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기 전에

2005.04.08 10:05

배윤숙 조회 수:33 추천:2

봄이 가기 전에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배윤숙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 종다리도 봄이라 노래하잔다."
  하도 오래된 동요라서 가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봉동 친구네 밭이랑 논두렁에 쑥이 예쁘다며 유혹을 해서 나섰다.

  반갑게 맞이하는 친구랑 차 한 잔을 마시자마자 텃밭으로 나갔다. 햇볕에 그을릴까봐 모자를 눌러쓰고 그것도 모자라 수건을 늘여 덮고, 장갑을 끼었다. 도시아줌마 손톱 속에 흙 들어간다면서 놀려댔지만 냉이나 달래가 그냥 풀 같았다.  친구가 캐 담은 바구니를 슬쩍 훔쳐보고는 혼잣말로 많구나 했다.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이는 나물들을 보노라니 오늘저녁 찬은 푸짐하려니 싶었다. 귀밑 침샘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논두렁에 나있는 쑥이 먹을 만하게 크던데 거기 가보자."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낄 만큼 더웠지만 이왕에 땀 흘린 것이어서 그냥 따라나섰다. 밭 끄트머리쯤에 처 놓은 철사 울타리 벌어진 곳으로 나가니 금세 논이었다.
늦가을부터는 곶감 만드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는 친구는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해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닌 거 다 아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곶감 핑계대고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가 어느 땐 섭섭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겨우 손가락 두 마디도 채 못 되는 쑥을 하나씩 흙을 털어 가면서 캐노라니 다리가 슬슬 절여왔다. 장갑을 벗어 침을 코에 3번 바르면 다리가 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흙 묻은 손으로 침을 바르니 입이 흙투성이다. 친구가 웃었다. 한 30분쯤이나 쭈그리고 앉아있었을까? "그만 캐고 들어가자. 아무래도 오늘 쑥 캔 숫자보다는 네 얼굴에 주근깨가 더 많아지겠다." 걱정해주는 친구 말에 못 이기는 척 일어서니 양쪽 다리가 저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무릎을 두 손으로 잡고 한참을 웃어댔다.  

  "너 아니? 쑥이 위장에 좋은 거?" 느닷없이 하는 내 말에 친구는 피식 웃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이맘때쯤 광양 용소골 뒷산에도 쑥이 한참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남편이 위장이 좋지 않아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집 아주머니한테 들어 알게 된 후, 매일 아침이면 바구니를 들고 용소골 뒷산으로 내달렸다. 아침 이슬을 먹은 쑥을 캐어 분마기에 찧어 남편에게 매일 복용시켰다. 뒷산 진달래꽃으로 술도 빚고, 화전도 부쳐먹으며 쑥버무리도 해먹었다. 쑥의 연한 잎이 없어지는 늦가을까지 매일 그렇게 했었다. 그 결과 남편의 위장병은 치유가 되어 거뜬해졌다.

  냉동실에는 지난해에 캐서 삶아 넣어둔 쑥이 지금까지 있었다. 무슨 욕심이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다며 친구는 웃었다. "그것이 무슨 욕심이냐? 그저 식구들한테 먹이려고 하는 네 정성이지 뭐."  향이 좋은 시원한 감잎 차를 마시고 나서 친구네 집을 나섰다.

   1층에 사시는 아주머니께 쑥을 조금 나누어 드렸다. 오늘 저녁은 세 집에서 똑같은 쑥으로 국을 끓이겠지?  햇빛에 얼굴 그을린다며 나물 캐러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지만, 봄이 가기 전에 내가 캐온 쑥으로 국을 끓인 것을 알면 퇴근한 남편은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