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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주한국문인협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 여름문학캠프 성황리에 끝난 것, 사진을 보고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모국어 사랑,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시네요.
    (나희덕 님께 제가 계간평 청탁한 것은 다들 아시죠? 처음에는 평론은 잘 안 쓴다고 거절을 하시기에 제가 간곡히 부탁을 드렸답니다. 여러분들과 정답게 찍은 사진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좋던지요.)
    미주시문학회 사이트에 올려놓은 수필 한 편, 이 자리에도 올려놓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미주문협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진방남이라는 예전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불효자는 웁니다>란 것이 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한들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바로 내 얘기이다.




  어머니는 처녀가장으로서 20대 초반부터 생활전선에 나서 10년 남짓 교사 생활을 했고, 30년 동안 문방구점을 했다. 10년 정도 농사 일을 하시다가 2007년 2월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30년 문방구점을 하는 동안 나로 인해 우신 날이 300날일까 600날일까.




  김천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의 광기가 나날이 심해져 하루걸러 한 번씩 집에서 통곡이 터져나왔다. 서울법대 법학과에 다니던 형이 사법고시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문학을 하고 싶은 자신의 생이 법전과 판례집과의 싸움으로, 혹은 범죄자와 사기꾼들과의 신경전으로 점철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1차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시험을 포기하자 아버지는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찰관을 십수 년 하다 옷을 벗어서 그런지 법조인에 대한 동경심이 보통 이상으로 컸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장남이 이루어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꿈을 접고 알량한(?) 문학을 하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절망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정작 혼을 낼 큰아들은 서울에 가 있었고 용돈을 잘 주지 않는 잔소리 심한 아내와 교과서 대신 시집과 소설집을 끼고 다니는 작은아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막내딸이 눈앞에 있었다.

  

  실업자인 남편을 대신해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점을 연 어머니는 생활력이 참 강했다. 대구에 가서 물건을 떼다가 가게를 꾸려갔는데 조금씩 잡화도 들여왔다. 아버지는 어머니 가게 일을 도우면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내막은 실업자였다. 아내한테 용돈을 타 쓰게 되었으니 그때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도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말에 경성사범학교를 다닌 재원이었다. 6ㆍ25 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가 강제 납북되는 바람에 처녀가장으로 나서 여섯 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초등학교 교사를 10년 이상 하셨다. 결혼 후 임신을 하자 서울에서의 교사 생활을 접고 남편의 근무지로 내려간 것을 평생 후회하였다.

  

  내가 진학한 김천고등학교는 대구와 대전이 평준화 지역이 되는 바람에 시험을 쳐서 신입생을 뽑는 비평준화 지역의 대표적인 학교가 되었다.

  

  선생님들이 모의를 했는지 첫 번째 월말고사가 끝나자 틀린 개수대로 종아리나 엉덩이에 매타작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와 집에서의 폭력이 지겨웠다. 가게의 돈을 훔쳐내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난생 처음 이렇게 서울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나는 그 당시에 꽤 흔했던 ‘무작정상경을 한 가출소년’이었다.

  

  아아, 나는 그때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자식이 집을 뛰쳐나간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고도 남았을 텐데 남겨놓고 간 편지봉투에 ‘유서’라고 써놓았으니. 나는 가출의 이유가 아버지의 생에 대한 절망과 선생님들의 부당한 매질에 있으며 내 힘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찾지 말라고 편지에다 썼다.

  

  가출은 채 한 달이 가지 못했다. 돈이 떨어져 형한테 연락을 했더니 자기 하숙집에 와 있으라고 했다. 형의 하숙집에서 잠이 든 그날 아침, 새벽기차로 올라오신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혀 내려갔는데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가출이었다.

  

  그 뒤로도 부산으로 대구로 달아났었고, 자살기도도 세 번을 했다. 쥐약을 먹기도 했었고 집에 있는 각종 약 수십 알을 한꺼번에 틀어먹기도 했었다. 간이 손상되었지만 토하는 바람에 저승에는 가지 않았다. 불면증, 신경성 위궤양, 관절염 등으로 약을 달고 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었다.




  자식이 2개월 재학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런 나날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검정고시에는 운 좋게 일찍 합격했지만 학원에도 안 가고 독학으로 공부를 하니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았다. 3수생이 되어 대학입학원서를 어디로 낼까 고민 중일 때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처음 가출할 때 써놓고 간 그 편지, 정말 잘 썼더라. 형은 국문학과로 학사편입을 했으니 학문을 할 게다. 너는 시나 소설을 쓰도록 해라. 신문에 보니까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라는 데가 있던데 여기에 원서를 넣는 게 어떻겠니? 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도 네 글재주를 그렇게 칭찬해주셨고.”




  어머니의 예상은 맞았다. 본고사에 국어와 영어가 있고 수학이 없어 나는 합격을 했다. 이후 순전히 운이 좋아서 대학 4학년 때 신춘문예 시 당선 소식을 어머니께 전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름휴가 때 쓴 중편소설로 1천만원 상금 KBS방송문학상에 당선되었고, 6개월 뒤에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식을 김천의 문방구점 ‘희망사’의 여주인 ‘울 엄마’ 박두연 씨에게 알려드릴 수 있었다. 당선 소식에, 이 세상에 내 어머니만큼 기뻐한 이는 없었다.




  어머니의 생신은 음력 6월 1일, 한창 더울 때이다. 그 더운 여름날의 생신 때도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연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나만큼 어머니에게 불효를 한 자식이 또 있을까. 내가 쓴 글마다 칭찬을 해주신 어머니, 저승에서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장하다, 내 아들’ 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리라.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썼던 시를 한 편 읽어본다.



  

   어머니의 두통약 뇌신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면

  세상은 졸음에 겨워 노랗게 되곤 했습니다

  가게 한 귀퉁이에서 어린 저는 졸고

  어머니 이맛살에는 깊은 골이 패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괭이질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누르고

  나중에는 손등으로 이마를 때리고 때립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포 나중에는 하루에 다섯 포

  머릿속에 거머리가 기어다니는 것 같구나

  

  약의 양이 느는 동안 어머니는 늙어갔습니다

  노란 셀로판지 하늘 붉은 색으로 바뀌면

  어머니는 마침내 저를 깨우고

  저는 약국에 가 뇌신을 사오곤 했습니다

  한 사발 물과 함께 이맛살이 평평해지면

  어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약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시면서

  아이고, 머리가 안 아프니 살 것 같다

  아들 보며 희미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어느 날은 뇌신 한 포 몰래 먹어 봤더니

  세상이 금방 노랗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오래오래 잠들고 싶었을 따름이었지요




  * 뇌신 : 내 어린 날의 두통약으로 ‘뇌신’과 ‘명랑’이 유명하였다. 흔히

              ‘노신’으로 불린 이 약은 내성이 강해 점점 더 많이 먹어야 효과가 나타났다.



  아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쓴 시.





  주검과는 대화할 수 없다

  

  운명하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의 말에 감정이 없다

  죽음이 참 단순하구나

  숨쉬던 이 숨쉬지 않고

  말하던 이 말하지 않을 뿐

  나 볼일 없는지 눈을 뜨지 않는다

  

  주검과 나 더 나눌 얘기가 없는 거다

  어머님 전 상서, 이승하 본제입납

  때로는 마지못해, 때로는 보고 싶어

  편지를 올리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부쳐본들 수취인 불명

  승하야 보아라 하고 시작하는 답장을

  주검은 쓸 수가 없다

  

  침묵의 언어로 어머니 앞에서 약속한다

  숨쉬는 모든 생명의 운명을 관觀하겠다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아픔을 철綴하겠다고

  우선은 어머니의 죽음을 이웃에 알리고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도 해야 한다

  그리고는 모든 기억의 종이를 꾸깃꾸깃 구겨야 한다

  

  ㅡ<연꽃마을>(20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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