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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
   http://www.poet.or.kr/lsh




미주문학 가족 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틈을 내어 카페에 들렀습니다.
미주문인협회 송상옥 회장님이 보내주신 초청장을 받아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에 가서 여러분을 뵐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캠프의 자리에서 여러분들 뵈옵고, 제가 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벌써부터 큰 걱정입니다.
오랜만에 들른 김에 서간체로 쓴 에세이 한 편 올려놓고 가겠습니다. 어머니에게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어머니께 올립니다.

종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는 허리와 무릎이 아파 창 밖을 자주 내다보고 계시겠지요. 뼈 마디마디를 바늘로 찌른다는 신경통,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얻은 허리통. 세월의 아픔은 이런 육신의 고통보다 더하게 어머니의 가슴을 저미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고 -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 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허리를 다치신 어머니

받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어머니가 가볍다'란 제목으로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시를 쓴 것도 벌써 여러 해 전입니다. 어머니의 연세를 헤아려봅니다. 1931년 생이시니 올해 일흔넷이로군요. 경북 상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초, 20대 1의 경쟁을 뚫고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경성사범은 전국 각 학교에서 수석한 학생만 원서를 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인 학생이 대다수이고 경북에서 딱 4명이 합격했다는 그 어려운 시험에 붙었을 때 어머니 인생은 훤히 트인 대로 같았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졸업하면 동경여자사범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지요.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이 약속은 일단 무산됩니다.
해방 후 학교가 서울사대부속중학교(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로 바뀌었는데 그 학교에서 어머니는 전교 2, 3등을 하셨습니다. 음악과 체육을 못해 1등은 못해보았다고요.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형은 어머니의 두뇌를 물려받았나 봅니다. 저는 공부도 못했고 사춘기 때 가출을 일삼은 문제아였는데 말입니다.
외할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은 어머니의 인생을 급전직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합니다. 200표 차이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되어 빚을 많이 지자 학비를 서울로 보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가 장녀가 아니라 장남이었다면 외할아버지는 4학년을 막 마친 자식을 집으로 내려오라고 했을까요. 어머니는 알거지가 된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장녀로서의 역할을 다합니다. 경북도내 '준교사 자격시험'에 1등으로 합격해 상주읍내 중앙초등학교의 5학년 담임이 되신 것입니다. 열아홉 살, 친구들이 서울사대부중 졸업반일 때 말입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행해진 것은 1950년 5월 30일,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회의원이 된 외할아버지는 의기양양하여 등원합니다. 한 달 안에 6·25전쟁이 발발할지, 피난을 못 간 상태에서 한강인도교가 폭파될지, 인공치하가 된 서울에 있다 납북이 될지, 아내와 일곱 자식이 기아선상에 허덕이게 될지…… 어느 하나도 모른 채 말입니다. 외할아버지는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노랫말 그대로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맨발로 절며 절며 그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경주 근교 양남에서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외할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빚만 잔뜩 지고 사라진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여섯 동생의 입에 풀칠을 해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진 빚도 갚아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교사생활을 10여 년 하시며 절대적인 궁핍과 절망적인 배고픔의 세월을 견뎌내셨습니다. 큰 동생이 서울공대 건축과에, 작은 동생이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으로는 두 동생 학비를 댈 수 없어 작은 동생이 대학을 2년만 다니고 중도 하차케 한 것은 외할아버지가 당신한테 그랬었기에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상주에서 멀지 않은 청리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지서 주임으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 2년의 연애 끝에 결혼합니다. 어머니는 형과 저, 그리고 막내 선영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되지요. 이쯤에서 어머니의 고생은 끝났어야 했는데 슬하에 2남 1여를 둔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30년 고생이 시작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부임지 경북 김천에서 경찰복을 벗은 아버지는 어머니가 꾸려가는 가게를 도우며 반실업자의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당시 경찰은 참으로 박봉이어서 어머니가 보다못해 초등학교 내 매점에서 시작, 학교 앞에다 문방구점을 내면서 김천에 정착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포항으로 전근을 가 가족과 1년 동안 헤어져 살게 되었는데 또다시 오지인 영양으로 발령을 받자 경찰직을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 일을 돕기는 했지만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아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을 것입니다. 거기다 사법고시 패스로 자신의 실패한 생을 보상해주리라 믿었던 큰아들은 법학과를 졸업하고 문학을 하겠다고 국문학과로 편입하고, 작은아들은 고등학교도 안 다니고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고, 막내는 고교시절 내내 공부를 전폐하고 철학책을 끼고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도 학교에는 안 가고……. 해소병을 앓아 밤새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나의 할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회오리바람을 잠재우며 30년 동안 거의 하루 빠짐없이 가게문을 열고서 초등학생들한테 연필과 공책을 판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대구의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해오신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겨울 내내 동상으로 고생하시고, 매일 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신음을 내뱉으며 잠드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 순간을 갖고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손은 깊은 계곡이다
물 흐르지 않는

내 손은 약손 승하 배는 똥배
배 쓸어주시던 손길 참 부드러웠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황폐하다
첫사랑을 잃고 서럽게 울었을 때
손수건 꺼내 내 눈물 닦아주셨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자갈밭이다
30년 동안 공책과 연필을 파신

그 손으로 무친 나물의 맛
그 손으로 때린 회초리의 아픔
이제 곧 동이 터 오면
세 번째 수술을 받으시는 날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어떤 손] 전문

서정주 시인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겠지만 저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습니다. 50년 결혼생활 동안 남편을 대신해 바람막이와 방파제의 역할을 하신 어머니의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살을 저는 사랑합니다. 김천시청 앞 문방구점 '희망사'의 주인, 상주 제2대 국회의원 박성우의 장녀 박두연. 어머니의 여생이 조금은 덜 고통스러워야 할 텐데…….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합니다. 어머니, 빨리 이 비가 그치면 좋겠습니다.

2004년 6월 20일

소자 승하 올림.

2004-07-04 18:39:14 / 61.100.1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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