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지던 날

2005.03.28 21:27

남궁금자 조회 수:51 추천:9

또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지던 날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남궁금자


  화창한 봄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의 키 작은 매화 한 그루가 꽃을 피웠다. 아파트 창문을 통해서 보았던 매화꽃에게 다가가서 살며시 말을 걸었다.
  "언제 나 몰래 그렇게 귀한 꽃을 피웠니?"
  꽃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잔잔한 향기를 내뿜을 뿐. 꽃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길고 긴 추위, 모질고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피워낸 결실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의 인생 또한 어쩐지 저런 꽃과 닮은꼴이 아닐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언제나 숨어서 살아있는 법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분명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 날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 나는 내내 울고있었다. 차창 밖은 어둑어둑했고 차는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4년이란 길고 긴 보람과 고생을 함께 했던 학창시절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날씨조차 정말 추웠다. 눈물이 흘렀다. 학업을 다 마쳤다는 후련함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기쁨 또한 아니었다. 어쩌면 또 하나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암담함,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화의 장면처럼 마구 스쳐 가는 기억들에 밀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던 것이다.

1999년 1월 4일. 내 인생의 첫 번째 울타리가 무너진 날이다. 24년 1개월이라는 기나긴 직장생활을 마쳤을 때, 내 나이는 펄펄 뛰는 마흔 다섯이었다. IMF가 터지고 각 직장은 구조조정을 통해서 경쟁력과 경제력을 확보하려고 난리였던 그 시절!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딱 걸리고 말았다. 청춘을 바쳐온 내 직장에서 나와야만 했다. 부족한 나를 감싸주던 울타리를 허물어야만 했다.
결혼 전에 나는 서른 셋이 될 때까지, 아니 동생들이 다 자립할 때까지 친정의 처녀가장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셨지만 건강이 몹시 안 좋으셨던 관계로 수입이 없었다. 때문에 내 직장은 동생 셋을 감당하고 부모님의 의료보험 혜택까지 제공해주던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황금거위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내 직장, 천직으로 알고 목숨처럼 아끼며 다녔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그 어떤 위로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직장에서 떠나 올 때는 당당한 마음이었다. '사람은 들어 갈 때와 나올 때가 중요한 거야. 지금이야. 꼭 나와야 할 때 잘 나오는 거야. 잘 한 거야. 나도 좀 쉬고, 후배들에게 기회도 주고, 국가의 정책에도 일조하고. 그리고 나만이 아니고 수십 명이 같이 사표를 썼지 않는가?' 나는 온갖 이유를 달아 퇴직을 합리화시키며 내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남편의 꼬임에 넘어 간 것만 같아 화가 났다.

내가 끝까지 직장에 다니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남편은 말했다. "당신이 안나가겠다고 버티면 누군가가, 혹시 남자 직원이 나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집안은 파탄이야. 우리는 둘이 다니니까 하나 그만 둬도 사는데 지장 없잖아? 그리고  이런 판국에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야. 상대적 박탈감을 생각해봐." 등등의 말로 내게 사표를 종용했다. 그 당시의 정서만을 생각하면 백 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청춘을 바친 직장에서 말이 명예퇴직이지 쫓겨난 거나 다름없이 떠밀려 나왔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직장의 간부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한 명이라도 더 퇴출시키려고 안달이었다. 어쩌면 남은 동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남게 되어 안심하면서.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며 나왔다는 것이 억울했다. 참을 수 없었다. 때로는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 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 다 키웠겠다 열심히 다녀 보겠다고 고향에서 이 곳 전주로 발령 받아 온지 2개월만의 일이었다. 내가 이 아파트로 이사온 지는 그보다 딱 한 달 전의 일이었고. 아는 사람도 없이 막막했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3월이 왔다. 남편은 직장에 가고, 세 딸들은 학교에 갔다. 여느 때 같으면 부지런을 떨며 출근해야 할 시간에 나만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나는 슬펐고 점점 쇠약해져 갔다. 어쩌다 올려다 본 천장에서 벽지의 꽃무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커다란 전등도 따라 도는가 싶더니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이래서는 안 돼.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히며 이렇게 살수는 없어. 나를 바꾸자.' 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사다 쌓아 놓고 풀었다. 과목당 세 번씩은 되풀이하여 풀었다. 지우고 또 지우고, 모르는 것은 표시해 두었다가 남편이 퇴근해오면 같이 공부했다. 1999년 11월 17일 드디어 수능을 치렀다. 하루 종일 치르는 시험! 눈이 쏙쏙 들어갈 정도로 피곤한 나날이었다. 시간에 쫓겨 모르는 문제는 두 번 다시 읽어볼 기회도 없이 찍고 넘겨야 하는 시험 치르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대학에 진학 할 때는 이런 과정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당시 1년 선배부터 만학도 전형을 통해서 공부가 가능한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00학번 새내기!!  나는 마흔 여섯에 대학생이 되었다. "애들아! 아줌마도 이 수업 듣거든! 아줌마 좀 잘 부탁하자!" 누군지 모르는 대상에게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다행히 직장에서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많이 접했던 경험이 있어서 젊은 학생들과 학교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던 학교생활이었다. 그 많은 리포트 작성, 시험들, 교수님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했던 학창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 날 4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몇몇 학생들과 저녁을 먹었다. 젊은 학생들의 포부를 들으며 서로 안부하는 것 잊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그리고는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차안에서 이렇듯 학창시절의 크고 작고, 좋았고 싫었던 추억들이 일시에 몰려왔던 것이다. 영화의 장면처럼. 퇴직 후의 5년이란 세월이 한 순간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이 버스를 타고 가는 마지막 길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 마음 속에는 슬픔의 눈물이 연못을 이루었다. '이제 이 길을 다닐 필요가 없을 거야. 4년이나 버스 타고 다녔던 정든 이길! 이제 이 길은 다시 올 일이 없을 거야.'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또 하나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아픔이었다. 다시 새로운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언제나 숨어서 살아있는 법! 퇴직은 내게 대학생이란 아름다운 추억을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 학기 졸업고사를 치르고 그렇게 허물어졌던 울타리는 이듬해 또 작은 울타리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전북대학교의 평생교육원이라는 곳에 울타리를 쳤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소박하게 1주일에 단 하루, 딱 수요일만의 울타리를 쳤다. 나는 이 작은 울타리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사귀면서 또 다른 평생의 추억거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도 학창시절에 마지막 버스를 탔던 그 날을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그래서 이 글을 준비하던 어젯밤 내내 울었고, 워드를 치는 오늘 아침에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외출시간이 다가오는데 거울을 보니 눈물 자국으로 얼굴이 엉망이다. 그래도 동사무소를 향해 씩씩하게 나설 것이다. 가서 요가를 하고 나면 언제 울었냐 싶게 오늘 하루가 또 싱싱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