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실 수필집 /작품해설 /
문학과 음악, 미술에 빠진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知性의 중년여인 고뇌, 그리고 순수의 열정
김 우 영 (작가. 한국소설가협회)
1. 들어가며
마치 키 작은 아이가 맨 앞줄에 서 듯 연필의 길고 짧은 길이에서부터 나란히 줄지어 누워있던 필통 속의 연필. 키 큰 연필의 꽁무니에 몽당연필은 마치 덧니처럼 엎드려 있었다. 미끈미끈 잘 생긴 연필을 젖혀두고 아이는 이빨로 물어뜯은 듯한 몽당연필을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였다.
아마도 새 것이 아닌 오랫동안 손때 묻은 물건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젠 쓸모없는 것에 대해 쉽게 버릴 수 없는 미련 때문이었을까. 너무 작아서인지 조개비만한 아이의 손에서조차도 몇 번이고 스르르 미끄러지던 몽당연필을 깎아 필통에 넣어주면 마치 한 겨울에 수백 장의 연탄을 광에 재운 듯한 뿌듯함이 들곤 하였다.
『꿈꾸는 몽당연필』중에서
위의 글은 『시갈(詩의 밭갈이)』이란 아호로 활동하는 이현실 수필가의 ‘꿈꾸는 몽당연필’이란 수필 중 일부이다.
시갈 이현실은 『꿈꾸는 몽당연필』에서 아이의 몽당연필을 보며 유년시절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마치 한 겨울에 수 백 장의 연탄을 광에 재운 듯한 뿌듯함을 느낀다며 오버랩핑(overlapping)으로 승화된 격조 있는 문장으로 성공시키고 있다.
유년의 깊숙한 곳에서 매미채로 곤충을 잡듯 상념을 끌어올려 우리들의 단상(斷想)양념으로 자리매김하는 독특한 구성주의(構成主義)문장을 취하고 있다. 지난 1921년 한때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에서 유행했던 극히 추상적인 제3차원적인 구성으로 예술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시갈 이현실은 이 글에서 소박하며 진솔한 언어와 리얼한 필치의 문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유년시절 개울가에서 물 한 모금 입안에 헹구고 뱉어내는 청청한 그 물 맛 그대로 말이다. 그야말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애오라지 언지지장言短志長이거늘······.
2. 문학과 음악, 미술에 푹 빠진 카오스(chaos)시대 知性의 숯돌
저 유명한 ‘F.Q.호라티우스'는 그의 명저(名著) 시법(詩法)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글은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시갈의 수필 맛을 보면서 대체적으로 들어나는 내재성 의미는 바로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갈이 이번에 선 보인『꿈꾸는 몽당연필』은 편안하고 쉬우면서 자연스럽게 시나브로 풀어낸다. 여기에 시갈의 수필미학이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내고 있다.
어느 예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자체가 예술 덩어리 그 자체이다. 음악이 나오면 흥얼거리며 발을 흔들고, 멋진 그림을 보면 무아경에 도취되고, 감동적인 영화 한 편에 울고 웃는 모습, 좋은 시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부류가 바로 우리네 인간의 본연이다.”
시갈의 수필 전편에는 인터넷카페 음악방의 칸쏘네
‘LaBuenaVida-Despuesdetodo’ 흐르는가 하면, 잘 구운 토스트 같은 재즈가 상큼한 멜로디로 승화되어 가슴을 적신다.
또 젊은 시절 담배연기 자욱한 음악 감상실 안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듣고, 장엄하고 애절한 클래식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선율에 매료되기도 한다.
시갈은 덕수궁 미술관에 가기도 한다. 6,25때 월남한 최영림과 그의 스승 무나카타 시코의 그림이 전시되어 오늘날 현대적 미감으로 승화시킨 일본의 전통적인 판화가라는 작품을 감상한다.
그런가하면 시갈은 실레마을의 유정을 찾기도 한다. 최초의 자연주의 단편소설을 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사실주의 문학을 표현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자연과 인간의 본능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노래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등의 1920년 대 우리나라 단편소설을 만나곤 한다.
수필은 일종의 간접적인 고백이다. 시갈은 주변의 것들을 자신의 문장에 도입하여 이야기를 실실이 풀어간다. 그러다가 결국 내 안의 화자로 끌어들여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고뇌를 들려준다. 이래서 시갈의 『꿈꾸는 몽당연필』은 오늘도 고뇌하며 흰 백지위에서 허허실실 춤추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음악과 미술, 문학에 푹 빠져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지성의 숯돌 중년여인의 고뇌,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바로 그녀 시갈 이현실 수필가이다.
시인 괴테의 말처럼 ‘세상에서 해방되는 것은 예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한 세상과 확실한 관계를 갖는 데에도 예술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이미 시갈은 터득한 모양이다
시갈은 『먼 하늘에 풍선을』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녀시절의 나는 막연하지만 어떤 신비한 분위기의 대상에 몰두해 있었던 것 같다. 괴테와 루 살로메와 릴케를 사랑하던 문학소녀였던 나. 나는 그때 가히 천재 소리를 듣던 독일문학 번역 작가 전혜린의 마성에 푹 빠져 있었다. 흑진주처럼 새까만, 겁먹은 듯한 커다란 그녀의 두 눈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광기로 번득이는 정신을 보았고 나는 그녀를 무작정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시갈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을 읽으면서 31세의 불꽃같은 예술인생을 살다간 전혜린이 떠올랐다. 전혜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상의 양식’을 읽고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비를 받아들이자’ 라는 글의 감성에 빠져 수시로 우산도 없이 걸어 다니는 사유思惟 깊은 소녀였다.
전혜린은 시인 엘리엇에 빠졌고, 오오든의 명 강의에 미쳐 훨덜린이나 괴테의 대사에 감화되기도 했다. 파우스트 대사에 나오는 메피스토의 ‘온갖 이론은 회색이고 나무는 녹색이다’ 에 몰입하기도 했다.
지난至難한 시대의 강을 건너며 표류 해버린 전혜린. 전혜린의 영혼이 시갈 이현실에게 전이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문학과 음악, 미술에 빠져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지성의 중년여인의 고뇌, 그리고 순수한 열정의 주인공이 바로 시갈 이현실 수필가라면 자연스러운 연결일지도 모르겠다.
옛 말에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했던가? 아는 만큼 고뇌가 뒤 따른다는 말이다. 예술을 사랑하며 고뇌하는 지성의 여인 전혜린과 시갈 이현실을 잠깐 대비하면서 시대의 아픔과 공유를 느낀다. 오, 처연한 허기를 어찌하란 말인가!
3. 시갈의 수필 맛 풀어보기
운당 구인환 교수는 시갈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삶의 성찰과 그 지평을 보여주는 수필이 수록된 수필 작단에 내놓은 수필의 향기 높은 촐림(叢林)이다. 산수에 침잠(沈潛)하되 영탄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삶을 성찰하되 관념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서정과 성찰의 산문화에 독자를 흡인하고 있다.(中略) 이현실과 동행에서 이현실 수필만의 독특한 향기가 고달픈 삶의 위안이 되고 반려의 손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 장안의 지가가 올리는 베스트의 길목에서 세인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또 새로운 지평을 향해 창작의 열기를 더하기를 빈다.”
-꿈꾸는 몽당연필-
순간순간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내 속의 열기는 때로는 이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조차 나를 대범하게 만든다. 이런 극단적인 성격 때문에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뒤돌아 볼 때쯤에는 이미 나 자신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상해 있곤 했다. 무엇이든 차고 넘치면 빠진다고 한다.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은 결국은 술독에 빠지고 마는 것처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의 말처럼 마음을 모두 비운 것일까.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심령의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듯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아무에게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가슴 속 분노가 아직도 들끓어 나를 잠재우지 않고 있다. 이미 흘러가버린 지난 일들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있기 때문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조금도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어도 좋다는 오기 하나로 짱짱하게 나를 무장하고 있었다.
- ‘야무진 막대기’중에서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서글픔이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감정의 물을 퍼내어 표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어떠한 현상 앞에서 더러 화를 내는 것이다. ‘야무진 막대기’를 꺼내어 일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참으며 그런 화근 덩어리를 가슴속 깊은 항아리에 담고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무릇 인생이란 이런 세월의 주름 속에서 회한(悔恨)하며 자성하며 살아간다.
시갈은 수필의 전편에 걸쳐 흐름의 문맥은 주변 환경과 사물에 대하여 통찰력이 뛰어나다. 주변의 것들을 보며 문장을 전개하면서 세상과 교유하고 인생을 말하고 있다. 결국 시갈의 화자(話者)는 제2, 3의 화자이지만 결국은 내 안의 것들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문득 ‘제임스 볼드윈’의 저 유명한 어록이 생각이 난다.
“예술은 일종의 간접적인 고백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생존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주변과 자신의 모든 얘기와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고뇌를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모퉁이 돌이 되었을까. 내 곁을 스친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쉼을 나누는 돌이 되었을까. 한 발자국 내딛으며 다음 길을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퉁이 돌이 되었을까.
행여 누군가의 가슴에 턱턱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어 남아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가슴에 남아있던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21:42)”
모난 돌멩이 하나가 쓰임을 받는 머릿돌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조바심하며 땀흘려왔을까. 나는 건축자가 내다버린 쓸모없는 돌은 아니었던가. 가슴에 휭 하니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 ‘모퉁이 돌’중에서
수필가이자 시인인 시갈의 가슴만큼 여리디 여린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른 봄날 아침이슬처럼 고우며 앳되고, 초 여름밤 어스름한 달빛처럼 촉촉하며, 가을날 저녁나절에 내려 눈썹을 적시는 는개이며, 한겨울에 초가 처마에 맺혀 툭 떨어지는 고드름 같은 처연한 것이 시갈 이현실의 마음이다.
위 글에서 시갈은 그간 살아오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모난 돌이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쉬어가는 그런 그늘막이 되어야 하는데 행여 건축자가 쓰다가 쓸모없어 버리는 돌은 아니었는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관조하고 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찌 남을 위한 쉼돌로만 살아 갈 수 있을까? 자신이 모퉁이 돌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는 겸손 지덕 한 자세, 그리고 앞으로 쉬어가고 기대여 갈 수 있는 삶이길 희구하는 시갈 수필 환치(還置)의 미학(美學).
여기에 있어 우리는 오늘도 시갈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갈을 보면서 사람이 되려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돌이 되려거든 자석 같은 붙는 돌이 되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이다.
4. 나가기
문장은 꼭 아름다워야 할까? 글은 꼭 유려하며 멋져야 할까? 하는 물음에는 지금껏 ‘이거다!’ 라고 명쾌하게 말한 예는 없다. 이런 인문학(人文學)의 괴리감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들에 화두(話頭)이다. 모름지기 학문이란 평생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오늘도 미완의 애물단지를 끌어안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지 모른다.
시갈은 제2, 3자의 화자(話者)를 통한 글의 객관성을 확보한 다음 결국 자신과 대화를 통한 물음과 답변 속에서 진리를 터득해나간다. 이러한 문장의 레토릭(Rhetoric)으로 끌어나가는 구성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아(自我)를 발견하여 참된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은 나의 중심이요 나는 우주의 원자인 셈이다. 겸손함과 고른 자세,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분석을 통한 자기 삶의 성찰과 그 지평을 보여주는 휴머니즘((humanism) 미학이 바로 시갈 이현실 수필문학의 주조사상(主潮思想)이다.
여행과 삶을 통한 결 고운 서정의 산수에 침잠(沈潛)하되 영탄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삶을 성찰하되 관념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천평(저울) 아비투스(Habitus)이어야 한다.
시갈 이현실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이 장안의 낙양지가를 올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얼음의 땅을 지나면 파란 새싹이 돋듯 세월 따라 양 날개를 달고 아름답거나 혹은, 고독하거나 하는 예술세상을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마치 태양이 꽃을 물들이는 것과 같이 예술은 우리네 인생을 붉게 물들이기에 그렇다.
2008.5.
대한민국 중원 땅 문인산방에서 김우영 쓰다.
문학과 음악, 미술에 빠진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知性의 중년여인 고뇌, 그리고 순수의 열정
김 우 영 (작가. 한국소설가협회)
1. 들어가며
마치 키 작은 아이가 맨 앞줄에 서 듯 연필의 길고 짧은 길이에서부터 나란히 줄지어 누워있던 필통 속의 연필. 키 큰 연필의 꽁무니에 몽당연필은 마치 덧니처럼 엎드려 있었다. 미끈미끈 잘 생긴 연필을 젖혀두고 아이는 이빨로 물어뜯은 듯한 몽당연필을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였다.
아마도 새 것이 아닌 오랫동안 손때 묻은 물건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젠 쓸모없는 것에 대해 쉽게 버릴 수 없는 미련 때문이었을까. 너무 작아서인지 조개비만한 아이의 손에서조차도 몇 번이고 스르르 미끄러지던 몽당연필을 깎아 필통에 넣어주면 마치 한 겨울에 수백 장의 연탄을 광에 재운 듯한 뿌듯함이 들곤 하였다.
『꿈꾸는 몽당연필』중에서
위의 글은 『시갈(詩의 밭갈이)』이란 아호로 활동하는 이현실 수필가의 ‘꿈꾸는 몽당연필’이란 수필 중 일부이다.
시갈 이현실은 『꿈꾸는 몽당연필』에서 아이의 몽당연필을 보며 유년시절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마치 한 겨울에 수 백 장의 연탄을 광에 재운 듯한 뿌듯함을 느낀다며 오버랩핑(overlapping)으로 승화된 격조 있는 문장으로 성공시키고 있다.
유년의 깊숙한 곳에서 매미채로 곤충을 잡듯 상념을 끌어올려 우리들의 단상(斷想)양념으로 자리매김하는 독특한 구성주의(構成主義)문장을 취하고 있다. 지난 1921년 한때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에서 유행했던 극히 추상적인 제3차원적인 구성으로 예술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시갈 이현실은 이 글에서 소박하며 진솔한 언어와 리얼한 필치의 문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유년시절 개울가에서 물 한 모금 입안에 헹구고 뱉어내는 청청한 그 물 맛 그대로 말이다. 그야말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애오라지 언지지장言短志長이거늘······.
2. 문학과 음악, 미술에 푹 빠진 카오스(chaos)시대 知性의 숯돌
저 유명한 ‘F.Q.호라티우스'는 그의 명저(名著) 시법(詩法)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글은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시갈의 수필 맛을 보면서 대체적으로 들어나는 내재성 의미는 바로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갈이 이번에 선 보인『꿈꾸는 몽당연필』은 편안하고 쉬우면서 자연스럽게 시나브로 풀어낸다. 여기에 시갈의 수필미학이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내고 있다.
어느 예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자체가 예술 덩어리 그 자체이다. 음악이 나오면 흥얼거리며 발을 흔들고, 멋진 그림을 보면 무아경에 도취되고, 감동적인 영화 한 편에 울고 웃는 모습, 좋은 시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부류가 바로 우리네 인간의 본연이다.”
시갈의 수필 전편에는 인터넷카페 음악방의 칸쏘네
‘LaBuenaVida-Despuesdetodo’ 흐르는가 하면, 잘 구운 토스트 같은 재즈가 상큼한 멜로디로 승화되어 가슴을 적신다.
또 젊은 시절 담배연기 자욱한 음악 감상실 안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듣고, 장엄하고 애절한 클래식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선율에 매료되기도 한다.
시갈은 덕수궁 미술관에 가기도 한다. 6,25때 월남한 최영림과 그의 스승 무나카타 시코의 그림이 전시되어 오늘날 현대적 미감으로 승화시킨 일본의 전통적인 판화가라는 작품을 감상한다.
그런가하면 시갈은 실레마을의 유정을 찾기도 한다. 최초의 자연주의 단편소설을 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사실주의 문학을 표현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자연과 인간의 본능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노래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등의 1920년 대 우리나라 단편소설을 만나곤 한다.
수필은 일종의 간접적인 고백이다. 시갈은 주변의 것들을 자신의 문장에 도입하여 이야기를 실실이 풀어간다. 그러다가 결국 내 안의 화자로 끌어들여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고뇌를 들려준다. 이래서 시갈의 『꿈꾸는 몽당연필』은 오늘도 고뇌하며 흰 백지위에서 허허실실 춤추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음악과 미술, 문학에 푹 빠져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지성의 숯돌 중년여인의 고뇌,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바로 그녀 시갈 이현실 수필가이다.
시인 괴테의 말처럼 ‘세상에서 해방되는 것은 예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한 세상과 확실한 관계를 갖는 데에도 예술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이미 시갈은 터득한 모양이다
시갈은 『먼 하늘에 풍선을』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녀시절의 나는 막연하지만 어떤 신비한 분위기의 대상에 몰두해 있었던 것 같다. 괴테와 루 살로메와 릴케를 사랑하던 문학소녀였던 나. 나는 그때 가히 천재 소리를 듣던 독일문학 번역 작가 전혜린의 마성에 푹 빠져 있었다. 흑진주처럼 새까만, 겁먹은 듯한 커다란 그녀의 두 눈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광기로 번득이는 정신을 보았고 나는 그녀를 무작정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시갈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을 읽으면서 31세의 불꽃같은 예술인생을 살다간 전혜린이 떠올랐다. 전혜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상의 양식’을 읽고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비를 받아들이자’ 라는 글의 감성에 빠져 수시로 우산도 없이 걸어 다니는 사유思惟 깊은 소녀였다.
전혜린은 시인 엘리엇에 빠졌고, 오오든의 명 강의에 미쳐 훨덜린이나 괴테의 대사에 감화되기도 했다. 파우스트 대사에 나오는 메피스토의 ‘온갖 이론은 회색이고 나무는 녹색이다’ 에 몰입하기도 했다.
지난至難한 시대의 강을 건너며 표류 해버린 전혜린. 전혜린의 영혼이 시갈 이현실에게 전이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문학과 음악, 미술에 빠져 카오스(chaos)시대에 만난 지성의 중년여인의 고뇌, 그리고 순수한 열정의 주인공이 바로 시갈 이현실 수필가라면 자연스러운 연결일지도 모르겠다.
옛 말에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했던가? 아는 만큼 고뇌가 뒤 따른다는 말이다. 예술을 사랑하며 고뇌하는 지성의 여인 전혜린과 시갈 이현실을 잠깐 대비하면서 시대의 아픔과 공유를 느낀다. 오, 처연한 허기를 어찌하란 말인가!
3. 시갈의 수필 맛 풀어보기
운당 구인환 교수는 시갈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삶의 성찰과 그 지평을 보여주는 수필이 수록된 수필 작단에 내놓은 수필의 향기 높은 촐림(叢林)이다. 산수에 침잠(沈潛)하되 영탄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삶을 성찰하되 관념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서정과 성찰의 산문화에 독자를 흡인하고 있다.(中略) 이현실과 동행에서 이현실 수필만의 독특한 향기가 고달픈 삶의 위안이 되고 반려의 손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 장안의 지가가 올리는 베스트의 길목에서 세인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또 새로운 지평을 향해 창작의 열기를 더하기를 빈다.”
-꿈꾸는 몽당연필-
순간순간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내 속의 열기는 때로는 이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조차 나를 대범하게 만든다. 이런 극단적인 성격 때문에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뒤돌아 볼 때쯤에는 이미 나 자신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상해 있곤 했다. 무엇이든 차고 넘치면 빠진다고 한다.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은 결국은 술독에 빠지고 마는 것처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의 말처럼 마음을 모두 비운 것일까.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심령의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듯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아무에게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가슴 속 분노가 아직도 들끓어 나를 잠재우지 않고 있다. 이미 흘러가버린 지난 일들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있기 때문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조금도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어도 좋다는 오기 하나로 짱짱하게 나를 무장하고 있었다.
- ‘야무진 막대기’중에서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서글픔이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감정의 물을 퍼내어 표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어떠한 현상 앞에서 더러 화를 내는 것이다. ‘야무진 막대기’를 꺼내어 일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참으며 그런 화근 덩어리를 가슴속 깊은 항아리에 담고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무릇 인생이란 이런 세월의 주름 속에서 회한(悔恨)하며 자성하며 살아간다.
시갈은 수필의 전편에 걸쳐 흐름의 문맥은 주변 환경과 사물에 대하여 통찰력이 뛰어나다. 주변의 것들을 보며 문장을 전개하면서 세상과 교유하고 인생을 말하고 있다. 결국 시갈의 화자(話者)는 제2, 3의 화자이지만 결국은 내 안의 것들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문득 ‘제임스 볼드윈’의 저 유명한 어록이 생각이 난다.
“예술은 일종의 간접적인 고백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생존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주변과 자신의 모든 얘기와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고뇌를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모퉁이 돌이 되었을까. 내 곁을 스친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쉼을 나누는 돌이 되었을까. 한 발자국 내딛으며 다음 길을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퉁이 돌이 되었을까.
행여 누군가의 가슴에 턱턱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어 남아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가슴에 남아있던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21:42)”
모난 돌멩이 하나가 쓰임을 받는 머릿돌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조바심하며 땀흘려왔을까. 나는 건축자가 내다버린 쓸모없는 돌은 아니었던가. 가슴에 휭 하니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 ‘모퉁이 돌’중에서
수필가이자 시인인 시갈의 가슴만큼 여리디 여린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른 봄날 아침이슬처럼 고우며 앳되고, 초 여름밤 어스름한 달빛처럼 촉촉하며, 가을날 저녁나절에 내려 눈썹을 적시는 는개이며, 한겨울에 초가 처마에 맺혀 툭 떨어지는 고드름 같은 처연한 것이 시갈 이현실의 마음이다.
위 글에서 시갈은 그간 살아오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모난 돌이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쉬어가는 그런 그늘막이 되어야 하는데 행여 건축자가 쓰다가 쓸모없어 버리는 돌은 아니었는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관조하고 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찌 남을 위한 쉼돌로만 살아 갈 수 있을까? 자신이 모퉁이 돌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는 겸손 지덕 한 자세, 그리고 앞으로 쉬어가고 기대여 갈 수 있는 삶이길 희구하는 시갈 수필 환치(還置)의 미학(美學).
여기에 있어 우리는 오늘도 시갈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갈을 보면서 사람이 되려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돌이 되려거든 자석 같은 붙는 돌이 되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이다.
4. 나가기
문장은 꼭 아름다워야 할까? 글은 꼭 유려하며 멋져야 할까? 하는 물음에는 지금껏 ‘이거다!’ 라고 명쾌하게 말한 예는 없다. 이런 인문학(人文學)의 괴리감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들에 화두(話頭)이다. 모름지기 학문이란 평생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오늘도 미완의 애물단지를 끌어안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지 모른다.
시갈은 제2, 3자의 화자(話者)를 통한 글의 객관성을 확보한 다음 결국 자신과 대화를 통한 물음과 답변 속에서 진리를 터득해나간다. 이러한 문장의 레토릭(Rhetoric)으로 끌어나가는 구성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아(自我)를 발견하여 참된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은 나의 중심이요 나는 우주의 원자인 셈이다. 겸손함과 고른 자세,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분석을 통한 자기 삶의 성찰과 그 지평을 보여주는 휴머니즘((humanism) 미학이 바로 시갈 이현실 수필문학의 주조사상(主潮思想)이다.
여행과 삶을 통한 결 고운 서정의 산수에 침잠(沈潛)하되 영탄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삶을 성찰하되 관념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천평(저울) 아비투스(Habitus)이어야 한다.
시갈 이현실의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이 장안의 낙양지가를 올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얼음의 땅을 지나면 파란 새싹이 돋듯 세월 따라 양 날개를 달고 아름답거나 혹은, 고독하거나 하는 예술세상을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마치 태양이 꽃을 물들이는 것과 같이 예술은 우리네 인생을 붉게 물들이기에 그렇다.
2008.5.
대한민국 중원 땅 문인산방에서 김우영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