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16 23:23

주는 손 받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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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손 받는 손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심화반(주) 김병규


설을 며칠 앞둔 겨울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웃 고을 산간지대와 해안지대에서는 20년 만에 많은 눈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고,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지며, 양식장의 숭어가 몽땅 얼어죽어 농어민들이 울상이란다. 이곳 전주만은 겨우 발자국 눈만 내리고 영하 10도 이하의 찬바람만 온 시가지를 쓸고 있었다.

칼바람 부는 이 추운 겨울, 돌보는 이 없이 한끼 식사를 걱정하며 얼음장같은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돕는 일은 더불어 사는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이다. 송천새마을금고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어드리고 희망을 주기 위하여 사랑의 좀도리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모은 쌀과 현금을 전하게 되었다.

트럭 위에는 40㎏ 포장의 쌀포대를 가득 싣고 현금은 봉투로 만들었다. 쌀은 본점을 비롯하여 솔래·중앙·신동지점들에다 쌀 두지를 설치하여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성미였다. 현금 또한 며느리가 드린 시아버지의 용돈에서, 딸이 준 친정어머니의 주머니 돈에 이르기까지 전 회원들이 정성껏 모은 성금이었다.

쌀포대는 아파트나 자연부락 단위로 설치된 경로당에 주로 배달하게 되었다. 차가 멈추는 곳에서 경로당까지 거리가 있을 경우는 어깨에 메거나 두 사람이 동시에 들고 가게 되어서 찬바람도 비켜가고 온 몸에는 촉촉하게 땀이 흘렀다. 경로당이 2층이나 3층일 경우는 더욱 힘겨웠으나 쌀의 무게 속에는 회원들의 정성이 담겨있고, 쌀포대를 끌어안고 좋아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보람으로 영글었다.

현금봉투는 무의탁 노인,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받는 사람,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기울어질 듯 허름한 칸막이 집, 오른편 칸에서는 90이 넘는 할머니가 나오셨다. 왼편 칸 방에는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얼음장같이 싸늘하고 컴컴한 방에서 90고령의 할아버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청력과 시력을 잃고 세상과는 담을 쌓고 생명만 유지하는 듯 보였다. 한 지붕 두 가족, 그들은 각각 사는 두 세대였다. 봉투를 받아들고 고맙다 되풀이 말하는 두 노인의 모습이 애잔하게 보였다.

폐품을 수집하여 연명하는 구순(九旬) 노부부를 찾았다. 100평 남짓한 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집에서 모아온 유리병이며 상자, 폐지를 고르고 계셨다. 집과 대지를 은행에 잡혀 자식의 병원비를 충당했으나 자식은 회생 가망이 없고 명목상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의 복지혜택도 받지 못하는 어려운 노부부였다. 난방일랑 생각도 못하고 유일한 생명줄인 폐품만 정리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였다. 봉투를 받는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36살이던 아버지가 건축현장에서 추락사한 다섯 살 최웅 군을 찾았다. 남편의 사고보상금을 챙겨 야반도주한 비정한 엄마 때문에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다. 최 군은 30대 초반의 고모가 보호하고 있었다. 봉투를 받아든 고모의 눈에 맺힌 눈물에서 혈육의 정이 보였다. 저 눈물 속에 최 군을 끝까지 보호하리란 무언의 약속이 느껴져 안심하고 돌아서면서도 어린 자식을 버리고 간 비정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청상(靑孀)에 유일한 혈육인 17살 외아들을 불치의 병으로 잃고, 병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는 Y여사를 찾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의 대소변까지 받아내면서 파출부로 생계를 이어가는 40대 초반의 Y여사, 시어머니를 씻겨드렸다면서 손을 닦으며 나오는데 수건사이로 보이는 투박하고 거친 손결이 여사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힘겨운 생활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의연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밝은 모습을 보이는 여사의 인격에 존경심이 솟았다. "아주머니, 이 봉투 받아주세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 젊고 건강하니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서 도와주세요." 손사래를 치며 완강하게 사양하는 모습이 체면치레나 허세가 아니었다. "받으세요." "아닙니다." 실랑이 끝에 억지로 호주머니에 넣어드렸다. 여사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고운 손에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쓸어모아 듬뿍 부어드리고 싶었다.

많은 세상 사람 중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고,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이 있다. 주는 손이 아름답고 보람차며 자랑스럽지만, 받는 손도 부끄러워 말고 떳떳하게 받아야할 일이다. 주는 손의 정성에 감사하며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굳세게 사는 것이 주는 손에 대한 보답일 테니까.
             (200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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