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랑
2005.03.25 08:12
소중한 사랑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신영숙
내게는 소중한 사랑 하나가 있다.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고 퍼내도 줄지 않은 사랑. 꽃보다도 더 예쁘고 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에게 처음으로 할머니라는 호칭을 갖게 해준 아이 현서, 이름만큼이나 예쁜 아이다.
첫 딸을 시집보내고 조용히 기다리기 4년, 오랫동안 우리를 긴장하게 한 뒤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아이. 애를 가졌다는 사위의 들뜬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남아있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열 달을 채우고 출산을 하기 위해 집에 와 있을 때의 일이다. 병원에 가면 친정에 와 운동 안하고 편히 있으니 뱃속의 아이만 크고 쉽게 출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저녁이면 배낭에 물병하나 담아 딸을 데리고 집 근처 공원을 몇 바퀴씩 돌았다.
9월 초순, 공원의 밤 공기는 더운 바람이 가시고 제법 선선해 상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연꽃은 다 졌지만 미쳐 못다 핀 몇 송이의 꽃들이 연잎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고, 연꽃에선지 뿌리에선지 독특한 향내가 은은히 풍겨 나왔다. 물위로 군데군데 솟구친 나무 기둥 위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왜가리인지, 두루미인지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 밤에 왜 둥지로 돌아가지 않고 앉아 있을까? 낮에 먹은 먹이가 부족해서 그럴까?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보기엔 퍽 낭만적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뿜는 전주 덕진공원의 음악분수는 시민에게 베푸는 시 당국의 사려 깊은 서비스다. 분수가 솟구칠 때는 모든 사람이 불빛에 비친 황홀한 음악분수 쇼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딸아이는 운동도 좋았겠지만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볼거리들로 인해 태교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열심히 걷기 운동을 반복하고 병원에 갔지만 아직도 운동이 부족하다고 나무랐다. 드디어 딸아이가 모성애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엄마가 다니는 건지산(乾止山)에 같이 가볼래. "처녀시절 등산이라면 싫어했던 딸애가 뱃속의 태아만 커 간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겁을 먹었던지 조금 높은 곳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큰 용기를 내어 과일 한 개와 물 한 병을 담아 건지산에 올랐다. 힘들어 보였지만 딸아이는 잘 참고 오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눈총이 따가웠다. 지혜 없이 만삭된 임산부를 데려왔다는 뜻이리라.
그 날밤, 진통이 와서 24시간의 고생 끝에 자연 분만으로 3.5kg의 건강한 여아를 출산했다. 그제야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게 딸 가진 엄마의 부담스런 마음이다. 집에서 산후조리를 무려 70일이나 하고 저희가 사는 청주로 돌아갔다. 애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왜 그리도 허전하던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훔쳐내야 했다.
첫 손주로서 기다리다 낳았고, 오랫동안 돌보다 보내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손주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노심조사(勞心焦思)하면서 날마다 전화기에 눈길이 멎었다. 그게 괜한 걱정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지만.
그랬던 현서가, 세 돌을 보내고 집 나이로 다섯 살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씩씩한 사내 동생을 보았다. 처음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간은 엄마를 빼앗겼다는 시새움에 먹지도 않고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동생이 아무리 귀찮게 해도, 긴 머리를 잡아당겨도 뿌리치는 일이 없이 잘 참아낸다.
3월 들어 유아원을 보냈는데 아침이 늘 시끄럽단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우는걸 억지로 차에 태우지만 돌아올 때는 웃고 들어온단다. "엄마! 내일은 한 번만 울고 올게." 꼭 우는 게 규칙이나 되는 것 같다. 머지 않아 웃으면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차에 오를 날이 올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로 한글공부도 곧잘 한단다. 전화로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 들으려면 몇 번씩 시도해야 한다. "할머니! 보고 싶다!" 이 한 마디를 하고는 수화기를 놓고 달아나 버린다. 현서를 생각하면 늘 가슴에 분홍빛 사랑이 피어오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난, 현서에게 사랑을 주고 대신 기쁨을 얻어온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두 배로 크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손자는 기쁨덩어리다.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신영숙
내게는 소중한 사랑 하나가 있다.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고 퍼내도 줄지 않은 사랑. 꽃보다도 더 예쁘고 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에게 처음으로 할머니라는 호칭을 갖게 해준 아이 현서, 이름만큼이나 예쁜 아이다.
첫 딸을 시집보내고 조용히 기다리기 4년, 오랫동안 우리를 긴장하게 한 뒤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아이. 애를 가졌다는 사위의 들뜬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남아있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열 달을 채우고 출산을 하기 위해 집에 와 있을 때의 일이다. 병원에 가면 친정에 와 운동 안하고 편히 있으니 뱃속의 아이만 크고 쉽게 출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저녁이면 배낭에 물병하나 담아 딸을 데리고 집 근처 공원을 몇 바퀴씩 돌았다.
9월 초순, 공원의 밤 공기는 더운 바람이 가시고 제법 선선해 상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연꽃은 다 졌지만 미쳐 못다 핀 몇 송이의 꽃들이 연잎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고, 연꽃에선지 뿌리에선지 독특한 향내가 은은히 풍겨 나왔다. 물위로 군데군데 솟구친 나무 기둥 위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왜가리인지, 두루미인지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 밤에 왜 둥지로 돌아가지 않고 앉아 있을까? 낮에 먹은 먹이가 부족해서 그럴까?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보기엔 퍽 낭만적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뿜는 전주 덕진공원의 음악분수는 시민에게 베푸는 시 당국의 사려 깊은 서비스다. 분수가 솟구칠 때는 모든 사람이 불빛에 비친 황홀한 음악분수 쇼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딸아이는 운동도 좋았겠지만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볼거리들로 인해 태교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열심히 걷기 운동을 반복하고 병원에 갔지만 아직도 운동이 부족하다고 나무랐다. 드디어 딸아이가 모성애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엄마가 다니는 건지산(乾止山)에 같이 가볼래. "처녀시절 등산이라면 싫어했던 딸애가 뱃속의 태아만 커 간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겁을 먹었던지 조금 높은 곳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큰 용기를 내어 과일 한 개와 물 한 병을 담아 건지산에 올랐다. 힘들어 보였지만 딸아이는 잘 참고 오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눈총이 따가웠다. 지혜 없이 만삭된 임산부를 데려왔다는 뜻이리라.
그 날밤, 진통이 와서 24시간의 고생 끝에 자연 분만으로 3.5kg의 건강한 여아를 출산했다. 그제야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게 딸 가진 엄마의 부담스런 마음이다. 집에서 산후조리를 무려 70일이나 하고 저희가 사는 청주로 돌아갔다. 애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왜 그리도 허전하던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훔쳐내야 했다.
첫 손주로서 기다리다 낳았고, 오랫동안 돌보다 보내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손주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노심조사(勞心焦思)하면서 날마다 전화기에 눈길이 멎었다. 그게 괜한 걱정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지만.
그랬던 현서가, 세 돌을 보내고 집 나이로 다섯 살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씩씩한 사내 동생을 보았다. 처음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간은 엄마를 빼앗겼다는 시새움에 먹지도 않고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동생이 아무리 귀찮게 해도, 긴 머리를 잡아당겨도 뿌리치는 일이 없이 잘 참아낸다.
3월 들어 유아원을 보냈는데 아침이 늘 시끄럽단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우는걸 억지로 차에 태우지만 돌아올 때는 웃고 들어온단다. "엄마! 내일은 한 번만 울고 올게." 꼭 우는 게 규칙이나 되는 것 같다. 머지 않아 웃으면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차에 오를 날이 올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로 한글공부도 곧잘 한단다. 전화로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 들으려면 몇 번씩 시도해야 한다. "할머니! 보고 싶다!" 이 한 마디를 하고는 수화기를 놓고 달아나 버린다. 현서를 생각하면 늘 가슴에 분홍빛 사랑이 피어오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난, 현서에게 사랑을 주고 대신 기쁨을 얻어온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두 배로 크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손자는 기쁨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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