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2005.03.08 17:24

박영임 조회 수:37 추천:4

세탁기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중급반 박영임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새봄부터,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 겨울에도, 밤낮으로 귀한 손이 되어 언제나 도와주던 세탁기! 손꼽아 헤아려보니 나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2년이다. 세탁기는 오랜 세월 집안의 청결과 온 가족이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얼마 전부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영 시원치 않아 불안해하였는데 드디어 '펑!'하더니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외관상으로는 아직도 20년은 족히 사용해도 될법한데,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난 성싶어 A/S요청을 했다. 다른 데는 크게 이상이 없지만 부속품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며 모터를 돌려주는 부속품이 낡아서 이제는 제 기능을 못하고 멈추어 버렸다고 했다. 큰일이었다.

담당 요원은 참 오랫동안 관리를 잘 해주었다고 칭찬해주었다. 오래된 모델이라서 부품이 생산되는지 확인하니 다행이 수원공장에 남아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부품 값이 문제였다. 10만원이 훨씬 넘는다니, 쇠고기나 돼지고기도 부위별로 가격이 다르듯이 세탁기 부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가장 비싼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결정은 내 몫이 되어 쉽게 판단을 못 내리고 망설이니, 요즘은 30∼40만원정도면 새것으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명함을 건네주고 일어섰다. 먼 곳에 출타중인 남편에게 연락을 해보았으나 역시 나에게 일임해버렸다.

몇 달 전에 T, V도 세탁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나 부품생산이 단종 되어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새것으로 구입한 대리점을 찾았다. 세탁기는 크기와 종류도 다양하고 칼라도 여러 종류였다. 요즘에는 예약 주문만이 가능하다는 드럼세탁기가 제일 인기라니 또다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값이 만만치 않은 세탁기가 왜 품절이냐고 묻자 요즘 30% 가격특별할인 때문에 전국적으로 주문이 밀린다니 난감했다.
최신형 드럼 세탁기를 주문하고선 한동안 손으로 힘든 빨래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집안의 가전제품들이 모두 10년이 지난 것들이라서 이제 어느 것이 멈추어 서서 돈을 달라고 떼를 쓸지 은근히 걱정이기도 하다.

아직도 따스한 봄은 멀었나보다. 손으로 빨래를 하려니 여간 차갑고 힘든 게 아니다. 그 동안 세탁기에 의존하고 얼마나 편히 살았던가? 주문이 폭주하기 때문에 대략이라고 말은 했지만, 대리점에서 보내준다며 약속한 날짜보다 벌써 엿새가 더 지났다. 옆에서 언제나 도와줄 때의 고마움을 절절이 느끼며 나날이 드럼세탁기 소식을 기다린다.
어린 시절, 장에 가신 어머니가 장바구니에 무엇을 가득 담아오시려나 해질 무렵까지 들길을 바라보며 기다렸고, 초등학교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밤에 가지고갈 준비물을 사러 장에 가신 뒤 어둠이 내려도 돌아오시지 않으면 남폿불을 켜놓고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던 마음처럼, 핸드폰의 벨소리와 집 전화기에 귀를 대고 기다리는 나날이다.

멈춰버린 세탁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근사한 드럼세탁기가 유연한 소리를 내며,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어머나! 입을 다물기도 전에 아침 6시30분에 맞추어놓은 알람시계가 울어댄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는지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2005.02월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