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과 미소의 미
2005.03.13 07:16
친절과 미소의 미(美)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고급반 김영옥
며칠 전 소형 청소기의 먼지 통을 빼놓고 사용하다 고장을 내서, 만든 회사의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차림의 아가씨가 미소 띤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도 가볍게 웃으며 고장접수창구로 갔다. 창구에도 3명의 아가씨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기분이 참 좋았다.
한시간 정도 걸린다기에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그들의 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출입문이 닫혀 있을 때가 없다시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에게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안녕히 가십시오."를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받는 사람들의 표정은 왜 그리도 무표정인지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시간이 되었기에 기기를 수리하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복잡한 기계를 열어놓고 일하는 젊은이들도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친절했다. 짜증날 일인데도 모두가 웃으며 일하고있었다. 회사에서 친절교육을 시킨 점도 있겠지만 늘 그런 생활을 하다보면 몸에 배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미소와 함께 친절함을 나타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젊은이들은 앞으로 행복한 삶이 이어지리라 생각되었다.
돌아오면서 일년 전쯤 이웃나라 일본에 갔을 때의 일들이 생각났다. 종교적인 국제적 모임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갔다. 일본의 5대 도시에서 열린 행사였다. 공항에서 협회지부를 거처 작은 구역회관으로 가서 각자 개인 집으로 배치되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 식에서 식사 대접에 이르기까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하여 우리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다.
내가 묵게된 집은 나와 동갑인 69세 엄마와 40세 중반쯤 된 미혼인 딸과 둘이 사는 집이었다. 딸은 우리들을 맞으려고 인사말정도의 한국어를 조금 배웠다고 한다. 자녀가 몇이냐고 손짓으로 반벙어리 짓을 했더니 금방 알아차리고 잘 정돈된 사진첩을 꺼내와 보여주었다. 4남1녀를 두었으나 남편은 사별한 가정임을 알았다. 음식에 관한 것을 물을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마냥 듣고 웃기만 하다가 요리 책을 들고나와 알고 보니 기껏 소금인 것을 알고 손을 맞잡고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우리들은 서로의 가족상황이나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얼마의 아는 단어와 몸짓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이 간 친구는 나더러 일급 연기자라고 놀리며 재미있어 했다. 매일 밤 이 집 저 집에서 초대받아 식사 대접과 선물도 받았다. 따뜻한 목욕물 데워주기에서부터 부족함이 없이 챙겨주는 것에 우리 둘은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였. 네 명의 여인들은 친한 친구가 되어 피곤도 잊고, 매일 밤이 깊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소와 친절은 만사형통이었다.
그 집 이웃에 사는 한 분은 4일 동안을 50km가 넘는 요코하마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대회장까지 자기 가족들은 전동차로 보내고 우리들은 승용차로 왕래하게 해주는 친절도 베풀었다. 대회장에서는 타국에서 온 모든 이들에게 4일간 맛있는 점심 도시락을 제공해 먹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기쁘게 했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별로 와서 선물을 주었는데 4일동안 내가 받은 것만 해도 100여 점이 넘었다. 그 선물들은 주로 손수 만든 것들이어서 더욱 정겹고 고마웠다. 날씨가 좀 추운 날은 방석까지 챙겨주는가 하면, 사진기가 없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촬영해주는 친절함은 어떻게 표현할까. 7만 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가 시종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정말 낙원 같은 분위기였다.
마지막날 밤, 외식과 시내 구경을 하고 늦게 돌아와서 짐을 챙기는데 우리들 가방이 모자람을 알고, 5일간 손님 대접하고 먼길 오가느라 피곤할 테지만 12시가 넘었는데도 재봉틀을 꺼내놓고 예쁜 천으로 들고 가기 편하게 끈까지 단 가방 2개를 만들어 주었다. 떠나 올 때 일은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이 모이는 먼 곳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딸의 등을 도닥거리며 "어머니 모시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다시 만나자."는 나의 인사말에 내 손을 잡고 울어버리는 모습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가식 없는 친절은 잘 변하지 않는 빨강 색 장미꽃처럼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친절은 받는 이로 하여금 고마움과 기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나도 그분들처럼 아무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미소와 친절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니 우리들이 지켜야할 가장 귀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육체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미소와 친절은 많이 나타낼수록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에게 고분고분하면 어딘가 약해 보이고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못난 생각과, 교만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동안 나의 마음 자세가 한없이 부끄럽다. 지금부터라도 겸손한 태도로 꼭 다문 입은 '김치'로 바꾸고 뻣뻣한 목은 나긋나긋한 버들가지처럼 변화시켜 미소와 친절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겠다.
(2005년 3월)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고급반 김영옥
며칠 전 소형 청소기의 먼지 통을 빼놓고 사용하다 고장을 내서, 만든 회사의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차림의 아가씨가 미소 띤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도 가볍게 웃으며 고장접수창구로 갔다. 창구에도 3명의 아가씨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기분이 참 좋았다.
한시간 정도 걸린다기에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그들의 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출입문이 닫혀 있을 때가 없다시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에게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안녕히 가십시오."를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받는 사람들의 표정은 왜 그리도 무표정인지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시간이 되었기에 기기를 수리하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복잡한 기계를 열어놓고 일하는 젊은이들도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친절했다. 짜증날 일인데도 모두가 웃으며 일하고있었다. 회사에서 친절교육을 시킨 점도 있겠지만 늘 그런 생활을 하다보면 몸에 배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미소와 함께 친절함을 나타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젊은이들은 앞으로 행복한 삶이 이어지리라 생각되었다.
돌아오면서 일년 전쯤 이웃나라 일본에 갔을 때의 일들이 생각났다. 종교적인 국제적 모임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갔다. 일본의 5대 도시에서 열린 행사였다. 공항에서 협회지부를 거처 작은 구역회관으로 가서 각자 개인 집으로 배치되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 식에서 식사 대접에 이르기까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하여 우리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다.
내가 묵게된 집은 나와 동갑인 69세 엄마와 40세 중반쯤 된 미혼인 딸과 둘이 사는 집이었다. 딸은 우리들을 맞으려고 인사말정도의 한국어를 조금 배웠다고 한다. 자녀가 몇이냐고 손짓으로 반벙어리 짓을 했더니 금방 알아차리고 잘 정돈된 사진첩을 꺼내와 보여주었다. 4남1녀를 두었으나 남편은 사별한 가정임을 알았다. 음식에 관한 것을 물을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마냥 듣고 웃기만 하다가 요리 책을 들고나와 알고 보니 기껏 소금인 것을 알고 손을 맞잡고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우리들은 서로의 가족상황이나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얼마의 아는 단어와 몸짓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이 간 친구는 나더러 일급 연기자라고 놀리며 재미있어 했다. 매일 밤 이 집 저 집에서 초대받아 식사 대접과 선물도 받았다. 따뜻한 목욕물 데워주기에서부터 부족함이 없이 챙겨주는 것에 우리 둘은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였. 네 명의 여인들은 친한 친구가 되어 피곤도 잊고, 매일 밤이 깊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소와 친절은 만사형통이었다.
그 집 이웃에 사는 한 분은 4일 동안을 50km가 넘는 요코하마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대회장까지 자기 가족들은 전동차로 보내고 우리들은 승용차로 왕래하게 해주는 친절도 베풀었다. 대회장에서는 타국에서 온 모든 이들에게 4일간 맛있는 점심 도시락을 제공해 먹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기쁘게 했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별로 와서 선물을 주었는데 4일동안 내가 받은 것만 해도 100여 점이 넘었다. 그 선물들은 주로 손수 만든 것들이어서 더욱 정겹고 고마웠다. 날씨가 좀 추운 날은 방석까지 챙겨주는가 하면, 사진기가 없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촬영해주는 친절함은 어떻게 표현할까. 7만 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가 시종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정말 낙원 같은 분위기였다.
마지막날 밤, 외식과 시내 구경을 하고 늦게 돌아와서 짐을 챙기는데 우리들 가방이 모자람을 알고, 5일간 손님 대접하고 먼길 오가느라 피곤할 테지만 12시가 넘었는데도 재봉틀을 꺼내놓고 예쁜 천으로 들고 가기 편하게 끈까지 단 가방 2개를 만들어 주었다. 떠나 올 때 일은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이 모이는 먼 곳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딸의 등을 도닥거리며 "어머니 모시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다시 만나자."는 나의 인사말에 내 손을 잡고 울어버리는 모습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가식 없는 친절은 잘 변하지 않는 빨강 색 장미꽃처럼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친절은 받는 이로 하여금 고마움과 기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나도 그분들처럼 아무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미소와 친절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니 우리들이 지켜야할 가장 귀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육체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미소와 친절은 많이 나타낼수록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에게 고분고분하면 어딘가 약해 보이고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못난 생각과, 교만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동안 나의 마음 자세가 한없이 부끄럽다. 지금부터라도 겸손한 태도로 꼭 다문 입은 '김치'로 바꾸고 뻣뻣한 목은 나긋나긋한 버들가지처럼 변화시켜 미소와 친절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겠다.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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