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보시옵소서

2005.02.20 20:15

김학 조회 수:61 추천:7

할아버지 보시옵소서
                                                                    김학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무사히 저승에 도착하셨는지요? 옛날 농경사회시절처럼 설 차례상도 푸짐하게 차리지 못하고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셔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사는 누추한 아파트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동 호수를 찾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
할아버지, 설이나 추석명절 또는 제사 때 이곳 이승까지 오시려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하시는지요? 진짜 오시기는 꼭 오시는 건가요? 저는 그게 늘 궁금하더군요.

할아버지께서 이승을 떠나신 지 어느덧 55년째입니다. 6.25 동란이 나던 해 돌아가셨으니까 벌써 반백 년이 훨씬 지났군요. 돌이켜 보니 그 해가 제 나이 여덟 살 때였습니다. 그런 제가 환갑진갑 다 지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올 설에는 지난해 8월에 태어난 첫 손주까지 와서 차례를 모셨으니 얼마나 즐겁고 흐뭇하셨습니까? 함께 오셨던 할머니나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셨지요?

할아버지,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제가 어렸을 적에는 생일이면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시루떡도 만들어주시고 미역국도 끓여주시는 등 생일잔치를 베풀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일잔치를 찾아보기 어렵답니다. 잘해야 제과점에서 사온 생일 케이크에 나이만큼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합니다!"란 노래 한 곡 부르면 끝이랍니다. 시대가 바뀌자 풍속도 엄청나게 변해버렸습니다. 생일을 맞은 주인공이나 축하하는 가족들도 으레 그러려니 여깁니다. 이런 변화를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할아버지, 제 아이들 2남1녀가 모두 서울에 삽니다. 지난해 2월에 결혼한 고명딸 선경이는 12월에 첫아들을 낳았는데, 출가외인이라 시댁으로 설쇠러 갔습니다. 큰아들 내외와 손주 동현이, 그리고 작은아들 창수는 집으로 왔습니다. 동현이네 식구들은 고속열차로 오는 바람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창수는 승용차로 서울에서 전주까지 오는데 무려 7시간이나 걸렸답니다. 평소에는 2시간 반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말입니다. 올 설에는 귀성객들이 분산하여 비교적 소통이 잘 된 편이었는데도 그런 실정입니다. 할아버지, 몇 년 지나면 할아버지 내외분과 아버지께서도 명절이나 제사 때 서울로 가셔야할지 모르겠어요. 한가한 노부모들이 서울로 가서 차례를 모시는 역 귀향(逆 歸鄕)이 유행이라지 않아요?
할아버지,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 차리는 법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정보화시대인데 언제까지 농경사회 유풍(遺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가난하던 농경사회시절엔 명절이나 제삿날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조상님들께 대접한 다음,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조상님들의 일화를 되새기며 즐겁게 먹고 마시곤 했지요. 또 아침이면 동네사람들과도  나눠먹었고요. 옛날에는 그게 미덕이었습니다. 주는 마음도 즐겁고 받는 마음도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잘 살게 된 요즘에는 제사음식을 나눠먹을 이웃이 없습니다. 그 음식을 나눠주어도 반가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옛날처럼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장만해야 할까요?
할아버지, 지금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엄청난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고 있답니다. 그런데도 옛날처럼 제사상을 차려야 할까요? 생일잔치 상이 현대화되었듯이 제사상이나 차례상도 바꾸면 안될까요? 요즘 젊은이들은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를 따지는 상차림부터 싫어합니다. 그런 까다로운 절차가 제사를 모셔야 할 젊은이들의 조상숭배정신을 훼손시키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현도 시속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 요즘 사람들은 건강관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작게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게 요즘 사람들의 생활태도입니다. 웰빙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요? 밥이나 김치조차 싫어해서 해마다 쌀 소비가 줄어든답니다.  
축문이나 지방도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세계적으로 우수한 한글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도 축문이나 지방을 한자로 써야한단 말입니까?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조차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 중에서 축문을 제대로 쓰거나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당연히 한글로 바꾸어야할 것입니다. 지방은 케이크에다 '할아버지 신위'라고 바로 쓰면 어떨까요?
할아버지,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생일상처럼 케이크와 싱싱한 과일로 차린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편리할까요? 그뿐입니까? 주부들은 음식장만노동에서 풀려나 좋지요, 젊은이들은 식성에 맞는 상차림이어서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삿날은 친척들이 모여 정을 두텁게 다지는 조상숭배의 날이자 집안화목축제가 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신학문을 공부하시고 고향의 초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내신 분이니 제 뜻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저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겠지만 입을 꼭 다물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오니 할아버지께서 저승에서부터 이 문제를 공론화 하시면 어떨까요?
할아버지, 저승에서는 e-mail이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가요? 그런 게 있으면 참 편리할 텐데…….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들 하는 모양이군요. 할아버지, 또 추석 때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내내 평안히 계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