는 제안을 했더니 녀석이 의외로 흔쾌히 그러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금은 짭짤하고 조금은 매콤한 비듬나물이 내게는 묘하게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내 도시락의 밥과 반찬통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깨끗이 비워져 할머니를 기쁘게 했다.
학년이 바뀌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이 친구를 다시 생각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인가 영어 교과서에 실린 감자(potato)란 단편소설을 배울 때 인 것 같다. 그 소설의 내용은 매일 감자만 식탁에 오르는 한 가난한 가정에서 어린 주인공이 마침내 자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성장소설인 셈이다. 나는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매일 점심시간에 비듬나물만 반찬으로 싸 왔던 그 짝지가 가난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 버렸다. 그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그 퀭한 큰 눈에 녀석의 착한 모습이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
세월이 한 참 흘러 대학 일학년 때로 기억하는 데 여름 무더운 저녁 동네 당구장에서 아저씨랑 한게임 하고 있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다가와 혹시 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세요? 하고 물으니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을 대며 자신이 그 짝지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짝지를 알아보았으나 그 변해 버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행색이 남루한 것을 떠나서 그 순박한 큰 눈은 왠지 모를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는 듯이 보였으며 입가엔 천진스런 웃음기가 사라지고 뭔지 결의에 찬 모습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술 한 잔이 들어가니 짝지는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공사판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였고 가난으로 인해 대학도 못가는 이 사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너무도 변해 버린 이 짝지의 모습에 당황하였고 왠지 나랑은 너무도 멀어져버린 그에게 연민과 동시에 소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전화로 몇 번 연락을 한 것 같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그 후로 가끔 비듬나물을 먹을 때면 이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그나마도 미국에 온 후 십 몇 년 동안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 친구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오늘 뜻밖에 비듬나물을 보니 불현듯 이 친구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옥수수빵 배급받은 것을 우리 할머니가 좋아한다고 하자 이것도 갖다 주라고 내게 주던 이 순박한 짝지에서 “야! 나는 말이야 앞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고 살거야.”라고 마지막 만났을 때 절규하다시피 외쳤던 냉혈한으로 만들었던,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오늘은 오랜만에 비듬나물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그러나 내가 암만 요리를 잘 한다지만 도시락 반찬이라곤 집 앞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비듬나물만 뜯어 간장과 고추장에 버무리며 엄마의 눈물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들어간 그 절묘하고도 비장한 맛의 비듬나물을 내 어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