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 04:02

노벨문학상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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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유감.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헤르타 뮐러라는 독일 여류작가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인터넷으로 대충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구 루마니아 태생의 독일 작가라고 한다. 대표작이 <저지대>란 작품으로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독일로 망명했다고 한다. 망명 후에도 공산주의 독재체재를 비판하는 작품을 계속 발표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1995년 유럽문학상과 1990년 카프카 문학상을 받는 등 유럽 문단에는 꽤 알려진 작가라는 것이다.


매년 이맘 때 노벨상이 발표될 때마다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유럽인이 선정한 이 상을 통해서 엿보이는 유럽인의 정치 사회적인 정서이다. 특히 정치적인 이해가 반영되는 문학상과 평화상의 경우에는 그렇다. 올해는 유난히 <NO nostalgia for communism>이란 헤드라인으로 헤르타 뮐러의 수상을 보도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눈에 띤다. 작년 말 사상 유례없는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러시아 및 동유럽에서 옛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유럽인들의 불안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유럽인들의 우려는 느닷없는 오바마 미국 현직 대통령에 대한 노벨평화상 선정으로 더욱 드러난다. 도대체 임기 일 년도 안 된 오바마가 세계평화에 기여한 것이 뭔가? 이러한 배경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여왕의 어깨를 감싸는 무례를 범하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게 동참을 강권하는 패권주의의 맹주로서 행동하는 무식한 텍사스 카우보이 같은 조지 부시에 비해 수백 년간 노예로 살았던 흑인의 피를 이어받은 오바마가 유럽 방문 중에 보여준 유럽에 대한 존경과 극도의 겸손함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한때 친하게 지냈던 불란서 친구의 미국 뉴욕 방문 경험담이 생각난다. 이 친구가 뉴욕에 방문해서 호텔에 묵을 때 영어를 쓰면 직원들이 사무적으로 대하다가 프랑스어를 쓰니 갑자기 매우 친절해지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미국인의 뿌리 깊은 유럽에 대한 열등감도 느꼈지만 반대로 유럽인의 미국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유럽 우월주의가 아닌가?


한편 이번 헤르타 밀러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많은 노벨문학상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 변함없이 지속되는 문학에 대한 유럽인들의 고정관념의 일면을 드러낸다. 문학을 통한 압제와 억압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소앙카, 나이폴, 나딘 고디머, 존 쿠시 등 아프리카권 작가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토니 모리슨 같은 작가의 수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인종차별 같은 억압과 독재에 맞서는 작가의 고발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네루다와 솔제니친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우리나라의 김지하 시인도 70년 대 말 <오적>으로 노벨문학상 최종 10인의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이 억압에 맞서는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높이 평가한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 과연 역대의 노벨문학상이 당대의 뛰어난 문학인들을 적절하게 선정했는가 하는 점에서 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역대 20대 작가들 중 항상 1위에 선정되는 톨스토이라든지 현대문학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제임스 조이스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보르헤스 등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다. 그뿐인가? 앙드레 말로, D.H.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브레히트, 폴 발레리, 헨리 밀러, 그래암 그린 들 웬만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읽어 본 적이 있는 유명작가들이 이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이 상의 권위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수상을 하지 못 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이맘때쯤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때마다 혹시나 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한국 작가들의 수상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도 역시나였다. 고은 선생님은 벌써 수년전부터 최종후보자 중 한명으로 거론되고 되고 있으나 올해도 역시 스웨덴 노벨 아카데미는 그를 호명하지 않았다. 세계 무역거래 규모 10위권에 들어가고 OECD 가입국 등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한국의 위상에 걸맞게 자국의 문화적인 자부심을 한껏 높일 수 있는 노벨문학상만은 왜 아직도 못 받는단 말인가? 오천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강국이라고 큰소리치지만 벌써 가야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브로, 파금, 가오징센 등 두 명 이상의 수상자를 낸 같은 아시아의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국은 아직 단 한명의 수상자를 못 내고 있다. 이러다보니 슬슬 한국 문단 내에서조차 한국문학 노벨문학상 수상 난망론이 불거져 나오는 실정이다. 그 요지는 첫째가 한국문학의 번역이 수준미달이라는 점과 둘째 한국문학이 세계적 수준의 문학에 함양미달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늦은 자성으로 2001년 정부기관으로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되어 매년 한국의 유명 작가의 작품을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 작업을 1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둘째로 거론되는 한국 문학 자질론에 대해서 나는 사실 노벨문학상으로 수상되는 작품 자체가 한국의 현대문학을 뛰어 넘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수년째 고은 선생님 시의 영문 번역을 맡고 있고 한국문학 번역에 앞장서온 귀화한 영국인 선교사 출신의 서강대 안선재 교수가 몇 년전 프레시안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은 한국 문학에 대한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문학의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 있다. 최근의 세계문학이 잘 소개돼야 한국작가들도 세계적 문학흐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번역이 안 되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 작품은 출판사가 아예 번역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 문학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현대세계문학을 너무 모른다. 한국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작품이 너무 많다. 적어도 문학작품에는 상상력이 넘쳐나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한국 작품은 우울하고 슬프다. 분단문학, 특히 6·25전쟁을 겪은 작가들이 그렇다. 현대문학 작가도 마찬가지다. 어제 한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번역상’을 심사했는데, 어휴! 재미도 없고…. 생활을 소재한 작품도 지루한 아파트 생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판에 박혀 있다. 그것은 카피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는 마음이 문학작품을 변화시킨다. 진실을 따라야 문학에 내적인 힘이 생긴다. 작가는 기자가 아니다. 어떻든 한국문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근 새롭게 써야 한다는 자각이 일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안선재 교수의 지적과 함께 십여 년전 프랑스와 고속전철 계약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한국문학을 소개해 달라는 프랑스 문화부의 초청을 받고 한국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을 들고 나갔던 관계자가 전해들은 프랑스 측 반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국에는 아직도 이런 종류의 소설이 유행하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프랑스에서 대하소설의 유행은 20세기 초에 끝났다.) 물론 박경리의 토지나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의 대하소설이 지난 삼십여 년 간 한국 문단이 이루어낸 큰 성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소설은 질곡의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아니면 그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사실 한국 문학의 이러한 대하소설이 대부분 신문연재소설이나 잡지연재소설인데 장기연재를 하여 작가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측면과 무관할 수 있을까?)  


다시 기자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안선재 교수에 묻는다.

- 그렇다면 한국문학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선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작품이 돼야 한다. 그냥 보여주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한국 문학작품에는 다큐멘터리성 작품이 너무 많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다. 너무 단순하고 실제 생활하고 똑같다. 생활을 보여주는 드라마와 비슷하다. 문학은 현실을 뛰어넘는 픽션이어야 된다.”


나는 한국문학에 대한 이러한 우려가 모두 기우이길 바랄 따름이다. 언젠가 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쏙 들어가 잊혀져버리고 말 것이다.


헤르타 뮐러의 수상에 대한 반응을 인터넷을 통해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새로운 사실에 주목한다. 독일에서는 그녀의 문학을 이민자 문학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조차 그녀의 수상이 의외라는 반응이다. 스웨덴이 이민자 문학에 주목했다면 독일 내에 많은 터키나 중동계의 뛰어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 역시 아프리카의 리비에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한 이민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디아스포라적 세계관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헤르타 뮐러 역시 그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았지만 독일에 사는 소수민족 작가에게 수상이 돌아감은 유럽 문학계가 문학에 있어서 디아스포라적 가치관을 서서히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생각은 미국에 이민 와 불과 몇 백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우리 미주문학인들을 고무시키기 위한 견강부회의 헛된 기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늘 헤르타 뮐러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하고 같은 이민자 문학을 쓰는 사람으로서 조금은 질투가 나고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혹 이런 꿈을 한 번 꾸어 보면 어떨까?  


“세계 최대의 강대국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의 애환을 탁월하게 서사화하였고 잃어가는 전통과 뿌리 의식에 대한 탐구가 인간 본연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라는 기사와 함께 어느 날 미주문학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듣게 될 그날이 올 것이라는.  물론 이러한 꿈은 야무지지만 꿈꾸는 동안은 항상 행복하다. 착각은 언제나 자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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