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골 안동을 다녀와서

2005.01.17 09:47

김영옥 조회 수:94 추천:28

  양반고을 안동을 다녀와서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김영옥


온 산을 곱게 물들인 단풍잎도 내년을 기약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떠나느라 한창 바쁜 늦가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반에서 안동으로 문학기행을 간다고 해서 선뜻 따라나섰다.  
  전주서 안동하회마을까지는 꽤 먼 거리여서 생각 보다 늦게 도착했다. 안동 땅을 들어서기 전까지는 큰 산맥자락이라서 산간지방이려니 했던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들도 제법 넓었고 지리적으로도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그 맛이 좋아 소문난 안동 간 고등어자반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곧바로 하회마을 탈 굿마당으로 갔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서 유명한 하회 별신굿을 다 볼 수는 없었고 양반 선비마당만 볼 수 있었다. 양반과 선비들이 서로 자기들이 지체가 높고 학문이 깊다고 다투며 우쭐대다가, 양기에 좋다는 별것 아닌 것을 놓고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꼴을 탈춤으로 재미있게 풀어내는데 지배층인 지식인들의 위선과 가식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여러 가지 모양의 탈을 쓰고 한바탕 신명나게 쏟아 놓는 해학과 풍자에 관객들 모두가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다. 탈을 쓰고 상민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그 당시의 탈춤놀이는 억눌려있던 민중들의 숨구멍을 터주고 양반들의 잘못된 의식구조를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훌륭한 선조 들의 지혜에 감탄하였다. 놀이가 끝나고 갖가지 탈을 벗고 인사를 하는 탈 연수생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이어서 더욱 힘찬 박수로 노고를 격려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회 마을을 돌아보았다. 보드라운 흙 길을 밟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런 큰 기와집들이 마을 중심에 자리하고있으면서 반갑게 맞이한다.
[양진당]은 보물 제306호로 4백년이 훨씬 넘도록 풍산 류씨의 큰 종가로 전해온다. 집이 보통 집보다 높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로 연결되는 여러 개의 방중에 사랑채 댓돌 위가 잘 보이는 쪽 방의 조그만 들창 문은 안채에서만 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방 댓 뜰에 놓인 손님신발만 보고도 식객이 몇인지 파악하고 음식상을 차려낼 수 있게 되어있다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 참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보물 제132호로 지정된 [충효당]은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류성룡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지은 종택인데, 좁고 긴 마루에 촘촘한 난간이 특이했다. 마루마다 난간을 해놓은 것은 그 당시 버선발로 다니는 선비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칠까봐 난간을 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북촌댁] [남촌댁]같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원지정사] [빈연정사] [옥연정사] 등은 류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고 좋은 책을 저술하기 위해 서재로 사용하고, 정사에서 은퇴한 후에도 정양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 집들을 둘러보고 느낀 것은, 공통적으로 기둥 사이의 방이나 마루를 땅에서 두 뼘 정도 띄워놓고 지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 통풍이 잘되어 집을 오래도록 보존하려함이 아니었나 싶었다. 현재 우리들이 살고있는 아파트는 삼십 년도 못되어 허물고 다시 짓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미련함을 보고 그분들은 무어라고 나무라시려는지.  
긴 돌담을 돌아 [류씨 주 가옥]의 높은 대문 앞에 섰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방 쪽의 전면에 울타리를 만들어 사랑방 손님과 안방의 부녀자들이 마주치지 않게 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남녀가 유별했음을 볼 때, 요즘사람들이 조금은 배웠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헝클어진 요즘시대가 너무 걱정스럽다.
나는 발길을 옮기면서 상상을 했다. 머리에는 검은 갓을 반듯하게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잘 생긴 선비들이 떠오른다. 높은 마루에 앉아 글을 읽다가 조용히 일어나 누구인데 이곳을 찾아 왔느냐고 묻는다면, 당신들 같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훌륭한 지혜를 배우고 싶어 왔노라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참으로 하회 마을은 지리적으로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낙동강 상류줄기가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르고 강 건너 기암절벽의 부용대와 강가의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한 경치에 흠뻑 취해, 지는 해를 붙잡고 앙탈을 부리고싶은 심정이었다. 그 누가 봐도 살기 좋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일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한 컷 찍었다.
하회마을에 풍산 류씨가 처음 터전을 잡게된 일화는 내 가슴에 머물면서 늘 생각나게 한다. 원래 살고있던 사람들이 타지방에서 들어오려는 류씨들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들어와 살려면 두 해 동안 그 마을 밖에서 적선을 많이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류씨들은 그 두 해 동안 이웃에게 많은 적선을 행하고서야 하회마을로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었단다.  옛날 분들도 한마을에 같이 살자면 서로 돕고 베풀고 살아야 온 마을이 화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타관에서 들어오는 양반인 류씨들의 성품을 시험해보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선조 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악을 행하면 삼사 대까지 보응을 받고, 선을 행하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성경 말씀이 더욱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풍산 류씨 선조가 청렴하고 친절하면서 남에게 후히 베풀며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반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지 않나 싶다. 몇 해 전 내한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이 마을을 방문했다는 화보를 보았다. 정말로 안동하회양반 마을은 보고 느낄 것이 많은 유서 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가을 해는 돌아갈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간 김에 도산서원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경치 좋은 명산 속에 자리한 여러 채의 서원은 잡다한 세상사를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한 이퇴계 선생과 그 제자인 유생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분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오늘날 많은 지식계급에 있는 학문을 했다는 사람들의 돈으로 학문을 파는 위선자들을 보고 얼마나 한탄할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도산서원을 떠나왔다. 연일 뉴스보도에 순수해야할 학생들이 수능시험에 높은 점수를 얻으려고 핸드폰으로 커닝하여 시험답안을 쓰려다 덜미가 잡혀 온통 나라안이 시끄럽다. 지식인인 어른들까지 돈을 받고 합세하였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정말 진짜 양반이라고 자처하려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학대하며 우쭐대고 으스대는 위선자자가 아니라, 나보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자들을 배려하면서 잘 알려주고 또 나누어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손잡고 어깨를 함께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상념에 잠겼다. 안동 땅 양반고을을 접하고 오는 오늘 여행은 알찬 수확을 한 짐 가득 지고 오는 기분이다.    
                                               (200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