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서정의 외로운 모노로그.
시발, 무슨 말인지 한 개도 모르겠네 사는 것도 골 아픈데 니네들 주절거림까지 찬찬히 읽고 골을 더 때려라? 육두문자에 마른 입술을 흠뻑 적신 그는 지난밤 쓰리해온 모니터 앞에 앉아 피해자의 마지막 파일을 연다 여백을 채워나가는 사이 저장시킨 활자들은 어느새 장물을 닮아 있다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자기도 모르겠다 걸핏하면 고상하게 찝쩍대는 뒷골목 보스에게로 달려가 난해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죽지 않을만큼 얻어터졌다 그가 여지껏 뜨겁게 지켜낸 피, 골이 녹아든 피가 세상 밖으로 흘러내리며 식고 있었다.(깡패시인 전문)
이월란 시인은 미주 문단의 돌연변이이다. 미래파 시인들의 등장으로 서정시의 위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한국 시단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서정시만의 왕국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미주 문단에 이월란 시인의 등장은 신선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너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만큼 고향, 가을, 어머니, 사랑, 인생, 나무, 기도 등의 너무 친숙해서 조금은 식상해진 시어들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생리, 자궁, 미친 년, 불륜, 정액, 똥 같은 미주 시인들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서정의 시어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그녀의 시를 읽는 것은 당돌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경이롭다.
물론 미주 문단의 시에 너무 넘치는 서정이 잘못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미주 문단에나마 서정시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기현상은 어쩌면 사라져 가는 젊은 날의 추억처럼 짠하고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서정이 천편일률적이고 군사독재 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처럼 상투적 서정으로 가득찬 것이 문제일 뿐이다.
사랑을 잃어도 좋을 계절
가을만큼 가식 없는 계절이 없다
가을만큼 적나라한 계절이 없다
가을만큼 솔직한 계절이 없다
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이 낱낱이 발각되는 계절
죽은 가을의 시체들은 썩는 냄새조차 순하다
늙어가는 세월의 앙상한 팔들
이토록 참혹한 가을보다
화사한 봄과 함께 동반자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니
소생하는 생명과 밝은 봄빛에 더 절망하는 사람들
가을은 자연으로부터 위로 받는 계절임에
하늘도 저리 높은 것이겠다
폐허가 되어도 슬프지 않은 계절
이 스산한 가을저녁 대신
어느 누가 더 적막해질 수 있을까
두 발로
혼자 서고, 혼자 걸어가고, 혼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계절이 또 있을까
우린 모두 가을에 태어난 천진한 아기들
가을엔 역시 포옹하는 연인보다
헤어지는 뒷모습이 어울린다
내내 충혈되어 있는 가을의 두 눈 속에
설법처럼 내리는 죽은 잎들의 증언
딱딱한 껍질을 벗고
폐허의 축제로 나오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가을의 전령이 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가 당도해야 할 가을의 끝에는
언제나 Dead End 라고 새겨진 팻말이 있어
날숨마다 성에꽃을 피우는 가을의 끝에는
다 잊고 돌아나올 수 있는 망각의 눈이 내리고
하얀 지우개밥처럼 내려 쌓이는 망각의 눈
흉흉하게도 우릴 지탱해주기 위해 붉은 심장 위로
잊을 때까지 내리고 또 내리고
우편함 속엔 매일 그가 보낸 낙엽편지
활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눈길 닿는 풍경마다 그가 보낸 사연이다.(가을 죽이기 전문)
그녀의 가을에는 고향의 지붕 위에 익어가는 박꽃도 등장하지 않고 고추잠자리도 날아다니지 않는다. 불행히도 가을의 그런 따사로운 서정은 이미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나올 때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희미하게 사라졌으며 이제 우리가 당도해야 할 가을의 끝에는 언제나 Dead End 라고 새겨진 팻말이 있어 날숨마다 성에꽃을 피우는, 가을의 끝에는 다 잊고 돌아 나올 수 있는 망각의 눈이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연을 대함에 있어 가식이 없는 적나라함이며 솔직함이며 참신함이다.
이 시를 좀 더 감상해보자. 계절을 소재로 한 시작은 쉽지 않다. 조금 안일하면 상투적인 정서로 흐르기 쉽다. 봄이 만물이 소생하는 청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들판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온갖 과일이 풍요롭게 익어가는 가운데 고향의 늙은 어머니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보편적 정서이다. 그러나 시인이란 이런 보편적 정서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소중한 자신만의 정서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며,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1922년 T. S. Eliot는 시집 <황무지>의 제 1장 ‘죽은 자들의 매장’ 첫 대목에 실은 이 시 하나로 그전까지 시 문학사를 바꿔버렸다. 종래의 시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보편적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면 Eliot이후의 시인은 자신만이 느끼는 주관적 정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시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시이다.(물론 생 자체를 고로 보는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만물이 소생하여 생로병사라는 윤회의 업을 시작한 사월이 잔인한 계절이라는 Eliot의 주장이 그다지 충격은 아니다.) 봄이 이렇다면 이월란 시인이 느끼는 가을은 어떠한가? 그녀에게 가을은 사랑을 잃어도 좋은 계절이고 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이 낱낱이 발각되는 계절이며 죽은 가을의 시체들은 썩는 냄새조차 순한 계절이다. <가을 죽이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도 시인은 가을에 낙엽을 밟으며 숲 속의 길을 걸어가다 이 시를 구상한 것 같다. 낙엽이 떨어지는 숲 속을 걸으며 시인은 상념에 잠긴다. 낙엽이 마치 삶이란 전쟁을 열심히 싸우다가 죽은 전사자들의 시체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그 시체를 밟고 가듯이 낙엽을 밟고 간다. 그래서 가을 낙엽이 썩는 냄새는, 그 시체들이 썩는 냄새는 순하다고 느낀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유한성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이처럼 참혹한 가을보다 화사한 봄에 동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시인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처럼 사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헤어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을은 위로 받는 계절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걸어가는 시인에게 숲 속의 길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Road End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시인은 길이 끝나듯이 가을의 끝에 와 있음을 절감한다. 눈이 내리며 길가에 쌓인 낙엽의 시체들을 덮기 시작한다. 눈들이 낙엽을 지워주듯이 시인은 눈들이 시인의 붉은 심장 위에도 내려 흉흉한 아픈 기억들을 모두 지워주기를 기대한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지함을 여니 잘못 날아와 박힌 낙엽 외에는 아무 편지도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낙엽이 그가 보낸 편지처럼 느껴진다.
화간의 꿈과 자위.
이월란의 일부 시는 미래파(권형욱) 혹은 뉴웨이브(신형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지는 2000년 이후 황병승, 김민경, 김행숙 등 젊은 작가들의 시와 유사하다. 명명이야 어찌 되었건 이러한 일련의 시의 공통점은 전통적 시에서 나타나는 운문성과 서정성을 포기한 산문화와 반서정성이다. 더불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난해함이다. 이월란은 발 빠르게 본국 시의 유행을 쫓아가고 있는 것인가?
노을의 가죽을 벗겨 마름질한 명품은 짝퉁 인생을 닮아가고 있었다 똑딱이 마그넷을 벌리고 들어갔을 때 엉켜 있던 길들은 미지의 하늘을 이고 있었다 흔들리며 걸어가는 영원한 외출의 꿈, 불길한 계시는 한갓 미신이 낳은 망령된 신앙에 불과했다 골드 체인으로 묶인 허리가 어림잡아 반평생은 넘겠다 금빛 광택이 일별하듯 유혹하는 눈빛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따라갔다 침묵의 손으로 들고 나온 외출 중인 너와 나의 미래, 여자 속으로 들어가는 남자처럼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털을 잘라버리고 미지의 유적을 탐지하는 탐험가의 걸음으로, 강간 당한 가방 속에는 매몰당한 꿈들이 산산이 부서져 모범 사례처럼 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 패총 같은 봉분이 마음의 짐을 꾸릴 때마다 시뻘건 흙을 토해내고 있었다 화간을 꿈꾸며(가방 속으로 전문)
이러한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발, 무슨 말인지 한 개도 모르겠네 사는 것도 골 아픈데 니네들 주절거림까지 찬찬히 읽고 골을 더 때려라?
그녀는 깡패시인이라는 시에서 요즘의 시를 읽는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혹은 이러한 시를 대하는 보수적 문단의 반응을 이렇게 빈정거릴 수도 있다.) 시는 마침표를 생략하고, 행을 띄우는 전통적인 시작법을 무시했지만 걸핏하면 고상하게 찝쩍대는 뒷골목 보스(권위를 앞세우는 원로 문인이나 평론가를 상징하는 듯)에게 맞아 죽을 정도의 난해한 시는 아니다. 시가 산문이 지니는 논리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기표가 갖는 의미만으로도 이 시를 읽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명품(진짜 시인의 꿈)이라고 하는 주인공이 짝퉁 인생을 닮아가고 있고 영원한 외출의 꿈은 망령된 신앙에 불과하다. 너와 나의 미래는 가방 속으로 들어가 강간을 당하고 가방 속에는 매몰당한 꿈들만이 산산히 부서져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의 짐을 꾸밀 때마다 화간을 꿈꾸며 시뻘건 마음의 피를 토해내고 있다는 그리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단지 가방이라는 기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만이 남는다.
라캉은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라고 정의한다. 라캉에 의하면 의식적 글쓰기이건 무의식적 글쓰기이건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욕망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무의식은 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모처럼 대상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신기루처럼 저만치 물러난다. 이처럼 욕망이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가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 자체가 영원한 결핍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서 꿈꾸는 자의 욕망을 분석해냈듯이 작품 속의 기표들을 통해 작가의 욕망을 끄집어낸다. 욕망은 곧 기표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환유이기 때문이다.
이월란의 <가방 속으로>에서 가방의 기표는 여자 성기의 환유이다.(프로이트는 꿈의 분석에서 여성들의 꿈에서 자주 나타나는 그릇이나 작은 방, 물건을 담는 궤짝 등이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가방을 여성의 성기의 환유로 볼 때 이 시의 의미는 확연히 드러난다. 시인은 이제껏 자신이 명품이라고 여겼던 여인의 소중한 삶이 짝퉁의 가방을 지닌 강간당한(배반당한)삶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매몰당한 꿈에 시뻘건 마음의 피를 토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지쳐 시 제목이 암시하듯 가방(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인은 아직도 여전히 행복한 화간에의 꿈을 꾸고 있다. 그녀의 시가 이처럼 반서정의 난해한 외형을 갖추었지만 그 심연에는 오히려 상처 받은 전통적인 우리 여인네의 서정이 흐르고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 갈퀴달린 내 손톱은 빙산처럼 희게 빛나는 검은 저 삼각주를 박박 긁어대는데 내 음부가 철철 피 흘렸다. 달콤 쌉싸레한 시럽,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테라는 곰팡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그녀는 한참 자위 중이었다.(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 중 부분)
요즘 잘 나가는 한국의 김민정 시인의 시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이런 기막힌 표현 한 구만 보아도 이 시인이 얼마나 기초가 탄탄한 시인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시를 보자. 이 시는 조금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도무지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월란의 <가방 속으로>라는 시가 기표가 의미하는 상징 때문에 난해하다면 이 시는 그러한 난해한 상징이 없음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이월란처럼 여성의 성기를 가방이라는 환유로 대치하지 않는다. 그냥 음부라고 말한다. 음부는 음부일 뿐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음부를 가방으로 대치시키는 억압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주) 이처럼 김민정뿐만 아니라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성행위와 성기에 대한 묘사가 포르노그래피처럼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처음부터 산울림의 고등어라는 노랫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이것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알 수 없다. 1930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동기술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등어 부인의 등장은 이와 같은 연상의 결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등어 부인은 음부를 피가 철철 나도록 긁어대는데 그녀는 결국 자위 중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런 뜻이 없다. 이월란의 시, <가방 속에서>처럼 억압에 의해서 대치된 기표(환유)를 갖는 시는 주요 환유가 갖는 의미가 풀리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나 김민정의 시처럼 환유로의 대치를 거부하는 시는(이 점은 시인의 의식적인 의도로 보인다.)오히려 이해하기가 곤란하다.(사실은 이해가 곤란하기 보다는 우리처럼 억압에 익숙해진 세대들은 이해하기가 거북하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마음대로 즐길 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시는 산울림의 노랫말에서 출발하여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발칙하고 발랄한 상상들을 하는 것이다. 고등어 부인이 음부를 빡빡 긁다가 자위하고 그녀의 알집을 가위질로 싹둑 따고 이처럼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날아간다. 그녀의 시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여 동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마치 절정의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방언처럼 금지에서 풀려 날 뛰는 언어의 쥬이상스로 가득찬 이런 시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월란의 난해한 시가 인간(혹은 시인)의 관계에 대한 욕망(화간에의 꿈)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데에 비하여 김민정의 시는 그러한 욕망마저 버리고 철저한 자기 유희(자위행위) 속으로 칩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파의 시가 자폐적이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너희는 너희들의 세계에서 놀아.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에서 놀게. 뭐 이런 식이다.)
언뜻 보기에는 미래파의 시처럼 보이는 이월란의 시를 김민정의 시와 장황하게 비교해 본 것은 이월란의 시가 미래파의 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래파의 반서정시처럼 보이는 그녀의 시는 마음이라는 심연에 오히려 처절한 우리네 전통적 여인의 서정이 숨겨져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월란 시인은 미주 문단에서는 드물게 보는 다작 시인이다. 그녀는 2007년 1월부터 지금까지 900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였다. 하루에 한편 이상의 시를 쓰는 시인이다. 나는 언제가 부터 그녀의 시를 볼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그녀의 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시는 깃발처럼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되어 내 가슴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미치도록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의 시를 통해 느껴진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욕망에 <깡패시인 이월란>이란 어쭙잖은 평으로서 한 번 화답하고 싶었다. 같이 춤추고 싶었다.
이월란은 미주 문단의 돌연변이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돌연변이는 유전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월란의 유전자가 미주 문단에 널리 퍼져 기존의 낡은 서정의 틀을 깨트리고 미주 문단에 보다 가식 없고 적나라하고 솔직하고 참신한 서정의 문학 세계가 새롭게 펼쳐지길 바란다. 그녀의 시가 미주 문단에 새로운 서정시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되어 진정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 탄생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월란 시인의 등장은 미주 문단에 드디어 세대교체가 왔음을 알리는 통지서이며 어쩔 수 없이 미주문학사의 한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이정표이다. 이러한 이월란 시인에 대한 사랑이 나만의 짝사랑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시 <공항대기실2> 전문을 인용하며 자칫 이 월란 시인의 탁월한 시에 비해 평이 너무 졸문일 수도 있다는 우려감을 떨치지 못한 채 서둘러 글을 마친다.
공항대기실 2
군복무늬가 하얗게 표백당한 군용기 한 대 지상으로 복귀한다
영공을 날아다니는 꿈을 수비하고 돌아온 삶의 전투는
기착지마다 무디어진 무기들로 분리수거 당했고
탑승객들은 다시 미션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자 잃은 슬픈 노마드족들은 구름짬마다 집을 짓고
은익같은 디아스포라의 화석을 새긴다
아직 전사자는 없다
다만, 일등석 중간쯤에 열 두시간 동안의 기내식을 모조리 토해놓은
토사물이 그가 날아다닌 정처없는 지상의 지도를 그려 두었을 뿐이다
날개가 없어도 머물지 못하는 행려의 자취는 원격조정당하고 있다
한적한 국내선, 상아빛 육질마다 혼혈의 고향이 묻어난다
물빛 해조음이 악센트를 달고 증발한다
대형실내화분들이 스넥바마다 작동 중인 랩탑 모니터 속에서
유년의 갈숲을 동시통역 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제 3국인이 지구를 굴리며 오고 있다
영혼의 질긴 뼈대는 기억의 생가 속에 미라처럼 누워 있고
지평선 너머 사막에 용접된 설원이 이젤에 걸린 화폭처럼 펄럭이고 있다
너울처럼 세월 걸친 어깨마다 환히 젖는 눈시울
우린 지층 속에 숨겨진 원유를 찾기 위해
그리움의 탄띠를 허리에 차고 화약고 같은 노을로 뛰어든 자살테러범
영혼의 동란이 수시로 폭파하는 적막한 분화구
희사받은 종말의 안식을 위해 유방이 서른 개씩 달린 이방의 여신에게
절을 하며, 버리기 위해 움켜쥐는 야누스
본토발음으로 주문을 외어 나의 제사를 집전하는 모순의 은폐자
그리움의 해쥬에 빠진 이방인이 되어
빛의 순도 앞에 핼쓱해진 낮달이 되어
영혼의 절규가 익숙하게 세뇌 당하고 있는, 이 길도 알고보면 초행길
지느러미같은 활주로에 떠도는 영혼을 유도등이 제대로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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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성의 성기가 가방이라는 환유로 표현하는 시인과 환유를 거부하고 음부로 표현하는 시인 사이에는 시대적 문화적 간극이 존재한다. 즉 무엇에 대한 금지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대립을 어쩔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로 파악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레비-스트로스는 프로이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인류 전체의 공통적인 것이 아니고 아시아나 유럽 문명 등 부계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남태평양의 일부 섬이나 아마존의 모계사회에는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H. 마르쿠제 또한 <에로스와 문명>에서 문명이란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억압한 결과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발, 무슨 말인지 한 개도 모르겠네 사는 것도 골 아픈데 니네들 주절거림까지 찬찬히 읽고 골을 더 때려라? 육두문자에 마른 입술을 흠뻑 적신 그는 지난밤 쓰리해온 모니터 앞에 앉아 피해자의 마지막 파일을 연다 여백을 채워나가는 사이 저장시킨 활자들은 어느새 장물을 닮아 있다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자기도 모르겠다 걸핏하면 고상하게 찝쩍대는 뒷골목 보스에게로 달려가 난해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죽지 않을만큼 얻어터졌다 그가 여지껏 뜨겁게 지켜낸 피, 골이 녹아든 피가 세상 밖으로 흘러내리며 식고 있었다.(깡패시인 전문)
이월란 시인은 미주 문단의 돌연변이이다. 미래파 시인들의 등장으로 서정시의 위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한국 시단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서정시만의 왕국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미주 문단에 이월란 시인의 등장은 신선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너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만큼 고향, 가을, 어머니, 사랑, 인생, 나무, 기도 등의 너무 친숙해서 조금은 식상해진 시어들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생리, 자궁, 미친 년, 불륜, 정액, 똥 같은 미주 시인들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서정의 시어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그녀의 시를 읽는 것은 당돌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경이롭다.
물론 미주 문단의 시에 너무 넘치는 서정이 잘못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미주 문단에나마 서정시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기현상은 어쩌면 사라져 가는 젊은 날의 추억처럼 짠하고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서정이 천편일률적이고 군사독재 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처럼 상투적 서정으로 가득찬 것이 문제일 뿐이다.
사랑을 잃어도 좋을 계절
가을만큼 가식 없는 계절이 없다
가을만큼 적나라한 계절이 없다
가을만큼 솔직한 계절이 없다
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이 낱낱이 발각되는 계절
죽은 가을의 시체들은 썩는 냄새조차 순하다
늙어가는 세월의 앙상한 팔들
이토록 참혹한 가을보다
화사한 봄과 함께 동반자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니
소생하는 생명과 밝은 봄빛에 더 절망하는 사람들
가을은 자연으로부터 위로 받는 계절임에
하늘도 저리 높은 것이겠다
폐허가 되어도 슬프지 않은 계절
이 스산한 가을저녁 대신
어느 누가 더 적막해질 수 있을까
두 발로
혼자 서고, 혼자 걸어가고, 혼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계절이 또 있을까
우린 모두 가을에 태어난 천진한 아기들
가을엔 역시 포옹하는 연인보다
헤어지는 뒷모습이 어울린다
내내 충혈되어 있는 가을의 두 눈 속에
설법처럼 내리는 죽은 잎들의 증언
딱딱한 껍질을 벗고
폐허의 축제로 나오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가을의 전령이 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가 당도해야 할 가을의 끝에는
언제나 Dead End 라고 새겨진 팻말이 있어
날숨마다 성에꽃을 피우는 가을의 끝에는
다 잊고 돌아나올 수 있는 망각의 눈이 내리고
하얀 지우개밥처럼 내려 쌓이는 망각의 눈
흉흉하게도 우릴 지탱해주기 위해 붉은 심장 위로
잊을 때까지 내리고 또 내리고
우편함 속엔 매일 그가 보낸 낙엽편지
활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눈길 닿는 풍경마다 그가 보낸 사연이다.(가을 죽이기 전문)
그녀의 가을에는 고향의 지붕 위에 익어가는 박꽃도 등장하지 않고 고추잠자리도 날아다니지 않는다. 불행히도 가을의 그런 따사로운 서정은 이미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나올 때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희미하게 사라졌으며 이제 우리가 당도해야 할 가을의 끝에는 언제나 Dead End 라고 새겨진 팻말이 있어 날숨마다 성에꽃을 피우는, 가을의 끝에는 다 잊고 돌아 나올 수 있는 망각의 눈이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연을 대함에 있어 가식이 없는 적나라함이며 솔직함이며 참신함이다.
이 시를 좀 더 감상해보자. 계절을 소재로 한 시작은 쉽지 않다. 조금 안일하면 상투적인 정서로 흐르기 쉽다. 봄이 만물이 소생하는 청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들판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온갖 과일이 풍요롭게 익어가는 가운데 고향의 늙은 어머니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보편적 정서이다. 그러나 시인이란 이런 보편적 정서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소중한 자신만의 정서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며,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1922년 T. S. Eliot는 시집 <황무지>의 제 1장 ‘죽은 자들의 매장’ 첫 대목에 실은 이 시 하나로 그전까지 시 문학사를 바꿔버렸다. 종래의 시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보편적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면 Eliot이후의 시인은 자신만이 느끼는 주관적 정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시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시이다.(물론 생 자체를 고로 보는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만물이 소생하여 생로병사라는 윤회의 업을 시작한 사월이 잔인한 계절이라는 Eliot의 주장이 그다지 충격은 아니다.) 봄이 이렇다면 이월란 시인이 느끼는 가을은 어떠한가? 그녀에게 가을은 사랑을 잃어도 좋은 계절이고 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이 낱낱이 발각되는 계절이며 죽은 가을의 시체들은 썩는 냄새조차 순한 계절이다. <가을 죽이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도 시인은 가을에 낙엽을 밟으며 숲 속의 길을 걸어가다 이 시를 구상한 것 같다. 낙엽이 떨어지는 숲 속을 걸으며 시인은 상념에 잠긴다. 낙엽이 마치 삶이란 전쟁을 열심히 싸우다가 죽은 전사자들의 시체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그 시체를 밟고 가듯이 낙엽을 밟고 간다. 그래서 가을 낙엽이 썩는 냄새는, 그 시체들이 썩는 냄새는 순하다고 느낀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유한성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이처럼 참혹한 가을보다 화사한 봄에 동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시인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처럼 사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헤어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을은 위로 받는 계절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걸어가는 시인에게 숲 속의 길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Road End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시인은 길이 끝나듯이 가을의 끝에 와 있음을 절감한다. 눈이 내리며 길가에 쌓인 낙엽의 시체들을 덮기 시작한다. 눈들이 낙엽을 지워주듯이 시인은 눈들이 시인의 붉은 심장 위에도 내려 흉흉한 아픈 기억들을 모두 지워주기를 기대한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지함을 여니 잘못 날아와 박힌 낙엽 외에는 아무 편지도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낙엽이 그가 보낸 편지처럼 느껴진다.
화간의 꿈과 자위.
이월란의 일부 시는 미래파(권형욱) 혹은 뉴웨이브(신형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지는 2000년 이후 황병승, 김민경, 김행숙 등 젊은 작가들의 시와 유사하다. 명명이야 어찌 되었건 이러한 일련의 시의 공통점은 전통적 시에서 나타나는 운문성과 서정성을 포기한 산문화와 반서정성이다. 더불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난해함이다. 이월란은 발 빠르게 본국 시의 유행을 쫓아가고 있는 것인가?
노을의 가죽을 벗겨 마름질한 명품은 짝퉁 인생을 닮아가고 있었다 똑딱이 마그넷을 벌리고 들어갔을 때 엉켜 있던 길들은 미지의 하늘을 이고 있었다 흔들리며 걸어가는 영원한 외출의 꿈, 불길한 계시는 한갓 미신이 낳은 망령된 신앙에 불과했다 골드 체인으로 묶인 허리가 어림잡아 반평생은 넘겠다 금빛 광택이 일별하듯 유혹하는 눈빛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따라갔다 침묵의 손으로 들고 나온 외출 중인 너와 나의 미래, 여자 속으로 들어가는 남자처럼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털을 잘라버리고 미지의 유적을 탐지하는 탐험가의 걸음으로, 강간 당한 가방 속에는 매몰당한 꿈들이 산산이 부서져 모범 사례처럼 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 패총 같은 봉분이 마음의 짐을 꾸릴 때마다 시뻘건 흙을 토해내고 있었다 화간을 꿈꾸며(가방 속으로 전문)
이러한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발, 무슨 말인지 한 개도 모르겠네 사는 것도 골 아픈데 니네들 주절거림까지 찬찬히 읽고 골을 더 때려라?
그녀는 깡패시인이라는 시에서 요즘의 시를 읽는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혹은 이러한 시를 대하는 보수적 문단의 반응을 이렇게 빈정거릴 수도 있다.) 시는 마침표를 생략하고, 행을 띄우는 전통적인 시작법을 무시했지만 걸핏하면 고상하게 찝쩍대는 뒷골목 보스(권위를 앞세우는 원로 문인이나 평론가를 상징하는 듯)에게 맞아 죽을 정도의 난해한 시는 아니다. 시가 산문이 지니는 논리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기표가 갖는 의미만으로도 이 시를 읽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명품(진짜 시인의 꿈)이라고 하는 주인공이 짝퉁 인생을 닮아가고 있고 영원한 외출의 꿈은 망령된 신앙에 불과하다. 너와 나의 미래는 가방 속으로 들어가 강간을 당하고 가방 속에는 매몰당한 꿈들만이 산산히 부서져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의 짐을 꾸밀 때마다 화간을 꿈꾸며 시뻘건 마음의 피를 토해내고 있다는 그리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단지 가방이라는 기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만이 남는다.
라캉은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라고 정의한다. 라캉에 의하면 의식적 글쓰기이건 무의식적 글쓰기이건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욕망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무의식은 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모처럼 대상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신기루처럼 저만치 물러난다. 이처럼 욕망이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가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 자체가 영원한 결핍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서 꿈꾸는 자의 욕망을 분석해냈듯이 작품 속의 기표들을 통해 작가의 욕망을 끄집어낸다. 욕망은 곧 기표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환유이기 때문이다.
이월란의 <가방 속으로>에서 가방의 기표는 여자 성기의 환유이다.(프로이트는 꿈의 분석에서 여성들의 꿈에서 자주 나타나는 그릇이나 작은 방, 물건을 담는 궤짝 등이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가방을 여성의 성기의 환유로 볼 때 이 시의 의미는 확연히 드러난다. 시인은 이제껏 자신이 명품이라고 여겼던 여인의 소중한 삶이 짝퉁의 가방을 지닌 강간당한(배반당한)삶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매몰당한 꿈에 시뻘건 마음의 피를 토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지쳐 시 제목이 암시하듯 가방(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인은 아직도 여전히 행복한 화간에의 꿈을 꾸고 있다. 그녀의 시가 이처럼 반서정의 난해한 외형을 갖추었지만 그 심연에는 오히려 상처 받은 전통적인 우리 여인네의 서정이 흐르고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 갈퀴달린 내 손톱은 빙산처럼 희게 빛나는 검은 저 삼각주를 박박 긁어대는데 내 음부가 철철 피 흘렸다. 달콤 쌉싸레한 시럽,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테라는 곰팡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그녀는 한참 자위 중이었다.(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 중 부분)
요즘 잘 나가는 한국의 김민정 시인의 시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이런 기막힌 표현 한 구만 보아도 이 시인이 얼마나 기초가 탄탄한 시인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시를 보자. 이 시는 조금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도무지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월란의 <가방 속으로>라는 시가 기표가 의미하는 상징 때문에 난해하다면 이 시는 그러한 난해한 상징이 없음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이월란처럼 여성의 성기를 가방이라는 환유로 대치하지 않는다. 그냥 음부라고 말한다. 음부는 음부일 뿐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음부를 가방으로 대치시키는 억압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주) 이처럼 김민정뿐만 아니라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성행위와 성기에 대한 묘사가 포르노그래피처럼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처음부터 산울림의 고등어라는 노랫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이것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알 수 없다. 1930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동기술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등어 부인의 등장은 이와 같은 연상의 결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등어 부인은 음부를 피가 철철 나도록 긁어대는데 그녀는 결국 자위 중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런 뜻이 없다. 이월란의 시, <가방 속에서>처럼 억압에 의해서 대치된 기표(환유)를 갖는 시는 주요 환유가 갖는 의미가 풀리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나 김민정의 시처럼 환유로의 대치를 거부하는 시는(이 점은 시인의 의식적인 의도로 보인다.)오히려 이해하기가 곤란하다.(사실은 이해가 곤란하기 보다는 우리처럼 억압에 익숙해진 세대들은 이해하기가 거북하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마음대로 즐길 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시는 산울림의 노랫말에서 출발하여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발칙하고 발랄한 상상들을 하는 것이다. 고등어 부인이 음부를 빡빡 긁다가 자위하고 그녀의 알집을 가위질로 싹둑 따고 이처럼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날아간다. 그녀의 시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여 동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마치 절정의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방언처럼 금지에서 풀려 날 뛰는 언어의 쥬이상스로 가득찬 이런 시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월란의 난해한 시가 인간(혹은 시인)의 관계에 대한 욕망(화간에의 꿈)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데에 비하여 김민정의 시는 그러한 욕망마저 버리고 철저한 자기 유희(자위행위) 속으로 칩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파의 시가 자폐적이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너희는 너희들의 세계에서 놀아.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에서 놀게. 뭐 이런 식이다.)
언뜻 보기에는 미래파의 시처럼 보이는 이월란의 시를 김민정의 시와 장황하게 비교해 본 것은 이월란의 시가 미래파의 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래파의 반서정시처럼 보이는 그녀의 시는 마음이라는 심연에 오히려 처절한 우리네 전통적 여인의 서정이 숨겨져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월란 시인은 미주 문단에서는 드물게 보는 다작 시인이다. 그녀는 2007년 1월부터 지금까지 900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였다. 하루에 한편 이상의 시를 쓰는 시인이다. 나는 언제가 부터 그녀의 시를 볼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그녀의 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시는 깃발처럼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되어 내 가슴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미치도록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의 시를 통해 느껴진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욕망에 <깡패시인 이월란>이란 어쭙잖은 평으로서 한 번 화답하고 싶었다. 같이 춤추고 싶었다.
이월란은 미주 문단의 돌연변이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돌연변이는 유전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월란의 유전자가 미주 문단에 널리 퍼져 기존의 낡은 서정의 틀을 깨트리고 미주 문단에 보다 가식 없고 적나라하고 솔직하고 참신한 서정의 문학 세계가 새롭게 펼쳐지길 바란다. 그녀의 시가 미주 문단에 새로운 서정시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되어 진정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 탄생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월란 시인의 등장은 미주 문단에 드디어 세대교체가 왔음을 알리는 통지서이며 어쩔 수 없이 미주문학사의 한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이정표이다. 이러한 이월란 시인에 대한 사랑이 나만의 짝사랑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시 <공항대기실2> 전문을 인용하며 자칫 이 월란 시인의 탁월한 시에 비해 평이 너무 졸문일 수도 있다는 우려감을 떨치지 못한 채 서둘러 글을 마친다.
공항대기실 2
군복무늬가 하얗게 표백당한 군용기 한 대 지상으로 복귀한다
영공을 날아다니는 꿈을 수비하고 돌아온 삶의 전투는
기착지마다 무디어진 무기들로 분리수거 당했고
탑승객들은 다시 미션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자 잃은 슬픈 노마드족들은 구름짬마다 집을 짓고
은익같은 디아스포라의 화석을 새긴다
아직 전사자는 없다
다만, 일등석 중간쯤에 열 두시간 동안의 기내식을 모조리 토해놓은
토사물이 그가 날아다닌 정처없는 지상의 지도를 그려 두었을 뿐이다
날개가 없어도 머물지 못하는 행려의 자취는 원격조정당하고 있다
한적한 국내선, 상아빛 육질마다 혼혈의 고향이 묻어난다
물빛 해조음이 악센트를 달고 증발한다
대형실내화분들이 스넥바마다 작동 중인 랩탑 모니터 속에서
유년의 갈숲을 동시통역 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제 3국인이 지구를 굴리며 오고 있다
영혼의 질긴 뼈대는 기억의 생가 속에 미라처럼 누워 있고
지평선 너머 사막에 용접된 설원이 이젤에 걸린 화폭처럼 펄럭이고 있다
너울처럼 세월 걸친 어깨마다 환히 젖는 눈시울
우린 지층 속에 숨겨진 원유를 찾기 위해
그리움의 탄띠를 허리에 차고 화약고 같은 노을로 뛰어든 자살테러범
영혼의 동란이 수시로 폭파하는 적막한 분화구
희사받은 종말의 안식을 위해 유방이 서른 개씩 달린 이방의 여신에게
절을 하며, 버리기 위해 움켜쥐는 야누스
본토발음으로 주문을 외어 나의 제사를 집전하는 모순의 은폐자
그리움의 해쥬에 빠진 이방인이 되어
빛의 순도 앞에 핼쓱해진 낮달이 되어
영혼의 절규가 익숙하게 세뇌 당하고 있는, 이 길도 알고보면 초행길
지느러미같은 활주로에 떠도는 영혼을 유도등이 제대로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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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성의 성기가 가방이라는 환유로 표현하는 시인과 환유를 거부하고 음부로 표현하는 시인 사이에는 시대적 문화적 간극이 존재한다. 즉 무엇에 대한 금지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대립을 어쩔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로 파악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레비-스트로스는 프로이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인류 전체의 공통적인 것이 아니고 아시아나 유럽 문명 등 부계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남태평양의 일부 섬이나 아마존의 모계사회에는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H. 마르쿠제 또한 <에로스와 문명>에서 문명이란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억압한 결과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