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4 15:22

날아다니는 길

조회 수 20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날아다니는 길



                                                                                                                                                                                                                  이 월란



1.
봇짐 지고 미투리 삼아 넋 놓고 걸었었지 않나. 굴렁대로 굴리며 놀더니 네 발 도롱태를 달아 눈이 번쩍
뜨여 미친 말처럼 달리기 시작했지. 방갓 아래 세월아 네월아 눈 맞추던 백수같은 노방꽃들도 이젠 머리
채 잡혀 끌려가는 바람난 아낙네처럼 KTX의 차창 밖에서 눈 한번 못맞추고 휙휙 낚아채여 허물어지고
날아가던 새들도 주둥이를 헤 벌리고 쳐다보았지.


2.
어둠이 가로수나 지붕들을 우걱우걱 삼켜버리고 나면 잘 들어봐, 길들의 소리가 들려. 꿈의 유골이 다닥
다닥 귀를 맞추며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 그래서 은빛 날개를 달고 산호 속같은 미리내 숲길을 날아다니
고 있지. 그것도 모자라 지상의 모든 길들이 합세해서 액정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온 그 날 모반의 세월
을 감아 쥐고 아이디 몇 자로 익명의 굿길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어. 구석기 시대를 꿈꾸는 하이퍼 텍스트
의 언어로 부활한 사랑을 속삭여. 야반도주를 해.


3.
정보 유출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장을 받은 그 날 클릭한 2~3초 후에 태평양의 갱도를 빛처럼 날아온 녹음
된 목소리가 전해 주는 인증번호를 받고 난 내가 복제당하거나 도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육감에 맨발의 잠옷바람으로 문을 박차고 나갔더니 오래 누워 있던 길들이 가등 아
래 허연 뼈만 남기고 사라졌더군. 어둠의 정적을 물고 서 있던 노상방뇨된 꽃들이 길들이 넋 놓고 달아난
허공에서 뿌리채 흔들리며 멍하니 쳐다보았어.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06 이월란 2008.03.03 161
» 날아다니는 길 이월란 2008.03.04 208
1804 바닷가 검은 바윗돌 강민경 2008.03.04 233
1803 병상언어 이월란 2008.03.05 122
1802 흔들리는 집 이월란 2008.03.06 199
1801 獨志家 유성룡 2008.03.08 129
1800 봄밤 이월란 2008.03.08 132
1799 울 안, 호박순이 성백군 2008.03.09 244
1798 Daylight Saving Time (DST) 이월란 2008.03.10 157
1797 꽃씨 이월란 2008.03.11 163
1796 노래 하는 달팽이 강민경 2008.03.11 306
1795 여든 여섯 해 이월란 2008.03.12 244
1794 가시내 이월란 2008.03.13 221
1793 바다를 보고 온 사람 이월란 2008.03.14 165
1792 장대비 이월란 2008.03.15 294
1791 별리동네 이월란 2008.03.16 115
1790 봄의 가십(gossip) 이월란 2008.03.17 163
1789 페인트 칠하는 남자 이월란 2008.03.18 340
1788 망부석 이월란 2008.03.19 152
1787 목소리 이월란 2008.03.20 171
Board Pagination Prev 1 ...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 114 Next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