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연가

2005.04.13 17:01

이용미 조회 수:43 추천:8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용미
하나
   난 기어이 작년 추석에 입었던 갑사(甲紗)분홍색치마와 연두색저고리를 입었다. 양지마당 씨암탉은 고~고 고~고 알 품는 소리를 냈지만, 음지 뜸 잔설은 아직도 희끗 희끗 남아있는 3월 초였다. 어머니 따라 몇 번 가본, 먼 장터에서도 얼마를 더 가야 된다는 학교는 어떻게 생겼을까. 선생님은 어머니보다 무서울까. 책은 몇 권이나 나눠줄까.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설명이나 매서운 회초리도, 꼭 그 옷을 입어야 되는 내 고집에는 통하지 않았다. 아직 풀잎 하나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얼음물이 곳곳에 고여 있는 시오리(十五里) 흙탕길을 난  한 마리 분홍 나비처럼 훨훨 날았다.



서로가 이상형도 아니었고,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다. 검은 내 피부를 희게 보았다는 사람이나 둥글 넙적한 얼굴을 둥글게만 보았던 나나, 눈에 콩깍지를 덮어쓴 공통점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운명이라는 굴레를 치기 위한 좋은 조건으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 듯 결혼약속이 되어 한 달 후로 날이 잡혔다.

눈부신 햇살이 차창을 통해 쏟아질 때 살며시 잡는 손 뿌리치지 않은 채 고개만 차창 밖으로 돌렸다. 그 순간, 잡힌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거세지도 급하지도 않게, 속삭이듯 가만가만 일렁이던 분홍물결. 아스라한 분홍색 복사꽃 물결에 주체할 수 없던 눈물은 환희였는지 설움이었는지. 그 사람한테 기대어 울고 또 울며 내 집에 처음 인사 가는 날이었다.


  셋
  가지 않고 뭉그적대는 겨울이 다시 입은 칙칙한 가을 옷 색깔 탓인 듯했다. 그 핑계로 아래위 분홍색 개량한복을 맞췄다. 바람은 엉뚱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명절날에 해준 새 옷이 아니라도 솜씨 좋은 언니들 덕에 항상 말끔하게 입을 수 있었던 한복이었다. 양복에 밀려 초등학교 2학년으로 마감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크면, 결혼을 하면 한복만 입으리라는 생각을 어떤 때는 잊고, 어떤 때는 지우며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묻혀버리는가 싶던 바람이 작년여름 생각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일터에서 입는 개량한복이지만 방문객과 차별화한다는 취지아래 소속된 과에서 두벌을 맞춰준 것이다. 여름옷은 태양아래서도 주눅 들지 않는 붉은 치마 연노랑저고리였다. 가을 옷은 단풍 색 저고리와 낙엽색 치마였다. 새로 맞춘 한복은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추레하지 않고, 적당한 광택과 촉감이긴 하지만 일상복으로 입는다면 분명 촌스러울 좀 진한 분홍색이다. 그래도 충충한 나뭇가지에 꽃망울 벙긋대지 않은 나무 밑을 걷다보면 내가 곧 봄인 듯, 꽃인 듯 초등학교 입학식 날로 돌아가 기분이 좋아진다.

   상대적 부족함을 모르던 시절의 분홍색은 그냥 화사하고 곱게만 보였다. 중학교 봄 소풍 날 바라본, 낮은 담장너머에서 장독을 닦던 새댁의 분홍치마는 신비함으로 남아있다. 결혼식 날 폐백 때 붉은 치마 초록저고리 대신 입었던 내 분홍한복은  절제의 표현이었다. 느낌에 따라 화려하고 아련하며, 때로는 요염하게도 보이는 분홍색은 진한 그리움이다. 화끈하거나 느긋하지 못한 나를 감싸주는 보호색이기도하다. 붉은 정열과 하얀 정결을 조화롭게 버무려 편안함을 주는 색. 수 없이 바뀌고 소멸되는 갖가지 생각과 의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분홍색에 대한 나의 추억과 집착은 ‘그대가 옆에 있어도 난 항상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파지는 진달래꽃처럼, 유난히 많은 분홍색 옷과 물건들을 가지고도 항상 부족해서 허덕이는 듯한 이것은 분명 그리움이다.